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이규호 (19/100)


19. 이규호
2022.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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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원래 그렇게 생겼냐고요? 듣고 있어요?”

제각기 고개를 돌린 디자인팀 직원들이 키득거렸다.

왕나나는 표독스러운 눈초리를 여전히 은조의 빨강색 캐리어에 꽂은 채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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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애 팀장님? 나이도 꽤 있어 보이는데 JS 아니면 딴 데 갈 만한 데 있어요? 어딘지 알려줘 봐요. 미리 연락 좀 해 놓게. 받지 말라고.”

새빨간 립스틱이 발라진 입술은 어른 여자의 그것이지만.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은 딱 10살짜리 심술쟁이 어린애의 입에서 나올 법한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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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대가 어떤 시댄데 그런 소리를 그리 쉽게 하시나요. 왕나나 회장 조카 씨.”

밀릴 상대가 아닌 장 팀장이 질렸다는 듯,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손을 내젓더니 바로 본인 의자에 앉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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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도 잘 들으세요. 제가 지금, 아니 요 며칠 기분이 아주 최악이거든요. 그러니까! 제발! 더 보태지는 말아주시면 정말 좋겠어요.”

다소 누그러진 말투였지만 나나의 눈은 여전히 은조를 흘겨보는 중이었다.

.
.

작은 폭풍이 쓸고 갔지만 결국 모두가 다시 자리에 앉았고 손을 놓았던 업무로 눈을 돌렸다.

중간 중간 도대체 처음 겪어보는 캐릭터인 왕나나가 무얼 하나 힐끗거리기는 눈이 있기는 했지만 대게는 본인들의 일을 보느라 바빴다.

한참이나 손에 쥔 휴대폰을 멀거니 들여다보던 왕나나가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작지 않은 그 음성에 모두가 귀를 기울일 게 뻔한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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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오빠! 왔어? 아직……이야? 나 있잖아, 사실 오늘부터, 뭐? 오늘…… 아냐? 오빠? 오빠아? 여보세요?”

으이씨- 심술이 난 아이처럼 전화기를 책상 위로 팽개쳐버린 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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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 간식 먹어요. 제가 직접 사 올게요. 첫 출근 기념으로. 뭐 드시고 싶은 거 말씀하세요. 주저하지 마시고.”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누구도, 반응을 내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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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씨, 몰라! 아이스크림이든 케이크든 뭐든 전부다 사 올래. 당 떨어져서 머리가 안 돌아가서 뭐든 좀 먹어야겠어요. 드시든지 말든지 일단 넉넉히 사 올게요. 괜찮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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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그건 님 마음대로 해도 그만인데. 왕나나 씨 오늘 머리 쓸 일 없어요. 이거, 이거나 30부 정도 카피해서 묶어둬요. 그리고 간식 쇼핑을 하든, 퇴근을 하든 맘대로 하셔요. 끝.”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며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장 팀장의 목소리는 시니컬하고 무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말이 그렇다는 건지 딱히 카피를 하라고 종이를 내밀지 않는 게 더욱 왕나나를 무시하는 모양이다.

흥- 잠시 장 팀장을 흘겨보던 왕나나가 대뜸 은조에게 바짝 다가왔다.

치켜뜬 눈이 빨간색 캐리어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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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뭐예요? 어디 떠나요? 멀리?”

잠시 앉은 채로 찬찬히 그 빤빤한 얼굴을 올려다보던 은조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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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개인적인 짐이에요. 알 거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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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지긋지긋하다, 정말.

은조는 왕나나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역시 무시로 일관했다.

그리고 휙 등을 돌려 사무실을 나가는 뒤통수에 대고 담담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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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마찬가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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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 2층.

회사의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온 왕나나는 자신의 자동차 운전석으로 냉큼 기어들어갔다.

분을 못 이겨 벌벌 떨리는 손이 급하게 콘솔박스 뚜껑을 젖히더니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새빨간 입술 사이에 한 개비 담배를 끼워 넣었지만 피슉- 라이터 버튼 위의 손가락이 힘없이 미끄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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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샹!”

이내 뿌연 연기를 뱉어낸 나나는 닫혀 있던 자동차의 창문을 조금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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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거머리 같은 X.”

구질구질한 껌딱지 같은 X.

찰진 욕지거리를 굴리는 붉은 입술과 턱이 바들바들 떨렸다.

다이아몬드 수저 왕나나는 태어나서 이제까지 갖고 싶은 것을 못 가져 안타까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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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그리고 이거- 손가락질 한 번, 눈짓 한 번이면 모든 게 그녀 손에 쉽게, 당연하게 쥐어졌다.

오직 하나, 권재하만 빼고.

아직 그의 마음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이제 한국으로 돌아온 마당이니 일이 쉬워질 거라는 생각에 한참 가슴이 부풀었었는데.

하필 또 윤은조가 나타났다.

어디 짱 박혀서 애나 키우고 있지 않을까 가끔 스치듯 생각은 했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필 외삼촌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던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틈도 없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나 버렸다.

삼촌 회사를 사들인 게 블랙스톤이라는 것을 알고 너무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했다.

도대체 권재하는 윤은조를 갖기 위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은 그 둘을 갈라놓기 위해 또 무슨 짓까지 해야 하는 걸까.

찰거머리, 기생충 같은 X, 대체 언제까지 훼방을 놓을 건지.

나나는 좌석에 기대며 매섭게 정면을 쏘아보았다.

