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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던져졌다 (17/100)


17. 던져졌다
2022.07.28.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안내 데스크에 서 있는 여자는 몸에 잘 맞는 유니폼을 갖춰 입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은조를 향해 밝은 미소를 보이며 깍듯하게 인사부터 했지만.


“권재하 대표님을 뵈려고 왔습니다.”

그 이름을 들은 여자의 눈에서 웃음기가 걷히는 것을 은조는 알아챘다. 하지만 붉은 입술은 여전히 웃는 모양이다.


“약속을 하셨습니까?”

“그게, 갑자기 오는 바람에 약속을 한 건 아니에요. 몇 번 통화를 시도했는데 연결이 되지 않네요. 하지만…….”

“미리 약속을 잡으신 게 아니시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단 윤은조가 왔다고 전해 주세요.”

당당한 목소리를 낸 은조는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마침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입고 있었다는 게 위안이 될 줄이야.


“잠시 기다려 주세요. 비서실로 연락을 넣어 보겠습니다.”

인터폰을 집어 든 여직원은 힐끔거리며 은조의 얼굴을 살폈다.

꽤 큰 빌딩이다.

윤이 반짝반짝 나는 대리석 바닥과 갤러리를 연상시키는 독특하고 우아한 조명.

기둥도 안 보이는 탁 트인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의 차림과 얼굴, 표정까지 꽤 그럴듯해 보였다.

이제 앞길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js pharm에 비하면…… 하…….

이상한 계약서를 받고 눈앞이 캄캄하던 참에 날벼락 같은 소리까지 듣고 말았다.
 


[이미 넘어갔대. 이제 이 회사 주인은 이성춘이 아냐, 회장은 무슨. 그 인간도 이제 일개 월급쟁이야.]

 
예상했던 일이 결국 일어났지만 팀장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솔직하고 든든한 조언도 덧붙여졌다.
 


[당장 구조조정은 없다고 들었지만, 있다 해도 뭐 우리랑은 좀 멀긴 해. 아무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포트폴리오는 새로 준비들 해 둬. 내가 도와줄 거 있으면 말하고.]

 
‘블랙스톤 파트너스’

지금 윤은조가 서 있는 빌딩은 미국 최대 사모펀드(Private Placement Fund) 운용사의 건물이다.

이제 이 공룡같이 무시무시하고 무자비한 기업의 수장인 권재하가 그녀의 상관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은조는 자신이 권재하가 두고 있는 체스판 위의 말(馬)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원하는 방향,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그런.


“윤은조 씨!”

“네? 네.”

날카로운 목소리가 상념에 빠져 있던 은조를 깨웠다.


“곧 비서실에서 사람이 내려올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네- 고개를 끄덕인 은조는 안내 데스크의 끝 쪽으로 걸어가 큰 그림이 걸린 벽 아래에 섰다.


 


“왜 이러고 서 있어.”

이번에는 묵직한 목소리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은조의 시선을 들어 올리게 만들었다.


“어, 기다리고 있었어. 누가 내려온다고…….”

“정문에 차 대기시켰다는 이야기 전달 못 받았습니까.”

서슬 퍼런 대표의 음성에 안내데스크의 여자는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나 괜찮은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커다란 손이 은조의 손목을 그러잡았다.


“전화를 했으면 좋잖아.”

나무라는 목소리에 왠지 다정함이 묻어 있는 것처럼 들리는 건 착각인가.

종종걸음을 치며 인형처럼 끌려가던 은조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했어. 계속 통화 중이던데.”

“세 번이나 했을라고, 윤은조가.”

“……두 번.”

“하! 황송해서, 원.”

“갑자기 일정이 취소돼서 무작정 온 거야. 못 만나면 집에 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잘했어.”

재하는 당황한 눈을 한 은조를 자동차 조수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자동차는 출발했고 한동안 입을 닫고 있던 은조에게 재하가 문득 제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

“설정 바꿔. 난 운전 중이잖아. 통화대기 말이야.”

굳이- 한숨을 쉬고 그의 휴대폰을 조몰락거리던 은조가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야?”

“조용한데. 너 배고프면 조용하고 밥도 먹을 수 있는데.”

“배 안 고파.”

“배 안 고프고 싶은 거겠지.”

“비꼬지 마. 밥 말고 이야기 하려고 왔어.”

“밥 먹으면서도 이야기는 할 수 있는데. 참, 어려워. 윤은조. 여전히.”

“…….”

 

.
.

한강 둔치를 따라 걷는 두 사람 한동안 별 말이 없었다.

평일이라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지난밤에 소나기가 지나가서인지 공기는 맑고 신선하다.

낮의 햇살은 꽤 뜨겁다고 느껴질 정도였는데, 어둑해진 강변의 바람은 계절에 맞는 정도로 서늘하다.

수분을 머금은 촉촉한 바람이 은조의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쓸고 지나갔다.


“발 안 아파?”

“괜찮은데, 왜?”

“저기.”

불이 환하게 켜진 카페가 보였다.


“여기 앉아서 잠깐만 기다려.”

은조의 대답도 듣지 않은 재하는 빠른 걸음으로 카페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 손에 마실 것을 들고 나타났다.


“안에 사람들 많아. 음악 소리도 시끄럽고.”

“응.”

“밀크티, 괜찮지?”

“좋아. 고마워.”

은조는 그가 건네는 차를 받아 들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밀크티는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다.


“되게 오랜만이다.”

“응? 뭐, 가?”

정면을 바라보던 재하의 시선이 느릿하게 은조에게로 와 닿았다.

검고 짙은, 잔잔하게 흔들리는 강물 같은 눈동자. 은조의 얼굴이 연하고 고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잠시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하가 입술을 터트려 웃었다.


