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평생 이렇게 (20/100)


20. 평생 이렇게
2022.08.08.


민아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일찌감치 독립을 했다.

그녀를 입양했지만 뒤늦게 자신들의 아이가 생긴 부모는 결국 작별 인사를 돈으로 했다.

작은 오피스텔 하나와 대학을 졸업할 만큼의 학비와 생활비. 소홀하게 대했던 양딸에게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였다.

그래도 키워준 정이 있어서인지 명절에는 불러 밥 한 끼라도 함께했다.

긍정적이고 밝은 민아는 그나마도 자신이 운이 되게 좋았던 거라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은조는 생각했다.

그렇게 좋다고 믿었던 운이 남자에게까지 이어졌다면 정말 좋았을 것을.

이규호.

나름 다정하고 자상한 이 남자는 민아를 끝까지 책임지기에는 너무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남자였다.

제 아이를 가진 민아를 필사적으로 반대하는 부모로부터 지킬 만한 그릇이 못 되었다.

은조는 배가 남산만 한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났던 가엾은 동생을 생각하며 마주 앉아 있는 인간에게 차가운 눈길을 보냈다.


“…….”

“……잘 지내셨어요?”

“내가 잘 지냈는지 궁금해서 온 건 아닐 테고 본론부터 말해요. 내가 시간이 많지 않아요. 아, 그리고 이렇게 회사로 찾아오지 말라고 부탁했잖아요.”

“민아가 전화를 절대 안 받아요. 문자도 씹고.”

“그런 것도 하지 말아야 되잖아요. 약속 잊었어요? 하…… 아무튼 집에 좀 바쁜 일이 있었어요.”

은조는 날카롭게 치솟는 감정 추스르며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모질게 대해서 무엇 하겠는가. 이 남자는 어쨌든 다온이 생부다.

지금이야 이래저래 만나지 못한다 해도 시간이 흐르고 아이가 자라면 당연히 만나게 될 사이다.


“바쁜 일 뭐요? 나쁜 일은 아니죠? 꿈자리가 뒤숭숭하고 미치게 불안했어요. 당연히 밥도 안 넘어가고.”

은조는 어이없다는 듯 힘없이 입술을 터뜨려 웃었다.

부모가 둘 다 공학박사인 남자가 꿈자리나 운운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런 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지 모르겠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은조는 먹먹해지는 가슴을 느끼며 카페 밖 먼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떻게 미련을 버릴까.

살아 숨 쉬는 소중하고 귀여운 자신의 아이에게서.

한때 죽도록, 어쩌면 지금도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어떻게 하면 쉽게 미련을 버릴 수 있겠는가.

사실은 은조도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

오히려 불안하고 아픈 남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쪽이 빠를 것이다.


“아이를 생각해서도 이러는 거 아니에요. 지금은 힘들어도…….”

목이 메었다.

왜 여기저기서 다 지나간 아픈 기억을 쑤셔대는 인간들만 나타나는 거지.


“규호 씨. 전에도 말했지만 인연을 완전히 끊을 수는 없을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다온이가 나중에라도 규호 씨를 만나겠다고 하면. 아니, 언젠가는 만나야죠, 아들인데. 그래도 가족으로 묶이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어요. 자꾸 이러는 거 규호 씨한테 안 좋아요.”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자꾸 생각나고…… 보고 싶고…… 마음이 아파요.”

“누가요? 민아? 아니면 다온이? 꿈도 꾸지 말아요. 술부터 끊고 그쪽 어머니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을 해요. 그게 우선이에요. 치료 끝나면…… 다시 얘기해요.”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고 있는 규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카페를 나와 택시를 잡으려던 은조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얼핏 한 번 스치며 눈인사만 나누었던 강 비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어떻게 여기 계세요?”

“대표님 댁으로 모셔다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오신 것 같아서 좀 기다렸고요. 타시죠.”

“…….”

그는 바로 자동차의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고 은조의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
.

약 40분 전.

은조와 규호가 회사 근처 카페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강 비서는 재하의 전화를 받았다.
 


[네.]


