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끈적하고 달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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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끈적하고 달큰한
2022.08.18.
[아래쪽으로 더…… 그래, 그렇지…… 좋아…….]
[으으-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좀…….]
[은조야, 제대로 해야지…… 살살 하자.]
참을 수 없다는 듯 반듯한 미간을 살짝 구긴 재하가 열심히 움직이는 은조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잘 하고 있는데, 뭘 더 어떻게…….]
[어어- 너무 세게 누르지 말고, 달래가면서.]
[적당히…… 좀, 해……!]
참다못한 은조는 결국 깊숙이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 재하를 쏘아봤다.
[뭐? 왜? 까스탈은 스웨덴에서 가장 숙련된 장인들이 만든 최고급 러그야. 넌 거기다 끈적한 액체를 쏟았고, 어허- 살살 하라고.]
재하는 반라의 모습으로 제 침대 위에 모로 누워 손으로 머리를 괴고 있었다.
찡그렸다가도 얼핏얼핏 웃기를 반복하며, 느물거리는 말본새가 분명 은조를 놀리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정교하게 짜여진 근육이 드러난 상체를 자랑하듯 내놓고.
야릇하게 갈라진 음성으로.
실없이 은조를 놀리는 짓에 심취해 있었다.
.
.
“하…….”
개수대 안에 한가득 널브러진.
끈적끈적하고 달큰한 오렌지 과즙이 잔뜩 묻은 키친 타월.
제 꼴과 비슷한 그것들을 한동안 바라보던 은조는 쓰레기 봉지를 찾아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초반 고문이 이 정도로 지능적이고 집요하다면 앞날이 정말이지 암담하다.
.
.
약 40분 전.
단정하게 차려진 식탁 위를 바라보던 은조는 식어버린 요리를 뚜껑이 있는 그릇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재하의 ‘부탁’대로 오렌지 세 개, 레몬 한 개를 꺼내 깨끗이 씻어 준비하고 착즙기도 찾아냈다.
신선한 주스를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것을 받아먹을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것이다.
쟁반 째 건넬걸.
아니면 어디 테이블 위에 올려두던가.
얌전하게 유리잔에 담아 들고 노크를 했더니, 들어와- 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막 씻고 나온 재하는 머리카락이 반쯤 젖어 있었고 파자마 바지만 입은 상태였다.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반나체.
그런데 은조의 시선을 사로잡은 부분은 훨씬 아래쪽이었다.
실크 파자마의 허벅지 부분이 아주…… 많이 타이트했다.
“…….”
여자직원들끼리 있을 때 들었는데…… 뭐더라- 아아- 말벅지? 꿀, 인가?
지나치지 않으면서도 돌덩이처럼 잘 발달된 허벅지 앞쪽, 강하고 큰 근육은 그가 조금만 움직여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완벽한 엉덩이와 허벅지를 소유한 섹시하고 못된 인간. -이라고, 저도 모르게 생각한 은조는 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다 안다는 듯 몹시 얄미운 표정이 그녀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촉촉한 머리카락 사이로 긴 손가락을 찔러 넣은 재하가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엔 수영보다 로잉머신에 재미를 붙였거든.]
[……그래?]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얼굴을 왜 붉혀. 귀엽게.]
[내가 언제? 자, 오렌지 세 개…… 레, 몬 반 개.]
상반신을 다 드러낸, 혈통이 우수한 종마 같은 그가,
여유작작한 미소를 흘리며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온다.
시원한 비누향이 은조의 코끝을 간질이더니 턱을 타고 가슴 아래로 흘러 배꼽까지 내려왔다.
꼴깍- 마른 침이 절로 넘어 갔다.
오래…… 그러니까, 오래 굶어서 뭐…… 당연한 반응이야.
권재하라서가 아니라!
그냥 잘빠진 남자라서 그런 거라고. 영화배우 누구더라…… 그 남자를 보고도.
[줘.]
[으응? 아, 여기……!]
퍽!
분명 유리잔을 건넸는데.
그의 손가락 끝이 뜨겁다는 것도 느꼈는데.
