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되게 예쁜 거. 아주 예쁜 거. 몹시 예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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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되게 예쁜 거. 아주 예쁜 거. 몹시 예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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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되게 예쁜 거. 아주 예쁜 거. 몹시 예쁜 거.
2022.08.15.
한편.
은조를 재하의 집에 내려준 강 비서는 이태원으로 향했다. 연경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녀의 사무실과 가까운 장소이기도 했지만 목적은 다름 아닌 ‘햄버거’였다.
먹는 것, 입는 것, 뭐 그런 게 그 사람을 만들고 대표한다는, 그런 고상한 소리를 일삼는 권재하는 햄버거 같은 음식을 즐기지 않는다.
하지만 강 비서는 연경이 이태원의 ‘투가이즈’에서 보자고 했을 때 ‘사랑한다’고 말할 뻔 했다.
“입맛은 비슷하고 참 좋은데 말이야…….”
저녁 시간이라 주차할 곳을 찾아 약속 장소 근처를 두 바퀴째 돌고 있는 그가 은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서울로 간다고 재하가 선언했을 때 뛸 듯이 기뻤다. 물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척했지만.
연경이 있는 서울. 재하의 결정이 아니었다면 혼자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사실 잘 알고 있다.
지금 이렇게 닿을 듯 말 듯,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이 시간들이 어쩌면 진짜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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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경, 내가 카일 집에 누굴 데려다 줬게?”
“은조 씨?”
“뭐야, 너 어떻게 알았어?”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어, 안 했어! 어!”
“너도 카일 더러 오빠라고 해, 그럼!”
“오빠 같은 소리하네. 그게 얼마나 쏘 스윗한 건지 네가 알기나 해? 난 걔랑 그런 사이 아니잖아!”
“그럼 누나는? 나한테 그 소리 듣고 싶은 이유가 뭔데. 그것도 같은 정서냐?”
“몰라. 어서 먹기나 해.”
3일전 밤에 연경은 재하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 웬일이야. 또. 뭐가 필요해.]
인사를 생략하고 대뜸 본론부터 요구한 이연경은, 아이처럼 좀 흥분 한, 처음 들어보는 권재하의 음성을 들었다.
[2층에 빈방 있잖아, 내 방 맞은편.]
[응, 어떻게 만들어줘? 옷 방이 하나 더 필요해?]
[아니 내가 쓸 거 아냐. 좋은 것들로 좀 채워. 예쁘고 좋은 거로 최대한 빠르게.]
[좋은 건 당연하고, 예쁜 것? 오케이. 침대부터 시작할 건데 젤 뒤는 뭐로 끝낼까.]
[속옷 아니겠어. 네가 여자니까 알아서 해 봐.]
……헐.
[그래, 내가 여자지만 내가 들어가는 건 아니잖아. 싸이즈는? 아, 혹시 나탈리를 위한 건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고 걔는 다르잖아, 좀.]
걔? 다르긴 하지. 재하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작은 사이즈. 너보다도 좀 작아.]
[오케이, 좋아하는 색깔이나 독특한 취향 등등 참고사항은?]
[그냥 되게 예쁜 거. 아주 예쁜 거. 몹시 좋은 거. 됐냐.]
[미친. 아무튼 이틀 안에 끝낼 수 있어. 사다 채우면 그만이니까. 베이지색 커튼은 그냥 둬 바꿔?]
[바꿔. 되게, 몹시 예쁜 거로. 몇 번을 말해.]
[또 슬슬 역정 부리시네. 2일이면 될 거 4일 할까?]
[이틀 안에 끝내면 인센티브 나간다.]
[옙, 알아 모시지요. 최최고급, 더럽게 예쁜 것들로 이틀. 다른 하실 말씀은요, 미스터 알렉시스.]
[핑크나, 블랙.]
[뭐?]
[내 취향. 핑크나 블랙이라고.]
[어련하시겠습니까. 접수했습니다.]
역시 진짜가 나타난 것이다.
윤은조. 되게 예쁜, 아주 예쁜, 몹시 예쁜 것들이 어울리고 주고 싶은. 세상에 둘도 없는.
