16.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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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반지
2022.07.25.
변호사가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은조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작 두 번이나 접어 손안에 쥐고 있던 종이, [채무이행협약서]는 반으로 한 번 더 접어 휴대폰 만하게 만들었다.
“…….”
진땀을 흘리며 찬물을 들이켜는 모습을 누군가 보았을지도 모른다.
은조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아는 얼굴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한창 업무에 바쁠 시간이라 카페건 로비건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제 눈이 멀쩡하게 역할을 다하고 있었는지는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다.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며. 변호사는 누가 보아도 ‘나는 변호사’라고 이마에 써 붙인 것 같은 외모였으니.
그냥 딱 궁지에 몰린 빚쟁이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굳이 회사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장면이었는데.
처음에 자리를 옮기겠냐고 물었던 게. 이제와 생각해보니 전문가로서의 조언이었던 거다.
어떻게 알겠어. 생전 이런 일을 겪어 봤어야 말이지.
“후…….”
경찰서부터 변호사까지. 일련의 모든 아찔한 장면들이 차례대로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권재하. 너라는 인간.
“어떻게 이래…….”
머리끝까지 분통이 치민다 생각한 순간 이미 통화버튼을 누른 상태였다.
신호가 꽤 길어진다. 관, 둬? 끊……을까?
-여보세요.
“어…… 나야.”
-네, 압니다. 윤은조 씨.
원망과 분노를 한가득 품고 전화를 걸었지만, 담담한 그 목소리를 들으니 등골이 서늘해지는 이 기분은 또 뭔가.
-숨소리 들려주려고 전화했어요?
피식 입술을 터트리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어떻게 이래? 왜…… 변호사까지 보내? 꼭 이래야 돼? 내가 그 돈을 떼먹고 도망이라도 갈까 봐?”
-셋이? 어디로. 그게 가능한가.
또 웃는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은조는 알았다.
“웃지 마! 사람을 이렇게 당황스럽고 민망하게 만들고 웃음이 나와?”
-어떤 부분이.
“…….”
-어떤 부분이 민망했냐고.
“그거야 당연히…… 우리 사이의 일을, 지극히 개인적인 일인데…… 굳이 남에게 알릴 필요 없잖아.”
-나도 민망하더라.
“……?”
-금액이 너무 적어서.
“…….”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윤은조가 발갛게 익어서 바들바들 떨고 있다는 것을.
-은조야, 나는 가족 간에도 계약서를 써. 물론 이런 금액은 난생 처음이지만.
“…….”
-지금 볼까. 내가 그리 갈게.
헉. 갑자기? 은조는 마른 침을 삼켰다.
지금 상황이…… 지금 상황이 어떤 건데. 왜 그의 목소리에 갑자기 단물이 발라진 것처럼 들리지.
“아니! 나는 누구처럼 자유로운 몸이 아냐. 일하고 있잖아.”
-퇴근 후에 보자, 그럼.
“나…… 주말까지는 바빠. 일이 좀 밀렸거든.”
-그럼, 언제든 전화 줘. 지금처럼.
뭐지……. 이 통화의 목적이 뭐였더라. 은조는 빈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스커트에 문질렀다.
-마침 가고 싶은 곳도 생겼거든.
“내가 지금…… 데이트라도 신청한 걸로 들려?”
-내가 지금 데이트 삼아 어디 가고 싶다고 했나.
“…….”
-길 한복판에서 만날 건 아니잖아. 혹시 집에서 보고 싶은 게 아니면.
“알았어, 다시 연락할게. 생각도 좀…… 정리하고.”
-어떤 생각.
아직도 뭉그적거릴 이유가 있냐는 의미다.
“어차피 계약이라면 나도 내 입장을 정리해서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 그럼 정리 잘하고.
“…….”
-전화 줘. 지금처럼 너 편할 때.
.
.
“하! 내가, 편해서 전화를 했겠냐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선택한 은조는 너무나 느긋하고 여유 있는 채권자의 태도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남의 숨통을 조이면서 가고 싶은 곳이나 떠올리다니.
문득 걸음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은조는 생각했다.
거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분명 오늘 변호사를 보낸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윤은조를 궁지로 몰아넣고 즐거워하기.
왜. 네가 왜, 내게 그래야만 하는데.
분하고 원망스러운 게 어째서 네 몫이냐고.
***
“어서 와, 마눌.”
“엄마!”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반기는 목소리가 시원하다.
이리저리 내몰리다 드디어 안식처에 발을 들인 은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열 시가 다 되어 가는데 뭘 먹는 거야……. 엄마 손부터 씻고.”
은조는 안기려고 달려온 다온이의 볼에 살짝 입술을 붙였다 떼었다.
“아홉 시 반이야. 우리가 저녁을 되게 조금 먹었거든. 그리고 이거 다 먹을 거 아냐. 딱 두 조각씩 먹고 나머지는 내일 먹을 거야. 그렇지, 다온아?”
“응! 딱 두 조각!”
둘이 이미 입을 맞춘 게 훤히 보였다. 은조는 겉옷을 벗으며 민아에게 눈을 흘겼다.
“퍽이나. 늦은 시간에 애한테 이런 거 먹이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도 안 듣지.”
그러거나 말거나 우다다다- 다시 접시가 있는 테이블로 달려간 다온이가 빨리 오라는 손짓을 하며 귀엽게 웃었다.
그 사랑스러운 얼굴 때문에 은조는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또래들보다 야무지고 쾌활한 다온이는 오나가나 귀여움을 받는다.
하지만 은조가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살뜰하게 챙겨주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다.
민아는 그저 아이가 좋다고 하면 뭐든지 ‘오케이’부터 외치는 스타일이다.
