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빨간색 캐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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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빨간색 캐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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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빨간색 캐리어
2022.08.01.
3일 후.
전날 간단하게 짐을 챙긴 은조는 택시를 타고 출근했다.
짐이라고 해봤자 당장 갈아입을 속옷과 잠옷, 블라우스와 스커트 서너 장이 전부였다.
아량이 넓으신 고용주께서 주말에는 집에 가도 좋다고 했으니까, 꼭 필요한 것만 챙겼다.
아, 혹시 몰라 낡은 티셔츠와 청바지, 역시 낡은 앞치마도 한 장.
지난 며칠간 권재하의 집에 들어간다는 사실만큼이나 골치 아픈 일이 또 있었다.
이민아.
어찌나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꼬치꼬치 캐묻는지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집에 안 들어온다는 게 말이 돼?]
[언제는 집에 좀 들어오지 말라며.]
[언니! 자꾸 다른 소리만 할 거야? 대체 무슨 일인지 알려는 줘야지!]
[어제 말한 그대로야. 돈을 많이 준다는 데가 있어서 일을 좀 맡았어.]
[일? 무슨 일, 누가? 이거, 나 때문이지? 아냐? 설마- 권재하, 그 사람이 빌려준 돈을 당장 달래? 친한 거 아니었어?]
[그 사람이 왜 나와, 상관없어. 쓸데없는 얘기 지어내지 말고 다온이한테나 집중해.]
[뭘 집중해! 얼마냐고! 그 깡패들한테 얼마나 준 건데!]
[그 사람들이랑 상관없다고 말했지. 너 한가하면 뉴스 좀 뒤져 봐. 우리 회사 팔렸어.]
[……뭐어?]
[더 묻지 마. 내가 이 집에 가장이잖아. 해야 하고, 할 만하니까 결심한 일이야.]
[언니…… 그럼, 회사 그만둬야 되는 거야?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당장 그만두거나 그런 거 아냐. 그냥 거기까지만 알고 있어. 설마 내가 어디 가서 사고 치겠니. 걱정할 거 없어.]
[…….]
그리고 다온이.
전날 밤에는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못 알아들었는지 여행 잘 다녀오라며 시크하게 굴더니.
막상 아침에 깨어 은조의 캐리어를 보고는 다짜고짜 울음부터 터트렸다.
아이가 크게 상처를 받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은조는 가슴을 졸였다.
[딱 하룻밤만 있다가 올 거야, 정말로. 약속!]
권재하에 대한 원망이 명치끝까지 차올랐지만.
이미 내린 결정을 번복할 수도 없었다.
[엄마 일 때문에 조기- 근처에서 자고 오는 거야. 딱 하루. 어디 먼 데 가는 게 아니고 다온이 현장학습 가는 것처럼 그런 거.]
[나는 도시락만 먹고 돌아왔잖아! 이모가 저 가방은 어디 멀리 여행 갈 때 쓰는 거라고 했어! 나도 같이 갈 거야!]
울먹이는 다온이를 은조에게서 떼어낸 민아가 머쓱해 하며 아이를 품으로 당겼다.
[하이- 똑똑한 녀석. 기억력 하난 끝내준단 말이지…….]
흐으아앙- 서러운 아이의 울음소리가 은조의 가슴을 후벼 팠다.
[…….]
[다온이 너, 이모 섭섭하게 이럴 거야? 이모도 음, 마……라고 했잖아.]
[이모가 왜 엄마야! 이모지! 윤은조 엄마! 이민아 이모! 둘 다 미워!]
[아가…… 강아지 이리 와.]
은조는 다시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작은 몸을 끌어안고 따듯한 이마에 입술을 누르던 은조는 알았다.
아이를 달래려 애쓰는 이 순간에도 정작 위로 받고 있는 것은 자신이라는 걸.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금 뼈저리게 깨달았다.
[있잖아, 엄마가…….]
작은 손을 입술 위에 올린 은조는 올 때 양념 치킨을 사오겠다고 속삭였다.
[양념이랑 후라이드, 두 마리.]
[으응……?]
눈물로 반질거리는, 찹쌀떡 같은 동그란 뺨이 샐룩샐룩 움직인다.