권재하의 단 하나뿐인 그녀.
16살, 막 성인 흉내를 내던 연경은 권재하에게 고백을 했었다.
[좋아하는 여자 있어.]
[누구?]
[말하면 알아? 너, 유일무이(唯一無二)라는 한국말 알아? 그거야.]
[…….]
유일무이- 그 뜻을 알고 있었던 연경은 등을 돌리기 전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재하에게 보여줬다. [FUCK U!]
하지만 하루 실컷 울고 털어 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딱 잘라 말해준 그가 고맙기까지 했다.
세상에는 사랑에 빠진 여자를 상대로 애매모호하게 구는 정신 나간 남자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고는 더욱.
무엇보다 시간이 흐르면서 권재하에 대한 감정이 어떤 건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거의 가족 같은 그런 거. 재하처럼 어린 나이에 입양이 된 연경에게 사실 그는 친오빠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오랫동안 그랬고 지금도 변함없다.
“핑크나 블랙? 어휴, 은조 씨 어떡하냐.”
“……응?”
아냐. 연경은 햄버거를 베어 물다 저를 바라보는 강 비서에게 어서 먹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권재하. 혼자 고고한 척, 중세 수도사처럼 살더니만.
이제 와서 누구를 잡으려고.
***
[간단하게가 아무거나-라고 하지 말고, 혹시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있어?]
[없어. 말 그대로야, 대충.]
차라리 메뉴를 콕 찍으면 더 편한데.
먹는 입장에서야 아무거나- 라고 하지만 만드는 입장에서는 또 그게 아니다.
“아무거나 만큼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
민아도, 아무거나- 그래놓고는 [아, 이건 어제 친구랑 먹은 메뉸데.] 그렇게 말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이렇게 재료가 많으면 더 곤란하잖아.
고급스러운 양문형의 대형 냉장고에는 냉동실 냉장실 할 것 없이 다양한 식재료가 가득했다.
마치 잔치라도 하라는 것 같네.
시간을 확인한 은조는 너무 쉬운데 너무 맛있는 것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제육볶음.
기름기가 적은 돼지 앞 다리 살을 이용해, 불향 가득한 고추기름을 입히면 민아와 다온이도 밥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해치우곤 했다.
……물론 재하가 좋아하는 메뉴이기도 하다.
정말 대충 만들었는데 너무 맛있다며 엄지를 치켜들고 눈을 접으며 웃던 재하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예쁜 기억도 있네.”
이제 요리라면 어느 정도 자신 있는 그녀가 싱싱한 대파를 큼직하게 썰었다.
매콤달콤한 제육볶음과 따듯한 밥이 금세 차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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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음식이 다 식을 때까지 그는 아무런 연락도, 돌아올 기미도 없었다.
허기를 느끼지 못한 은조는 가방을 넣어둔 끝 방으로 들어갔다.
할 만큼 했으니 좀 씻고 쉬고 싶었다.
아까 본 수척해진 이규호의 얼굴과 다온이의 귀여운 얼굴이 연달아 떠올랐다.
유약한 마음을 가진 그가 술에 빠져 아픔을 잊으려 했다는 사실도 너무나 안타까웠다.
어쨌든 아이의 생부인데 건강하고 행복해야 나중에 아이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을 텐데.
여러 가지로 꽤 피곤한 하루다.
은조는 서둘러 기름 냄새가 밴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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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나와 젖은 머리카락을 타월로 두드리던 그녀는 인기척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분명히 방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침대 위에 올려두었던 잠옷용 원피스를 재빨리 뒤집어쓰고 방문을 열었는데.
헉-.
“왜 그 방에서 나와.”
방문 앞에 서있던 재하와 딱 맞닥뜨렸다.
“아, 놀래라. 지금 들어온 거야?”
그는 퇴근이 아니라 출근하는 모양처럼 매무새가 단정하다.
은조의 시선은 날렵한 턱 선에 고정되어 있었다.
살짝 자란 수염 때문에 파르스름한 빛이 역력하다.
