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타입 (21/100)


21. 타입
2022.08.11.


9살 은조가 처음으로 그를 만난 곳은 ‘해바라기 언덕’이었다.

마르타 수녀님이 원장님으로 계시는 그곳은 깨끗하고 따듯했지만 슬펐다.

그 이름처럼 키가 큰 해바라기가 한 여름의 태양만큼이나 노랗고 커다랗게 하늘을 가리고 있었지만.

부모에게 외면당한 아이들의 시간은 결코 눈부시지 않았다.

눈물이건 짓궂은 장난이건 혹은 어린애답지 않은 무심함이건, 아이의 천성이나 기질에 따라 보이는 반응은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혼의 밑바닥은 모두가 슬프고 아팠다.

은조도 엄마를 기다렸다. 정문이 보이는 창가에 매달려 하염없이 울었다.
 

1660317815034.jpg

[기다리지 마.]

 
며칠 동안 아무 말 없이 옆에 서있던 소년이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껌벅거리는 큰 눈망울에서 후두두 떨어지는 유리알 같은 눈물을 바라보더니, 호주머니에 찔러 두었던 손을 빼냈다.
 

1660317815034.jpg

[그럼 이거 줄게.]

 
수녀님이 주시던 사탕과 사뭇 다른, 탐스런 모양의 막대 사탕이었다. 알록달록 현란한 색들이 회오리 모양으로 가운데로 몰려 들어가고 있었다.

예쁘고 갖고 싶었다. 엄마를 잠시 잊을 만큼.

슥, 눈물을 훔친 은조는 작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소년은 제 손에 든 사탕을 다시 몸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1660317815034.jpg

[오빠라고 불러 봐.]

1660317815034.jpg

[왜?]

1660317815034.jpg

[왜가 어디 있어, 오빠니까 오빠라고 부르라는 거지.]

1660317815034.jpg

[……오빠?]

1660317815034.jpg

[잘했어, 자!]

1660317815034.jpg

[너 몇 살인데? 난 아홉 살이야.]

1660317815034.jpg

[너 아니고 오빠!]

1660317815034.jpg

[……오빠.]

1660317815034.jpg

[나는 열 살.]

1660317815034.jpg

[……이거 되게 예쁘다.]

1660317815034.jpg

[미국 친구가 준 거야. 넌 운이 좋다. 그게 마지막이었어.]

1660317815034.jpg

[그치만…….]

 
정문으로 눈길을 돌린 은조의 눈에 다시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막대사탕이 준 기쁨은 아주 짧았고 엄마에 비할 바가 못 됐다.

똑똑한 소년은 재빨리 소녀가 끌어안고 있는 인형의 귀를 잡아 당겼다.
 

1660317815034.jpg

[얜 뭐야? 토끼야?]

1660317815034.jpg

[브라우니는 강아진데. 토끼 같지?]

 
우는 줄도 모르는지 귀여운 소리를 지껄이는 계집애의 눈에서 또 도르르 물방울이 떨어졌다.

갈색 눈동자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투명한 게 신기했다.
 

1660317815034.jpg

[그걸 꼭 끌어안고 자더라. 아기처럼.]

1660317815034.jpg

[오빠는 친구 없어? 나쁜 꿈을 꾸지 않게 도와주는 친구 말이야.]

 
흥- 소년이 거만하게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웃었다.
 

1660317815034.jpg

[난 책을 읽어. 잠이 잘 온다고 숀이 알려줬어. 아, 숀 알렉시스가 누구냐면…….]

 
다시 창문 밖으로 눈길을 돌린 은조는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1660317815034.jpg

[수녀님이 허락해 주시면 잠들기 전까지 내가 책을 읽어줄 수도 있어.]

1660317815034.jpg

[……?]

1660317815034.jpg

[문제아 민수한테도 가끔 읽어주는데 아주 잘 자더라고.]

1660317815034.jpg

[문제아?]

1660317815034.jpg

[골칫덩어리라는 얘기야. 골칫덩이는 선택받지 못해. 울보도 그중에 하나고.]

1660317815034.jpg

[……!]

 
소년 못지않게 눈치가 빠르고 영민했던 은조는 바로 눈을 치켜뜨고 작은 주먹을 쳐들었다.
 

1660317815034.jpg

[울보 아냐!]

1660317815034.jpg

[계속 울면서 밥도 안 먹고 잠도 못자면서 울보가 아니라니. 그럼 바보구나.]

