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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차상윤 (24/100)


24. 차상윤
2022.08.22.



 


“아침을 그렇게 대단하게 차릴 필요 없어.”

정면을 응시하며 운전에만 집중하던 재하가 길고 어색한 침묵을 깨뜨렸다.


“……집에서도 늘 하던 거야. 오늘 만큼은 아니어도.”

“네가 꼭 먹을 게 아니면 잠이나 좀 더 자든가. 난 아침에는 가벼운 게 편해.”

많이는 아니어도 잘만 먹더니.

응. 은조는 감정이 실리지 않은 짧은 답을 톡 던지고 비스듬한 시선을 계속 차창 밖에 두고 있었다.

……성인 남자와 여자가 한집에 사는 이유.

그녀에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당연히 ‘결혼’이라는 단어부터가 연관 지어졌다.

21살의 윤은조도 결코 쉽게, 집에 들어오라는 재하의 말을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수차례 따져보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권재하는 어쨌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이지만 저를 보살펴주던 기억이 따듯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게다가 한집에 살고 얼마 안 되어서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길 잘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18살 이후 먹고사는 일이 큰 고민이었던 그녀 입장에서는 당연한 걸 수도 있었다.

따듯하고 안전한 곳에 몸을 누이고,

어떤 것을 먹을지 고민하며 냉장고를 들여다본 게 처음이었으니까.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긴장과 흥분이 심장을 콕, 찌르고 지나가는 순간이 있기는 했지만.

해바라기 언덕에서 말고는 이성과 한 지붕 아래서 지내본 적이 없어서일 거라고 그저 미루어 짐작했다.

짓궂게 놀리거나, 친오빠인 양 작은 일에 간섭하려 들거나.

그것도 아니면 쓸데없이 제 미모를 과시해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경우를 제외하면.

재하는 괜찮은 동거인이었다.

그래도 기생충처럼 그에게 빌붙어 산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강한 은조로서는 내심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던 찰나 웬 행운인지 담당 교수로부터 이전보다 나은 과외 자리를 소개받았다.
 


[차하윤, 여학생이고 디자인과 지망한대. 아버지가 꽤 알만한 정치인이셔. 차대성이라고 들어봤지? 아, 그리고 그 애 오빠가 우리 학교 법대 3학년인데 너 잠깐 보고 싶다네, 괜찮지?]


[네, 그럼요.]


[전화번호가- 여기 있다. 오늘이라도 연락 한번 해보고 편하게 만나 봐. 면접 같은 건 아니고, 그냥 부탁하더라고. 인사하고 싶은가 봐.]

 
야무진 척했지만 21살 어린 윤은조는 순진했다.

왜 저에게 그런 행운이 또 굴러들어왔는지 의심하지 않았다.

차상윤.

그 남자를 처음 만나게 된 계기였다.

그는 차가워 보이는 첫인상과 다르게 따듯하고 다정한 매너를 보여주었다.
 


[그냥 같이 차 한 잔 마시고 싶었어요. 우리 하윤이 가르칠 선생님이 어떤 분일지 궁금해서.]

 
은조는 간신히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의식적으로 일이랑 얽힌 관계에서는 선부터 그어 놓아야 나중에 탈이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마음껏 소리 내서 웃는 경우는 권재하가 실없는 농담이나 했을 때밖에 없었다.

괜히 어색해지는 순간도 있었지만 시간이 맞으면 같이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은조의 기분을 살피며 다 지난 옛날 얘기나 엉뚱한 소리를 해서 그녀를 기필코 웃게 만들었다.

한참을 웃다 고개를 들면 또 어찌나 이상한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는지.

그 속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떨 때는 진짜 친오빠 같다가도 또 어떨 땐 되게 낯선, 조금은 두렵기까지 한 이상한 울렁거림.

뭐라고 딱 잘라 정의할 수 없는 상반된 두 감정.
 


[…….]


[은조 씨? 다음 주부터 당장 시작할 수 있냐고 물었는데.]


[네? 아, 네.]