매일 아침, 샤워를 마친 재하는 턱에 쉐이빙 폼을 바르며 휘파람을 불곤 했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손가락으로 넘기고, 날씬한 허리에 타월만 두른 섹시한 모습으로 보란 듯이 마음껏 으스대곤 했다.
[숀에게서 배운 전통적인 방식이야. 귀찮지만 남자라면 뭐, 어쩔 수 없지.]
잠에서 덜 깬 은조는 칫솔을 입에 문채 그런 재하를 빤히 올려다보았었다.
열 살짜리 권재하가 자라서 면도를 하다니.
하긴…… 밤에는 상상도 못했던 짓들을 서슴없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리 와 봐- 뽀뽀 좀 하게.]
재하는 큰 눈을 껌벅거리다 얼굴을 붉히는 은조에게, 하얀 거품이 잔뜩 묻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계속 그렇게 쳐다보면 오늘도 지각이야, 너. 무슨 뜻인지 알지.]
갑작스러운 잦은 지각에 어디 아픈 게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던 은조는 한달음에 다른 욕실로 도망을 쳐버렸다.
하하하- 등 뒤에서 들리던 싱그럽던 그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
“정신 좀 차리고. 따라 와.”
“응? 어.”
저도 잠시 넋을 놓고 있었으면서. 괜히 은조에게 핀잔을 준 재하가 앞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부자연스럽게 어기적거리며 따라가니 2층 어느 방문 앞이었다.
“여기 써.”
그가 방문을 열자 은조의 눈앞에 별천지가 펼쳐졌다.
그 화려함에 눈이 부시다 못해 멀 지경이었다.
“누구 방인데?”
“비었잖아, 그냥 써.”
“빈, 방이야 이게?”
“그 거적때기 같은 옷도 좀 치우고. 옷장 안에 입을 만할 게 충분할 거야.”
뭐? 거적때기? 은조의 눈살이 와락 구겨졌다. 늘어난 제 거적때기의 넥 라인 주변에 찰싹 달라붙은 재하의 시선 때문이었다.
“나더러 남의 것을 입으라고? 나를 데리고 인형 놀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이거 혹시…… 네 약혼녀 거야? 싫어! 거적때기여도 나는 내 것을 입고 있을 거야!”
“유니폼이라고 생각해. 고용된 마당에 입으라고 하는 걸 입어야지, 뭐라는 거야.”
쯧- 혀를 찬 재하가 거칠게 재킷의 단추를 풀더니 넥타이의 매듭을 쭉 잡아당기고 셔츠의 단추를 연달아 푼다.
“…….”
“헛소리 작작하고. 나, 목말라. 냉장고에 오렌지 있을 거야. 착즙기도 그 근처 어디 있고. 오렌지 세 개 레몬 반 개.”
내 방으로 부탁해- 으르렁거리듯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저녁은? 제육볶음 만들어 놨는데…….”
막 돌아섰던 재하가 다시 은조를 향해 몸을 틀었다.
“아, 그래서 집 안에 기름 냄새가 가득했구나.”
“응. 냉장고에 고기가 있길래…….”
머쓱해 하는 은조를 바라보는 재하가 탐탁지 않다는 듯 진한 눈썹의 끝을 바짝 치켜세우고는 입매를 살짝 비틀었다.
“별로야. 생각 없어.”
침샘을 자극하는, 안 봐도 메뉴가 무엇인지 알 정도로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지만.
제 집으로 당장 와야 하는 윤은조를 낚아챈 어떤 새끼 때문에 있던 식욕도 사라지고 말았다.
애까지 낳았으니 애 아빠를 만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배알이 꼴리는 이유를 찾아 스스로에게 해명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너, 이제 매일 내 차 타고 출퇴근해. 아니, 기사를 따로 붙여야겠다.”
딴 데로 못 새게.
그냥 옴짝달싹 못하게 가드도 하나 붙일까.
은조는 이상한 빛을 내며 반짝이는 재하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상은 했지만.
괴롭히는 방법도 참 다양해.
출퇴근을 같이? 기사?
“……맙소사.”
더 이상한 소리를 듣기 전에 얼른 등을 돌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