[도착했지. 혹시 조수석에 앉는다고 가당치 않은 소리해도 꼭 뒷자리에 앉혀.]


[왜요? 설마 저를 견제하십니까? 아니, 여태 어떻게 숨이 붙어 계신지 저는 도저히 알 길이 없습니다. 휴…….]


[시끄러워. 근데 너 왜 그러고 있어? 바로 퇴근한다고 아까 문자 받았는데.]


[아, 네.]


[아, 네? 뭐야, 당장 말해.]


[그게, 손님이.]


[손님이 남자네.]


[그걸 어떻게.]


[네가 다 말해주고 있잖아.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이야?]


[넵. 저야 당연히.]


[붙어 있다 잘 데려다 놔.]


[걱정 마십시오. 뒷자리에 모시고 댁까지 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강 비서는 룸미러를 통해 은조를 힐끗 쳐다보았다.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는 얼굴.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 퍽 짠하다.

쯔쯔쯔…… 얼굴이 백지장이네. 오죽 죽을 맛일까.


‘아이 아빠. 우리 다온이 아빠.’

은조가 어지러운 감정을 추스르며 마음속으로 되뇐 말은.

초저녁 어스름한 보랏빛 공기를 타고 권재하에게 가 닿은 것이 분명했다.


 

***



“이런, 씨. 대충 감이 오는군.”

더 이상 나타날 남자가 누가 있겠는가.

드디어 윤은조에게. 아이까지 낳게 만든 장본인을 만나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강한 예감에 휩싸였다.


[집에서 저녁 먹을 거야. 간단하게 아무거나.]

절대 문자로 전해질 리 없는 감정.

권재하는 격렬할 정도로 고양된 증오와 적의(敵意)에 사로잡혀 휴대폰 화면을 두드렸다.

***

띠리리.

현관문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에 은조의 얼굴이 굳었다.

데자뷔-deja vu.

물론 이건 최초의 경험은 아니다.

이미 오래전에 한 번 겪어봤던 일이니까.

하지만 이미 겪어 봤다고 하기에는 너무 떨리고 무서웠다.

또 같은 일을 겪게 될까 봐.

집안은 지난번 보았을 때와 다르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할 일이 없었다.

윤이 나는 바닥과 가구들의 표면에는 먼지 한 톨 없고 욕실 또한 당장 누워서 잠을 자도 될 정도로 깨끗했다.

아침에 누군가 치우고 정리했다고 믿어도 될 만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 없다.


“이래서야 어디 빚을 갚겠어.”

1층 복도 맨 끝 쪽, 손님방으로 보이는 방에 짐을 둔 은조는 세탁실을 찾아 2층으로 향했다.

빨래할 게 있으면 당연히 세탁기를 돌리면서 저녁 준비를 하면 되지.

직렬로 배치된 세탁기와 건조기 옆에는 색깔을 나눠 담을 수 있는 세탁 바구니가 있었다.

운동을 하면서 입었었을 티셔츠와 반바지 몇 장,

그리고…… 속옷.


“…….”

은조는 속옷과 섞어 빨아도 될 만한 것들을 세탁기에 함께 집어넣었다.

띠링- 띵링- 버튼을 누를 때마다 독일산 세탁기가 맑고 높은 소리를 냈다.
 


[이걸…… 아줌마 시킨다고?]

 
21살 은조가 재하의 속옷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누굴 시켜? 너도 손세탁하지 마. 내 거랑 네 거랑- 같이 빨게 아주머니에게 맡겨.]


[난 싫어!]


[뭐가 싫어.]

 
더한 짓도 하는데- 속옷을 같이 빤다니까 이상하게 또 기분이 묘하네-

사과처럼 발개진 은조의 뺨에 손바닥을 가져다 댄 재하가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변태! 뭐가 묘해! 그리고 난 싫다고! 겉옷도 아니고 속옷을. 너 정말 왕자라도 된 거야? 이건 네 속옷이잖아.]


[내 속옷 맞지만 내가 빨 필요는 없지. 아주머니 일을 빼앗으라고? 당사자도 싫어할걸. 아, 네가 정 그러면.]