[우리 하윤이가 지금 급하거든요. 부모님하고 약속은 제가 잡아서 다시 연락할게요.]


[알겠습니다.]


[전화기 줘 봐요.]


[네?]


[내 번호 찍어주려고요.]


[번호요? 이미 있는데요.]


[그거 말고, 진짜 내 번호. 친한 사람들한테만 알려주는 번호.]


[……?]

 
머뭇거리며 건넨 전화기를 받아든 상윤이 힐끗 은조를 살피더니 물었다.
 


[남자친구 있어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은조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윤이는 내성적이지만 성실한 학생이었고 덕분에 이전 과외 못지않게 큰 수입이 생겼다.

은조는 당연히 재하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고백 편지야?]


[장난치지 마. 밥값. 아주 조금이야.]


[까분다.]


[너한테는 이게 까부는 걸로 보여?]


[그래서, 네 자존심이 얼만데?]

 
봉투를 낚아채 열어본 재하는 아무 표정 없이 그녀의 손에 다시 쥐여주었다.
 


[책 사봐. 전에 인터넷으로 보던 거 그거. 장바구니에 담아 뒀잖아.]


[어? 어떻게 알았어?]


[너 화장실 갔을 때 봤어.]


[뭐야? 권재하!]


[그깟 장바구니 들여다본 게 대수야? 그럼 다른 데 들여다보는 건 괜찮고?]


[또!]


[뭐가 또야, 알아듣게 말해.]

 
언제부터인가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공기가 수시로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찰랑찰랑 위태롭게 흔들리며.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를 넘으려 기회를 엿보는 것처럼, 그렇게.
 


[그거 계속할 거야?]


[응, 당연하지.]


[차라리 나를 가르쳐. 두 배 줄게, 아니 세배.]


[내가 너한테 뭘 가르쳐? 드로잉이나 디자인에 관심 있어?]


[아니, 너.]


[뭐?]


[너한테 관심 있다고. 너는 나한테 관심 있고. 아냐?]


[나, 나는 경영 쪽으로는…… 바보나 다름없어.]


[윤은조. 진짜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


[우리가 서로에게 가르칠 게 과연 그것밖에 없을까.]

 
은조는 자꾸 선을 넘으려는 재하가 점점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꾸 그 선을 넘으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는 자신은, 더더욱 부담스럽고 두려웠다.

***

31살, 차상윤.

4선 국회의원 차대성과 유명 피아니스트 이혜정의 장남이면서 외아들.

외모와 두뇌는 유전자 덕분인지 남들에게 밀리지 않았지만 기이한 성격이 문제였다.

철저한 이중성.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반듯하고 점잖은 ‘신사’ 그 자체다.

하지만 낳아준 부모는 그가 남몰래 위태로운 짓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특히 바닥으로 떨어지는 제 기분을 주체하지 못할 때면, 여자든 뭐든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온갖 것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뒤를 잇게 만들려는 이혜정의 심산으로 가까스로 변호사라는 직함을 달기는 했지만 법정에 서는 일은 많지 않았다.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그냥 꼬리를 감추듯 숨어버리는 게 그의 특기 겸 장기다.

특히 지금처럼 ‘파혼’을 당했다는 불명예를 부모에게 안겼을 경우에는 더욱.

이혜정이 칼을 입에 물고 자빠지네, 어쩌네 저를 상대로 공갈과 협박을 쉴 새 없이 해댈 때는 답이 없다.

어디든 안 보이는데 꽁꽁 숨어 술과 여자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도저히 이해할 방법이 없다.

부모는 마치 저를 윽박지르고 괴롭히려고 낳은 것 같다. 평생 기를 죽이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굴어댄다.


“누가 낳아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안 그러냐?”

“네에……?”

독한 술을 쉬지도 않고 마시더니. 여자는 흐리멍덩한 눈을 들어 상윤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초점이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여자를 내려다보는 상윤의 눈에는 나름의 진지함이 묻어 있다.