유리잔이 러그 위에 엎어져 있었다.
크림색 러그에 오렌지색이 예쁘게 번지는 모양을 은조는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설마- 아니지……? 커다래진 눈을 들어 재하를 올려다보았지만.
[뭐가? 설마 내가 일부러 잔을 미끄러뜨렸다고? 은조야, 정신 차리고 페이퍼 타월. 얼른.]
그렇게 그녀가 최고급 수제 러그에 스며든 주스를 ‘정성스레’ 걷어내는 모양을, 재하는 침대 위에서 느긋하게 구경했다.
반라의 모습으로, 야릇한 목소리로,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
.
이제 물에 적셔 꼭 짠 행주를 들고 들어온 은조를 바라보는 재하가 빙긋 웃는다.
“보기 좋다.”
“꼴좋다-로 들리는데. 아무튼, 난 괜찮아.”
일부러 잔을 놓쳤다는 생각에 부아가 끓었지만, 결코 남은 얼마의 에너지를 그와의 입씨름으로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대충하고 이제 책 좀 읽어 줘.”
“……뭐? 뭐라고?”
“자꾸 귀여운 짓 할래? 눈 동그랗게 뜨고 깜짝깜짝 놀라면서.”
감당도 못 할 거면서- 그가 언제 꺼내 두었는지 근처에 있던 책 한 권을 집어 침대 옆 의자 위로 툭 던졌다.
“…….”
못들은 척,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러그에 남아 있는 주스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는 게, 은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재하는 여전히 부지런히 움직이는 가녀린 몸뚱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 모든 건 전부 네 탓이야.
윤은조로 태어난 네 탓.
잡아다 옆에 놓은 것도 모자라서 멀쩡한 인간더러 꼭 이렇게 미친 짓을 하게 만들지.
그는 아까 맡았던 향기를 찾기 위해 코를 찡긋거렸다.
진한 오렌지 향기 안에 아직 남아 있을까-
막 씻고 나온 은조에게서 나던 그 향기.
아몬드 파우더에 진한 꿀을 한 스푼 떨어뜨린, 달콤한 향기가 섞인 네 살내음.
촉촉하게 젖어 있던 그녀를 품에 한 번 안아보고 싶었다.
낡고 늘어진 원피스의 네크라인 때문에 전부 드러난 쇄골 위를 입술로 짓누르고 싶었다.
이 미쳐 날뛰는 정신 상태를 어떻게 통제해야 할지 스스로도 알 길이 없다.
짙게 유혹하고…….
네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질릴 때까지 가지고 놀다가 버리겠다는 계획.
그래, 네가 아플수록 난 희열을 느낄게 분명해.
……틀림없어.
***
나한테 아침잠은 평생 기대하면 안 되는 건가 봐.
“…….”
집에서처럼 일찌감치 잠에서 깨어난 은조는 당연히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양상추와 로메인, 치커리에 라다치오까지.
물기를 쫙 뺀 채소들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볼에 담고 네 조각으로 자른 삶은 달걀도 올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큼 달달, 귀여운 방울토마토도 여러 개 얹었다.
올리브오일과 꿀, 땅콩버터에 발사믹 식초를 더한 드레싱은 집에서 만들어 먹던 그대로다.
잠자리가 바뀌고 맞은편 방에 위험한 인물이 있다고 생각돼서 잠이 안 올 줄 알았는데.
푹신한 침대와 포근한 침구 덕분인지 남의 방이라고 투덜댄 게 민망할 정도로 꿀잠을 잤다.
어디서 나는지 모를 은은한 라벤더 향기 때문에 정신까지 쉽게 이완되어버렸다.
커피 향기 좋다.
후- 한숨을 내쉬며 앞치마에 손을 문지르는 순간, 계단 위에 서 있는 재하가 눈에 들어왔다.
“……안, 녕.”
하세요, 주인님- 그거는, 아니-잖아. 그런데 저 표정은…… 또 뭐가 불만인데!
핀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밝은 회색 정장에 매치한 검은 넥타이가 역시나 패셔너블 그 자체다.