[……응?]


[네 건 내가 빨아줄게.]


[뭐어?]


[어차피 손수건보다 작은걸, 뭐. 나한테 맡겨. 최선을 다해볼게. 언제나처럼…… 열과 성의를 다해서.]

 
어느새 더욱 짙어진 검은 눈동자가 야릇한 빛으로 은조를 더듬고 있었다.
 


[아아- 듣기 싫어! 대낮부터 또 이렇게, 좀 떨어져!]


[앙큼한 내숭쟁이. 밤에는 그냥…….]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은조는 재하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지만 힘으로 그를 제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옹다옹, 엎치락뒤치락 입씨름을 해봤자, 민망할 정도로 결론은 항상 같았다.

기, 승, 전, 키스.

기, 승, 전…….

그리고 며칠 뒤.

은조는 제 속옷을 빨면서 같이 빨았던 재하의 속옷을 접어서 서랍에 넣고 있었다.
 


[네가 빨았어?]


[응, 내 거 빠는 김에 같이.]


[아…….]


[괜찮아. 항상 이러겠다는 건 아니고…….]

 
내가 뭘 잘못했나. 싫은가.

얼굴은 물론 귀 끝까지 빨갛게 물들인 재하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은조는 큰 눈을 껌벅거렸다.
 


[왜…… 아주머니가 하는 건 상관없고 내가 하면, 엇!]

 
괜히 얼굴을 붉히고 서 있던 재하가 은조를 와락 끌어안았다.
 


[너 신통하고 기특하고 아주…… 나 기분 너무 이상하고 좋아…… 뭔지 잘 모르겠는데. 가슴이, 심장이 막…….]


[으응…… 근데 난 답답해. 숨 막혀!]


[아, 미안.]

 
바로 단단한 팔에서 힘이 빠졌지만 붉은 입술이 급하게 아래로 내려왔다.
 


[어어- 왜 이래…… 나 바빠. 과제…… 어제 밤에도 너 때문에…….]


[나 때문에 어땠어?]


[…….]


[말 안 해도 알지만, 가끔 그 입술로 소감이 어떤지 직접 듣고 싶기도 해.]


[그런 게 굳이 왜…… 어어-]

 
이상한 소감 따위를 듣고 싶다더니 다시 입술을 겹치려는지 커다란 손이 보드라운 뺨을 감쌌다.

웅웅- 오리같이 뾰족해진 입술을 한 은조가 재하의 가슴팍을 밀었다.
 


[미국식 인사야. 더 뭘 하겠다는 게 아니고, 귀한 손으로 하찮은 내 빨래를 해 준 거에 대한 고마움! 응?]


[지, 지금 말로 길게 다 했거든! 너의 미국식 인사에 이젠 안 속아! 거짓말쟁이 변태!]


[내가 변태면 너는? 우리 은조는 뭘까. 응?]


[저리 가! 제발 밤낮없이 질척거리지 좀 마.]

 
흥- 새침하게 눈을 흘기다 돌아서는 은조를 재하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앙탈을 부리며 바르작거리는 몸을 단단히 옭아맨 그가 하얗고 가는 목에 입술을 눌렀다.
 


[……너무 좋다.]


[……가, 간지러워.]


[윤은조, 우리 이렇게 살자. 평생 이렇게.]

 
우리 이렇게 살자. 평생 이렇게.


 
그게…… 첫 프러포즈였다.

지나가는 말처럼 아주 자연스럽고 담백했던 목소리.

영원히 함께하자는 가슴 설레던 말.

그 뒤로도 수차례 들었던 달콤한 속삭임들이 떠오를 것 같았다.

꾹 감았던 눈을 다시 크게 뜬 은조는 휘청거리는 몸을 세탁기에 기댔다.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던 왼손을 들어 손가락을 쭉 펴보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사이즈며 단순한 모양까지. 반지는 은조의 하얀 손에 딱 맞았었다.

그 반지.

널 찾아가는 길에 분명 여기, 내 약지에 있었어.

대체 어디서 답을 찾아야 하는 걸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