[으으- 귀여워 죽겠어, 눈물이 쏙 들어갔네?]
그제야 미소를 되찾은 은조는 쪽쪽거리며 아이에게 입을 맞추었다.
***
드르륵 드르륵- 무겁지도 않은 캐리어가 요란한 바퀴소리를 냈다.
하필 또 빨간 색이야- 사무실에 들고 올라가면 모두가 질문 세례를 퍼부을 텐데.
어디 맡길 데도 없고, 참 난감하네.
“선배님!”
“……장미 씨.”
“웬 캐리어에요? 선배님, 어디 여행이라도 가실 거예요? 저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아냐, 여행은 무슨. 그냥 짐이야. 사정이 좀 있어서.”
“음, 무거워 보이진 않는데. 그 핸드백이라도 제가 들어 드릴게요, 주세요.”
“고맙지만 괜찮아, 얼른 가자. 아침은 먹었어?”
“아뇨. 요즘 저 아침으로 별다방 베이글 먹어요. 같이 들렀다 가요, 선배님.”
“그럴까.”
아무렇지도 않은, 평소처럼 상쾌한 아침의 출발이었다.
점심 전까지는.
***
“허허- 말이야 그렇게 해도 이제 그만 나가쇼- 하면 나라고 별수 있나. 박 회장이랑 슬슬 골프나 치러 다니면서…….”
“삼촌!”
“어이쿠!”
벌컥 문이 열리고 귀청을 떨어뜨릴 정도로 울린 목소리에 이성춘은 들고 있던 전화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왕나나였다.
“너…… 너, 이 녀석.”
“왜! 왜, 말씀 안하셨어요!”
“아, 살살 좀 얘기해! 삼촌 심장 안 좋은 거 몰라! 아휴- 이놈의 자식이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나, 웬 놈의 목청이 그냥 쩌렁쩌렁.”
“우리 오빠 사무실까지 만들어 주신다면서요!”
“우리 오빠?”
“권재하 말이에요! 권재하!”
“그놈이 언제부터 네 오빠야? 그리고 내가 만들어 주고 말고 그럴 입장이냐? 필요하시다면 움직여 드리는 거지. 크흠.”
바닥에 떨어졌던 휴대폰을 집어 든 이성춘은 젊은 대주주를 떠올리며 다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잘나도 어디서 지나치게 잘난 놈을 또 좋다고 저렇게.
“나나야, 옛말에 넘치면 모자라니만 못하다는 소리가 있잖니. 이 삼촌이 보기에는 그게 딱 그놈. 아니, 권 대표를 두고 하는 말이더라.”
“알아요! 잘나도 너무 잘났잖아요! 어디 한 군데라도 버릴 데가 있어야 말이죠! 그러니까- 왜에! 여기다 따로 방까지 만들어 주시냐고요, 왜! 왜에에!”
소파에 주저앉은 왕나나는 아이처럼 징징거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니, 나는 도통 무슨 소린지를 모르겠네. 그깟 방 하나 만들어 놓는 게 무슨 대수라고 너한테 보고를 해야 하는데? 그쪽에 회사 넘긴 것도 알고 있었으면서.”
“회사를 넘긴 거야 내가 알 바 아니고! 오빠를 왜 여기에 끌어들이시냐고요!”
이제 보채는 수준을 넘어 울 것 같은 얼굴이다.
“아니, 나야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한번 해 봤는데 7층이 뷰가 좋으니 어쩌니 하면서…….”
“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던 왕나나는 이내 철퍼덕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나나야?”
“……삼촌.”
“그래, 왜.”
“저 디자인 팀에 자리 좀 만들어 주셔야겠어요. 당장이요.”
“잉?”
“잉, 말고요! 자리! 데스크!”
“네가 디자인팀엘 왜. 뭐하게?”
“뭐든…… 해야죠.”
잠시 풀이 죽은 것처럼 저러지만 언제 다시 생떼를 쓰며 억지를 부릴지 모르는 조카다.
이성춘이 가는 눈으로 왕나나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너 전에 디자인실에 누구? 그, 자르라 마라 난리를 치더니, 혹시.”
“주실 거죠?”