스무 살, 서울로 간다는 재하 때문에 저도 무작정 미국 생활을 접고 서울로 왔다.

그가 단지 여자 하나 때문에 미국 명문대의 졸업을 미루고 한국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틀을 앓아누웠다.

거지같은 옷이나 걸친 여우같은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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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살 윤은조. 꼴에 공부는 좀 하는지 장학금을 받았고, 콧대가 높다는 소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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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무슨 생각해? 내 말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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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듣기는커녕 나나가 곁에 있는지 관심조차 없는 얼굴.

양손으로 감싸 저만을 향하게 하고 싶은, 아름다운 그 얼굴이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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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어디 보는 거야? 저기? 뭔데…… 누구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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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시게 하지 말고 가라고 말했지.]

 
이렇게까지 차가운 재하가 아니었었는데. 나나는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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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성가시게 하려는 게 아니라 미국에서 승호랑 제니가 들어온다니까, 시간을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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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고.]

 
혼자 있고 싶으니까.

어디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그는 미국에서의 모습과 사뭇 달라보였다.

여자로서 받아주지만 않았지 곤란한 일이라도 생기면 선뜻 도와주기도 했는데.

이제 영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눈빛도 달랐다.

냉정하고 담백하기만 했던 눈빛이 이상한 빛을 내며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것을 나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문득문득 권재하의 시선 안에서 자꾸 겹쳐져 보이는 얼굴.

하얗고 예쁘장한 얼굴, 새치름한 분위기의 여학생.

윤은조였다.

낮은 욕지거리를 뱉은 왕나나는 뉴욕에서의 장면을 떠올리며 다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하지만 덜덜 떨리는 손이 라이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기억에서 지우고 싶지만, 결코 지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안다.

뿌연 연기가 가득 찬 자동차 안에서 왕나나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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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X은, 그냥 그때 죽었어야 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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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야근 같은 거 없어. 전부 칼퇴 해. 월차 연차 못 찾아 먹은 사람 있으면 알아서들 챙기고.”

장 팀장의 말에 직원들은 은근 기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건 뭐.

하늘이 권재하만을 돕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면 따로 무엇이라 설명이 가능할까.

직장 생활 5년 만에 칼 같이 퇴근하라는 기적 같은 소리를 상사에게 들었지만.

은조에게는 망조 들린 회사 대신 ‘새로운 고용주’에게 충성하라는 신의 계시같이 들렸다.

인턴들과 주니어 디자이너들은 어린 친구들답게 약속을 잡느라 바빴다.

디자이너라는 게 겉보기에는 좀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지만 밤샘도 많았고 머리 지끈거리는 경우가 잦은 직업이다.

하지만 운 좋게 정직하고 성실한 상사를 만났고 동료며 후배들까지 전부 손발이 잘 맞고 친근했다.

오래 다닐 수 있는 퍽 만족스러운 직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포트폴리오를 새로 만들어야 하나.

은조는 새롭게 꾸며지고 있는 맞은편의 사무실을 바라보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집에서 부려먹는 것도 모자라 회사에서도 얼굴을 마주 대해야 하는 거라고?

가만히 보니 민아 일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만나게 되어 있었어.

권재하, 성미가 까다롭고 별나긴 해도 일에 있어서는 철두철미한 남자다.

미국의 명문 알렉시스 가(家)를 이끌 차세대 오너(owner)로서 필요 이상으로 제 몫을 해내고 있다는 내용의 뉴스를 얼핏 본 적이 있다.

아름다운 금발에 푸른 눈을 갖은 약혼녀와 찍힌 사진도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어쩌고저쩌고-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사들.

단 한 번도 그 내용까지 낱낱이 읽은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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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저나- 선우 씨랑 민아는 뭐지- 은조는 며칠 전 선우를 집으로 초대했던 날을 되짚었다.

두 사람 사이에 감돌던 그 묘한 기류는, 내 착각인가.

컴퓨터 모니터 위에 있는 커서를 하트 모양으로 움직여 보았다.

♡…… ♡……

일단 민아 눈 모양이 요렇게 하트로 변한 것은 분명한데.

게다가 상냥한 목소리며 나긋한 눈빛까지. 급 여성스러움을 대 방출하는 모양이라니.

민아는 선우에게 대접할 음식을 만드는 데 매우 진심이었고 결과도 꽤 성공적이었다.

허당 끼가 있기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얼굴도 예쁘장하고. 무엇보다 성격이 긍정적인 게 그 애의 큰 매력이다.

그래도, 설마…….

은조는 흐트러진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고개를 살짝 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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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나나의 저주는 결국 그날 저녁 본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단지 그 얼굴을 스치기만 해도 은조에게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데.

사무실에서 그런 난장을 저질렀으니.

남은 하루가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몸을 사리며 조심했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칼퇴하라는 팀장의 말대로 정각에 짐을 챙겨 당연히 정문으로 나왔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후문으로 도망이라도 갔을 텐데.

도망이라면 또 어디로.

권재하에게로?

눈살을 찌푸린 은조는 혹시 누가 보면 어쩌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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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 일이에요,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그것도 회사로 찾아오면 어쩌자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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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남자는 보지 못한 사이 수척하게 변해 있었다.

그늘이 좀 지긴 했지만 태어나길 귀한 집 외아들이라 그런지 곱상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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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호 씨, 내가 시간이 많지는 않은데 어디 가서 차 한잔해요.”

네- 남자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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