“한강 보는 거.”

“아…… 나도 멀리서만 봤지 이렇게 온 건 오랜만이야.”

재하의 시선이 다시 흐르는 강물로 돌아갔다.


“은조야.”

“……말해.”

할 말이야 제가 더 많겠지만 은조는 먼저 향긋한 차를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왠지 아쉽고 답답한 소리는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었다.


“마지막 기회가 있으면 잡을래?”

“마지, 막? 기회라니? 무슨 소리야? 혹시 그 이상한 계약을 취소 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지려던 얼굴이 순간 파랗게 변했다.

넓게 편 권재하의 손 가운데. 그것이 있었다!

반지가. 왜.

어떻게 그에게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반지는…… 분명히 잃어버렸다! 뉴욕에서!


“놀랄 것 없어.”

“어떻게…… 그게, 왜…….”

단번에 깔깔해진 목안에서 갈라진 음성이 나왔다.


“어떻게, 라니. 네가 거절했고, 굳이 돌려보냈고.”

“…….”

“내가 버리지 않아서, 여기 이렇게 있는 거지.”

“…….”

“이거 지금 얼마나 할까.”

“……글쎄. 나는…… 원래 가격도 모르니까…….”

“5억 넘게 줬었어.”

“…….”

“다시 받을래?”

“……무슨 소리를.”

“왜, 결혼이라도 하자는 소리로 들려?”

“…….”

“받아. 받아서 팔아. 6억 더 받을 수 있어.”

“……아니.”

정신을 차려야한다.

권재하는 최선우가 누군지 몰랐다. 그럼 내게 일어났던 일도 모른다는 뜻인데.

반지는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걸까. 내가 뉴욕에 갔었다는 사실만 아는 건가.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야…….


“정말 안 받겠다고.”

“……응.”

무섭고 섬뜩해. 왜 그게 네 손안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소름끼쳐.


“안 받겠다면.”

순식간이었다.

그가 제 컵을 옆에 내려놓는가 싶었는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나 싶었는데.

긴 팔을 뒤로 뻗는가 싶었는데.

반짝거리는 작은 금속 물체가. 아니, 6억짜리 다이아몬드 반지가 포물선을 그리고.

……사라졌다.


“안 받겠다면. 이게 맞지.”

담담한 목소리를 낸 권재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검은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약서에 사인해. 3일 후에 들어 와.”

“……거짓말.”

“뭐?”

“반지. 진짜 아니잖아.”

“왜 그렇게 생각하지.”

천천히 은조에게 돌아온 권재하의 시선은 밤공기보다 서늘했다.


“윤은조.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 가짜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없어.”

“…….”

“너랑 살았던 그 2년.”

“…….”

 

 
반지는, 던져졌다.

아니, 주사위가 던져졌다.

본격적인 연극에 돌입해야 이 게임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사인할게. 대신 약속해.”

“어떤.”

“선을…… 지키겠다고. 무슨 뜻인지 알거야.”

“비슷한 말, 그때도 했었어.”

21살, 그 여름에. 픽 웃은 권재하는 식어버린 커피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

다음 날, 저녁.

흰색과 보라색 꽃이 어우러진 예쁜 꽃다발을 든 선우가 은조네 집을 찾아왔다.


“오빠, 이거 나 주는 거예요? 대박!!”

활짝 웃는 민아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탐스러운 꽃다발을 낚아채듯 뺏어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선우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다온아. 인사드려야지. 의사 아저씨.”

“안녕하세요! 윤다온입니다!”

으레 남자 어른을 만나면 그러하듯 다온이의 눈이 밝은 빛을 내며 반짝거렸다.


“다온, 아저씨 기억 못하지? 너 세 살 때 봤는데.”

선우가 무릎을 접고 앉아 저와 눈높이를 맞추자 녀석의 눈에서는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빛이 났다.


“지금은 기억 안 나지만 좀 생각해 볼게요.”

그래- 선우가 다온이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다온아, 세 살 때를 기억하는 어린이는 아마 없을걸. 너는 엊그제 엄마랑 한 약속도 기억 안 난다고 하잖아.”

은조는 꽃다발을 품에 안고 괜히 몸을 배배 꼬고 있는 민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저래.

.
.



“언니, 오늘 술 잘 받나 봐.”

제 잔에 소주를 따르는 은조를 바라보던 민아가 선우를 향해 모르겠다는 눈짓을 했다.


“받아서 마시겠니. 흐…… 쓰다, 너무.”

“그만 마셔요, 그럼.”

선우가 부드럽게 말려보았지만 은조는 쓰다는 술을 홀랑 입안으로 털어 넣더니 민아를 향해 눈을 홉떴다.


“너는! 그럴듯하게! 음식을, 이렇게 할 줄 알면서! 왜 매번 나만 부려 먹었어!”

“……어? 그거야 언니가 더 잘하니까.”

“아, 선우 씨 미안해요. 나는요, 선우 씨처럼 이런 근사한 상을 얘한테 받아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아서. 질투가 나서요.”

……윤은조, 잊으면 안 돼. 권재하는 아주 위험한 인간이라는 걸.


“제가 기회를 만들어서 두 분한테 대접 한번 할게요. 이번에는 서울에 오래…….”

민아가 선우의 팔을 건드리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언니 취했어요.


“이미 한 번 겪어봐서 잘 알아…….”

도저히 손을 대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만드는 이상한 기술.

윤은조로 하여금 짙고 아찔한 미혹의 구렁텅이에 기꺼이 발을 들이게 만드는.


“나쁜…… 놈.”

그렇게, 지옥으로 가기 전 마지막 파티에서.

은조는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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