1660317815034.jpg

[으앙-]

 
은조는 브라우니를 무기삼아 소년을 때리기 시작했다.

오빠 권재하는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서있을 뿐이었다.
 

1660317815034.jpg

[매일 우니까 예쁜 눈이 개구리처럼 보인다는 말이야.]

1660317815034.jpg

[개구리 아냐!]

 
으앙-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소년은 빤히 바라보았다.

.
.


1660317815034.jpg

[은조야, 재하가 동화책을 읽어 준다는데 어때?]

1660317815034.jpg

[싫어요.]

1660317815034.jpg

[저도 싫어요, 수녀님! You'll regret it!]

1660317815034.jpg

[권재하, 너는 누구보다 어른스럽게 행동해야할 이유가 있다고 이 수녀님이 알려줬지.]

 
소년의 입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어졌다.

하지만 이틀 뒤 재하는 브라우니를 끌어안고 침대에 누워 있는 은조 곁에 있었다.

저도 어리면서 마치 보호자인 것처럼 침대 옆 의자에 의젓하게 앉아있었다.
 

1660317815034.jpg

[이 책의 제목은 ‘소공녀’야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세라 공주 이야기지.]

1660317815034.jpg

[공주?]

1660317815034.jpg

[응, 공주. 프린세스. 시작할까?]

 
침대에 폭 파묻혀 있던 은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1660317815034.jpg

[사랑받고 자란 세라는 상냥하고 착한 마음씨를 갖은 예쁜 소녀였어요. 덕분에 기숙학교 친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지요.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모든 걸 잃게 되면서…….]

 
아이답지 않게 또박또박 글을 읽어 내려가는 재하의 모습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은조의 눈은 어느새 반쯤 감겨 있었다.

힐끗 힐끗 은조를 살피면서도 소년은 차분하게 글을 읽어 내려갔다.

완전히 잠이 들어 쌔근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진득하게 자리를 지켰다.

16603178198987.jpg

하지만.

얼마 후 소공자가 되어 해바라기 언덕을 떠난 사람은 권재하였다.

자선 행사를 찾았던 숀 알렉시스(Sean Alexis) 주한미대사가 열 살짜리 꼬마에게 반한 이유는 누구도 정확히 모른다.

외국인 들이 보기에 동양인 아이의 얼굴이야 다 귀엽고 신기하겠지만.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확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소년에게 숀은 주저 없이 자신의 아버지 이름인 ‘카일(Kail)’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Alexis’라는 성까지 준 것이다.

파란 눈의 미국 사람을 사로잡은 영민한 아이는 그렇게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1660317815034.jpg

[그럼 오빠는 이제 오지 않아요? 오겠다고 했어요. 분명히 선물을 가지고 온다고 했어요. 그리고 전화도 할 거라고…….]

 
또다시 찾아온 상실감에 흐느끼던 은조를 끌어안은 마르타 수녀님이 제안했다.
 

1660317815034.jpg

[재하가 하던 일을 네가 하면 어떨까, 은조는 얼굴만큼 목소리도 예쁘잖아.]

 
이후, 거의 5년 넘게 은조는 해바라기 언덕에 온 어린이들을 위해 책을 읽어주었다.

개중에는 운이 좋아 새 부모를 만나 떠난 아이도 꽤 있었다.

그래도 운이 좋은 걸로 치면 권재하가 최고였지.

나이도 많았고 성질도 못됐었는데.

재하에 대한 은조의 기억은 그렇게 점점 희미해져갔다.

그냥 한때 곁을 스쳐 지나간 똑똑하고 얼굴이 하얀 소년 정도로 남았다.

18살이 되면 보호는 종료된다.

즉 해바라기 언덕을 떠나 자립의 길을 가야한다는 뜻이다.

18살,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학교 선생님이나 짝사랑해야 할 나이에 은조는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었다.

나라에서 지원해준 돈을 모아서 친구와 얻은 지하 월세 방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

그래도 주변에 따듯한 마음들이 있어, 밥은 굶지 않았고 학교생활도 열심히 했다.
 

1660317815034.jpg

[이렇게 힘든데 미술을? 그건 부잣집 애들이나 하는 거야.]

1660317815034.jpg

[넌 얼굴 예쁘니까, 고등학교나 졸업하고 양친 부모 있는 남자 골라서 결혼해. 너 같은 고아는 절대 안 된다.]

1660317815034.jpg

[일단 공부만 열심히 해. 그럼 다 좋아질 거야.]

 
맞는 말도, 흘려들어야 할 소리도, 완전히 틀린 말도 있었다.