아이한테 점수나 따고 보자는, 아주 어른답지 못한 행태다. 은조가 뾰족하게 치켜뜬 눈으로 민아를 쏘아보았다.
“내일 세끼는 된장찌개니까 그런 줄 알아.”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민아가 짐짓 모르는 척 설레발을 친다.
“된장찌개, 좋다! 나야 너무 좋지! 두부 호박 왕창 때려 넣고 넉넉히 끓여줘. 저녁까지 다온이랑 나랑 세끼 그거로 먹자.”
나쁜 계집애- 눈을 흘긴 은조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너 집에 있는데 왜 애한테 같은 걸 먹여. 그리고 뭐든 네가 좀 만들어 봐. 왜 맨날 내가 해준 밥을 못 먹어서 안달이야.”
“밥은 언니가 해야 맛있지. 내가 하면 알잖아. 그리고 언니야, 제발 먹을 것 앞에 두고 잔소리는 1절만 하자, 체하겠다. 어쩌다 먹는 야식인데 너무 빡빡하게 구네. 그렇지, 다온아?”
열심히 닭다리를 뜯는 다온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전에 먹으면 건강에 얼마나 안 좋은데. 정 출출하면 과일이나…….”
녜녜- 건성으로 대답을 한 민아가 종이 박스 안을 뒤적거려 작은 덩어리를 찾아 내밀었다.
“자, 날개. 바람 좀 나서 제발 주말에는 집에 없었으면 좋겠다, 언니야. 자, 날개! 최애 부분이잖아.”
“됐어! 생각 없어.”
언제나처럼 셋이 모이면 작은 아파트가 시끌벅적하다. 아옹다옹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야무지게 닭다리의 살을 전부 제거한 다온이가 냉큼 비닐장갑을 벗어 던지더니 은조에게 다가왔다.
실컷 먹었는지 작은 배가 동그란 바가지를 엎어놓은 모양이다.
“윤다온, 이게 두 조각 먹은 배야?”
아니. 고개를 가로저은 아이가 손가락 네 개를 펼쳐 보여주며 환하게 웃었다.
“썬샤인, 뽀뽀해줄까요? 아님, 뽀뽀해줄래요?”
“아- 그, 그래? 근데 다온아, 우리 강아지 입술에- 어어-.”
말릴 틈도 없이 품으로 덤벼든 아이가 은조의 흰 뺨에 붉은 자국을 만들어 버렸다.
쪽쪽쪽- 작은 입술이 지나가자 달콤 짭짤한 양념 맛이 났다.
“사랑해요, 썬샤인.”
“나도 우리 강아지 사랑해, 그런데 당분간 치킨 금지야.”
짓궂은 웃음을 흘린 은조가 다온이의 겨드랑이 아래로 밀어 넣은 열손가락을 마구 움직였다.
까르르, 까르르 아이가 숨넘어가는 웃음소리를 내며 몸부림친다.
“아흐- 엄마아- 살려주세요- 아흐흐-.”
손을 움직이지도 않고 대고만 있는데도 데구르르, 아이가 무릎 위에서 구른다.
고달팠던 하루를 쉽게 지워버리는 아이의 웃음.
은조도 행복한 웃음소리를 냈다.
***
며칠 동안 재하는 수시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윤은조]
화면에 뜬 그 이름을 본 이후 생겨버린 이상한 습관이다.
전화야 강 비서를 통해 들어오는 게 대부분 중요한 것들이고.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화기를 들고 떠드는 걸 즐기는 성격도 아닐뿐더러. 지인들도 중요한 일이다 싶으면 강 비서를 통한다.
“…….”
처음에 휴대폰 화면에 뜬 그 이름을 본 순간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찰나였지만 시간과 장소를 지각하지 못하는. 꿈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
그리고 지금, 모두가 떠나버린 집무실에 혼자 남아 있는 권재하는 역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 전화는 없었다.
하지만 재하는 어제 새 집에 들렀고, 드레스룸 액세서리 진열장 구석에 숨어 있던 작은 벨벳 상자를 찾아냈다.
반지.
최고급 퀄리티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하이엔드 브랜드의 심플한 플래티넘 링이다.
은조와 통화를 하던 그때, 재하는 통창 아래로 길게 펼쳐진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겨울의 뉴욕, 허드슨 강이 떠오른 건…… 글쎄.
이제 모든 두뇌 회로가 그녀를 난처하게 만드는 쪽으로만 기발하게 돌아가기 때문인가.
“…….”
천천히 책상서랍을 연 재하는 붉은 벨벳 상자 하나를 꺼냈다.
윤은조에게 주었었고, 돌려받았고.
저주의 족쇄처럼 6년 동안 그의 곁에 머물러 있던 반지.
수차례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 왜 버리지 못했을까.
어디 버리지만 못했나. 결국 이렇게 꾸역꾸역 싸 짊어지고 돌아오지 않았는가.
하. 헛웃음을 웃은 재하는 검은 창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꿈에서 그녀를 안았던, 그 새벽.
뜨겁게 달구어졌던 피부는 침대 위에 혼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차갑게 식어버렸다.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자 칼날 같은 바람이 막힌 숨길을 뚫어주었다.
보통은 파랗던 뉴욕의 새벽이 쏟아지는 눈으로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아니, 생각이라는 것 자체를 하기는 했었나.
그대로 파자마 위에 코트를 걸친 권재하는 반지를 찾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머플러도 없이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미친 사람처럼 새벽의 도심을 걸었다.
코트 주머니 안에 든 반지를 꼭 쥐고, 그대로 7블록을 걸어 허드슨 강 산책로에 이르렀다.
어느새 잦아든 눈보라 안에 서 있었지만. 그는 결국 반지를 던지지 못했다.
그게 이렇게…….
여전히 눈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