“네 부모는 뭐하는 인간들인데 널 이렇게 살게 하냐.”

“그러게요…… 뭐하더라…….”

흐느적거리는 몸을 뒤척이는 여자가 입술 옆으로 흐른 침을 손등으로 닦았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침대 옆 테이블 위, 술잔에 넣어버린 상윤은 그 옆에 있던 지갑을 들었다.


“이거로 샹로랑 백 사. 너 전에 너무 예쁘다고 난리 친 거 그거.”

“흐응…… 정말요……. 땡큐, 오빠.”

상윤이 바닥으로 던진 수표를 집을 힘도 없는 여자는 다시 혼몽한 잠으로 빠져든다.


“……크흐흐.”

허탈하게 웃으며 다시 지갑을 연 상윤이 수표 두어 장을 더 꺼내 던졌다.

호텔에서 다른 여자와 누워 있던 현장을 약혼녀가 덮쳤다.

내내 현모양처라도 되는 양 얌전이란 얌전을 죄다 떨던 약혼녀가 어찌나 빽빽, 호텔이 떠나가게 소리를 지르던지.

지금 시체처럼 늘어져 숨소리만 내는 눈앞의 여자가 예뻐 보이기까지 한다.


“남의 귀청을 찢어놓고는 주제에…….”

자존심은 대단해서 또 그 이후로는 고상하게 파혼을 전달해 왔을 뿐이다.

뒤를 이어 이혜정이 소리를 지르고 까무러치는 연기를 해대서 또 문제였지만.

드르르르르.

지갑 옆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 시간에 이 전화번호로 전화를 할 만한 인간이 없는데.

아, 있구나.

[왕나나.]

상윤의 약혼을 깨뜨린 여자.


“하…… 일찍부터 웬일이냐.”

[오빠는 일찍부터 전화를 잘 받네. 잠수 탈 줄은 알았지만 이 시간에 깨어 있었어?]

“누구 때문인데. 약 올려, 지금?”

[걔 촉이 좋은 게 내 탓은 아니잖아. 잘 됐다고 하더니?]

“왜 전화했어.”

[숨어 있느라 지루하지? 재미있는 얘기해 주려고.]

“안 지루한데.”

[오빠, 윤은조 보고 싶지 않아?]

“누구? 너 지금 윤은조라고 했냐?”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던 상윤의 목소리가 높게 갈라졌다.

반쯤 감겨 있던 눈은 번쩍 떠졌다.


[이렇게…… 쯔쯔, 좋아할 줄 알았어.]

전화기 너머 왕나나의 음성이 뱀의 그것처럼 간살스럽기 그지없다.

같은 시간.

JS pharm. 지하주차장.

구석에 주차되어있는 빨간색 수입차.

입으로는 사뭇 싹싹한 소리를 내는 왕나나의 눈빛에 살기가 어려 있었다.

전화기를 들지 않은 손은 하도 세게 핸들을 움켜쥐고 있어서 뼈마디가 하얗게 일었다.


[갑자기 윤은조는 왜? 어디서 봤냐?]

“응, 약 5분 전에 봤는데. 그리고 보기만 했을까.”

[너, 뭐야? 뭔데 또 이렇게 살살 간을 보면서 지X이냐고!]

술기운 때문인지 쉽게 흥분한 상윤이 빽 소리를 질렀지만 나나는 흥- 코웃음을 웃었을 뿐이다.

약 10분 전.

오늘은 정확한 정보를 얻었기 때문에 재하를 놓치지 않고 보란 듯이 함께 사무실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숍에 들러 최대한 자연스러운 메이크업까지 받고 왔는데.

이미 그의 옆에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

윤은조.

절망적인 장면 앞에서 왕나나는 이를 갈았다.

이러면…… 다시 그 칼을 꺼내 드는 수밖에.

그때도 기대보다 몇 배의 힘을 발휘했잖아.

두 사람을 아주 제대로 갈라놓았지.

이번에도…….

휴대폰을 잡은 왕나나가 찾은 이름이 바로 차상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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