남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참고 사항일 뿐이다.

모든 결정은 은조 스스로 내려야했고 당연히 책임도 온전히 그녀만의 몫이었다.

한마디로 보통의 여고생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달픈 삶이었다.

그렇다고 대학에 척 붙어서 나아졌을까.

이미 사라져버린, 삶에 대한 소소한 꿈과 희망이 마법처럼 다시 짠, 생겨날 리 없었다.

그저 다음 단계로 왔을 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좋아질 거라는,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기대와 희망을 되뇌며.

그렇게 그냥 살아지고 있었다.

20살 윤은조는.

그래서.

그래서 단번에 알아채지 못했다.

미국에서 왔다는, 교내에 명성이 자자한 경영학과 ‘카일 알렉시스’가 누구인지.

어디서 들어본 이름은 확실했지만 알려고 애써야 할 만큼 궁금하지도, 한가하지도 않았다.
 

1660317815034.jpg

[저기! 스포츠 카! 카일이다!]

 
그날, 멀찍이 차에서 내린 남자를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설마.
 

1660317815034.jpg

[미국인 아니었어? 혼혈이거나.]

1660317815034.jpg

[뭐래? 한국남자야! 한국 이름이 그, 뭐더라…… J! 재하! 권재하!]

 
은조는 들고 있던 생수병을 떨어뜨릴 뻔 했다.

권재하?

알렉시스? 아아- 숀 알렉시스!

자기도 모르게 휙 몸을 돌려 자리를 피한 은조는 이후 내내 카일을 피해 도망 다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숨어서 지켜본 게 전부였다.
 

1660317815034.jpg

[들었어? 글쎄- 카일 알렉시스는-]

 
카일 알렉시스가- 카일 알렉시스한테- 나의 카일이-

이제 왜 여학생들이 모두 그 길고 귀찮은 이름을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불러 댔는지 알 것 같았다.

권재하는 완벽하게 자라 있었다.

늘씬하다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로 탄탄하면서도 기름기 없는 몸매.

곱상한 듯 날카롭고 이지적인 얼굴.

그와 상반되는 퇴폐적이고 나른한 눈빛이라니.

못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젠 정말 못되게,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괴감이 들 정도로

아름다워져 있었다.
 

1660317815034.jpg

[조물주가 카일 알렉시스를 만들 때 숟가락을 잃어버렸었대. 그래서 전부 왕창 왕창 때려 넣은 거지. 오징어들한테는 한 스푼도 모자라 반 스푼 정도만 넣어주는 지능, 외모, 섹시함, 또 뭐가 있냐? 아- 생각이 안 나…….]

 
여기저기서 들리는 그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막았고, 문득 나타난 그의 모습에 등을 돌렸다.

아마. 대단하지도 않은 과거. 어쩌면 숨기고 싶은 과거와 대면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듣고 싶지 않아도 오나가나 그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났다.

대부분 말도 안 되는 추측과 억측이었는데, 언제나 결론은 그가 한국을 몹시 그리워했다는 아주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것이었다.

한눈에 봐도, 별로 뭘 그리워하게 생기거나 아쉬워할 타입은 분명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대단한 스포츠 카만 해도 미국에서 타던 것을 가져온 특수 케이스고 최소 6억이다, 아니다, 적어도…….

6억……?

퐁. 퐁. 퐁.

머리가 자꾸 소리를 만들어 낸다. 새카만 강물과 반지가 부딪치던 소리를.

16603178214625.jpg

“하…….”

진짜든 가짜든 반지를 던져버린 권재하는 왠지 후련해하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입을 다문 은조와 다르게 신이 난 아이처럼 말이 많았다.
 

16603178231482.jpg

[누가 알아, 사이좋게 지내다보면 나쁜 기억도 다 지워질지- 치유의 시간이랄까.]

16603178231482.jpg

[너도 알겠지만 나한테 그런 찝.찝.한. 배신감을 주고 여태 살아 있는 인간은 네가 최초이자 마지막이야.]

16603178231482.jpg

[네가 운이 좋으면 당장 다음 주라도 그만두게 될 수도 있어. 집안일을 끝내주게 잘하고 입이 무거우면서 요리도 좀 하는 사람을 구하게 되면 말이야.]

16603178231482.jpg

[주말은, 가끔 집에 다녀와도 돼.]

 
대단한 너그러움을 베푼다는 듯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은조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 얄미운 얼굴을 대놓고 쏘아보는 것뿐이었다.

1660317823150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