유행보다는 자기만의 감각을 충분히 살려 제대로 된 멋을 부릴 줄 아는 남자다.
……표정은 빼고.
“그냥 내가 마음대로 좀 차렸어. 생각 없으면 그만두고. 나는 간단하게 먹고 출근할 거야.”
“너, 아침 안 먹잖아.”
뚱하게 뱉은 그가 식탁으로 다가왔다.
커피와 샐러드, 구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통밀빵이 차려진 식탁 위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멀뚱하니 은조를 바라본다.
정확하게는 낡아빠진 앞치마를.
“아, 이 거적때기는 신경 쓰지 마. 버려도 될 만한 걸 가져온 건데. 더럽지는 않아.”
“…….”
그가 드디어! 처음으로!
아무런, 삐딱한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신.
빵이 구워지는 동안, 커피를 홀짝이는 동안, 노릇하게 구워진 빵 위에 무화과 잼을 바르는 동안.
“……왜? 뭐 더 필요해?”
포크로 툭툭 건드리던 작은 토마토를 입으로 가져가면서도,
“억지로 먹으라는 뜻은 전혀 없어. 이상하거나 싫은 거 있으면 알려 줘.”
사뭇 매서운 눈으로 은조를 쏘아보았을 뿐이다.
식탁의자 아래로 바짝 접어두었던 다리를 천천히 편 은조는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그때의…… 권재하는 밥을 먹으면서도 자꾸만 발끝으로 그녀의 다리를 건드리곤 했었다.
일부러 그러면서 미안한 척, 또 눈꼬리를 내려뜨리며 순진한 소년처럼 웃고.
틈만 나면, 핑계만 생기면.
아니, 눈만 마주쳐도 건드리지 못해 안달을 했었다…….
.
.
잠시 평화로웠던 시간은 그렇게 짧게 지나가 버렸다.
택시를 타고 가겠다는 은조의 말을 단칼에 거절한 재하는 기어코 그녀를 제 차 앞으로 끌고 갔다.
“그럼 회사 근처에서 내려 주…… 안 되겠어. 난 그냥 택시 탈게.”
“왜, 예전에도 너는 철저히 숨기려고만 했잖아. 기억나지.”
“넌 너무 대놓고 드러내려 했고.”
차갑게 받아친 은조의 얼굴이 바로 어두워졌다.
“오래전 일인데 아직도 후회하는 것처럼 들리네.”
“맞아, 아니라면 거짓말이지만 아직도 후회하는 건 아냐, 후회는 진작 끝났어, 그냥 다 지난 일이야. 얼마 전에 누가 그러던데, ‘낫띵’이라고. 사실 나도 그래.”
하- 막혀 있던 숨을 터트린 은조가 먼저 날카롭게 대치 중이던 눈길을 외면했다.
다행히 주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조용해서 더 불안했다.
회사보다 먼저 이 동네, 브리티시 헤리티지에 소문이 날 판이다.
“성인 남녀가 같이 살 수도 있지. 넌 좀 심하게 예민했어.”
“그때 우리는 어리고 학생이었어! 내가 남자랑 같이 산다는 게 알려져 봐. 사람들이 뭐라고 할 것 같아? 부모 없이 자라서…….”
“그건 그때도 지겹게 들은 소리고. 그럼 지금은.”
“……지금? 몰라서 물어? 넌 약혼자도 있는 사람이고, 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걸 역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 조용히 사는 게 내게는 최고고 최선이야.”
“연설 잘 들었어, 타. 데려다줄게. 내가 태워 줘? 시끄럽고 요란스럽게, 동네 떠나가게 할까.”
밥 잘 먹여 놨더니…… 왜 또 이러는데.
은조가 부탁하는 모양으로 눈썹 끝을 내려뜨렸다- 제발.
“나도 JS에 가는 길이야. 주인이 가끔 얼굴을 들이 밀어야 인간들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거든.”
자, 갈까.
은조를 조수석 문 쪽으로 바짝 밀어붙인 재하가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나머지는 차에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