“하이구야. 내가 참 막판에 체면이 영 말이 아니구먼.”
“당장 가요. 얼른요!”
또 눈알을 이리저리 바쁘게 굴려대는 모양이 영 심상치 않았지만 이성춘도 별수 없었다.
어차피 이제 제 것도 아닌 회사.
“에이, 나도 모르겠다.”
***
“네? 회장님!”
원래도 제 할 말 다하고 사는 장 팀장이 대놓고 빽 소리를 질렀다.
“하이구야, 늙은이 오늘 황천 가겠다. 그냥 인턴 이라고 생각해요, 장 팀장. 아무 일이나 시키라고. 막 부려. 시다 몰라? 시다바리!”
기가 센 두 여자 사이에서 이성춘은 이제 저도 더 이상은 모르겠다는 듯 양손을 휘휘 내저었다.
“네, 인턴이든 시다바리든 난 회장님 조카예요. 그래서, 어디 앉으면 되죠?”
빤빤한 얼굴의 왕나나가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자 장 팀장의 얼굴이 고구마처럼 붉게 변했다.
“회장님! js pharm이 언제부터 동네 마트였습니까!”
절대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막나가기로 결심을 한 건지 장 팀장이 허공에 대고 삿대질을 해댔다.
“전 이 회사에 대한 애정이 회장님보다 깊습니다! 제 첫 직장이고 젊음을 모두 바쳤다고요!”
“알아요, 알다마다! 장 팀장, 잘 아니까 일단 진정 좀 해요. 아니, 그런데 애정이 아무리 깊다 쳐도 창업자인 나만 하겠나?”
“헌신짝 팔듯이 냅다 팔아 치워버리신 분이 무슨 회사에 대한 애정을 논하십니까!”
“장 팀장, 말 다 했어요? 이제 볼 장 다 봤다 이건가! 팔긴 팔았어도 내가 아직 회장이야.”
“그렇다면 더더욱 이러시면 안 되시죠!”
이제 유리벽 너머 다른 부서 직원들까지 대놓고 시선을 보냈다.
“아수라장이라는 게 이런 거죠, 선배님.”
“……그러게 말이야.”
“어떡해요, 그냥 계속 지켜만 봐야 돼요? 제가 팀장님을 말려볼까요?”
“글쎄…….”
한껏 긴장한 은조의 귀에는 정작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틀 전 부터인가 같은 층을 사용하고 있던 연구부서의 일부 공간이 인테리어를 급하게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팀장의 말로는 사무실을 하나 새로 꾸민다고 했는데.
왕나나가.
무용을 전공했지만 놀고먹는 게 일이고 취미인 그녀 왕나나가 여기에 왔다면.
“하…….”
왕나나가 좇는 것은 비단 유흥과 사치뿐이 아니라는 것을 은조는 알고 있다.
넘쳐나는 돈으로도 절대 살 수 없는, 그 남자.
권재하.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일까.
팀장님, 아니, 회장님. 새로 만드는 사무실이 혹시 권재하의 것인가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은 은조의 눈에 자신을 향해 도끼눈을 뜨고 있는 왕나나가 들어왔다.
“…….”
사면초가- 앞에는 권재하, 뒤에는 왕나나.
진퇴양난- 두 인간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 즉, 엎친 데 덮친 격.
온통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지만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고립의 상태.
아니, 윤은조한테는 ‘사고무친’이 제격이지.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외롭고 곤란하고 서글픈 상황.
그냥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나 혼자, 오직 혼자서 헤쳐 나가야 되는 상황 말이야.
은조는 사라지는 이성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최장미가 열을 식히지 못하고 씩씩대는 장 팀장에게 차가운 물을 가져다줬다.
“쟤 왜 저래.”
벌컥벌컥 냉수를 들이켠 장 팀장이 턱 짓으로 왕나나를 가리키며 장미에게 물었다.
모르겠는데요- 최장미가 도리질을 하자,
“왕나나 씨! 윤은조 씨한테 반했어요? 아님 눈이 원래 그렇게 생겼나?”
팀장이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매섭게 쭉 찢어진 왕나나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은조의 책상 아래 놓여 있는 그것.
빨간색 캐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