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그들의 밤
(2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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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그들의 밤
2022.08.25.
뜬금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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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치마라니.”
권재하는 요리를 즐겨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렇게 한가하지도 않고.
만에 하나 요리 같은 걸 한다 쳐도 앞치마를 두를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엊그제 그 집에 모셔다준 손님의 얼굴이 떠오르긴 하지만. 굳이?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위에 서 있는 강 비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권재하의 일정 중 첫 번째는 미국 블랙스톤 파트너스 본사 경영진과의 영상 회의다.
당연히 제가 옆에서 챙겨야 마땅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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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넌 VL 백화점에 좀 다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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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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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회의는 내가 알아서 할게. 넌 에이프런 좀 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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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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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다들 두 번씩 되물어서 날 괴롭히지. 에. 이. 프. 런. 몰라?]
뭐? 뭐어? 무슨 말만 하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윤은조. 이제 강 비서까지! 재하는 과장되게 양손을 들어 올리며 정말 골치 아프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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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치. 마.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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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앞. 치.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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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걸 어디다 쓰시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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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걸 어디 쓸 데가 있어, 내가. 넌 알아서 어디다 쓰게.]
넵- 강 비서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뭐, 그보다 더한 것을 구해 오라고 해도 상관의 명령을 받드는 것이 본인의 임무임을 상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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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으로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다시 프로답게 바른 자세로 태블릿을 열어 메모를 할 준비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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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게, 아주, 몹시 예쁜 거.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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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 되게, 아주, 몹시 예쁜.]
그렇게 회의 참석보다 중요한 것이 분명한 ‘앞치마’를 구입하기 위해 강 비서는 백화점으로 달려왔다.
8층, 리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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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맞는데.”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눈에, 백화점 도착 직전 검색해 본 브랜드가 포착됐다.
유럽 감성을 담은 주방 편집숍 ‘엘린느 소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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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이.”
뭐든 최고급을 즐기는 권재하를 만족시켜줄 만한- 되게 아주 몹시 예쁜 앞치마가 있기를 기대하며 매장 입구로 들어섰다.
하지만 처음 접한, 그 예쁘장한 러플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물건에 당황한 에디 강.
스스로 도저히 결정을 내리지 못한 그는 결국 다른 모양의 에이프런 사진 세 장을 재하에게 전송했다.
원래 이 정도는 알아서 해야 하지만. 왠지 이번에는 꼭 물어봐야 할 것 같다는 직감에 사로잡혀서.
그리고 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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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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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날, 오후.
JS PHARM. 디자인팀 회의실.
은조 역시 회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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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도 경험한 적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저는 쓰레기통에서 우리 제품의 패키지를 발견했을 때. 그때 좀 허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니어 디자이너인 은조의 말에 다른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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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제품의 내용물을 필요로 해서 구입하는 거지만 우리는 정말 밤새워서 열심히 작업한 디자인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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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럴 땐 회의감이 드는 게 사실이지.”
장 팀장이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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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결국 내가 하는 일이란 게 쓰레기를 양산해 내는 것인가. 그래서, 에코 디자인 쪽으로 자료를 모아 봤습니다. 패키지 디자인 산업도 환경을 생각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으니 우리도 뒤처지면 안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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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생리대도 그런 쪽으로 미는데 생리통 약도 당연히 박자를 맞춰줘야 한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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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왠지 예쁜 컬러를 배제하면 여성들에게 좀 외면당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제가 좀 구태의연한가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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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료 좀 봐주세요.”
이 제품은 100% PCR 플라스틱과 친환경 잉크를 이용했어요, 색깔 예쁘죠?
은조는 각자의 앞에 놓인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는 팀원들을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책상 위, 무음으로 처리된 휴대폰의 화면이 연속적으로 반짝거리는 것은 당연히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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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전화를 많이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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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놀라지 말고 들어. 나 넘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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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쳤어?”
대체 얼마나 좋은 일이 생기려고- 이렇게 나쁜 일들이 자꾸 민아에게 일어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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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부러져서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은 피했어. 정말 별거 아냐. 다행이지?]
급하게 회사를 나와 택시를 잡아 탄 은조는 억지로 웃는 동생 때문에 마음이 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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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온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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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 오빠가 같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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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 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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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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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일단 알았어. 내가 뭐 꼭 가지고 가야 할 건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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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집에서 대충 챙겨왔어. 언니, 제발- 심각한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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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본인이 통증이 좀 심하겠지만 적절한 조치를 이미 취했어요. 아마, 지금도 좀 그런데, 곧 잠들 거예요.”
은조에게 생수병을 건넨 선우가 전문가답게 담담한 목소리로 상황을 전했다.
침대 옆 소파에는 다온이가 이미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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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그런데 어떻게 선우 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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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전화 안 받고 앞집 할머니도 멀리 계시다고 하고…… 내가 오빠한테 전화했지, 뭐.”
통증을 참는지 민아가 얼굴을 약간 찌푸리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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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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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을까 봐 서두르다가. 다온이 오늘 일찍 온다고 했는데 깜박 잊고 있었거든.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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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뭘 미안해. 선우 씨가 귀찮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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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전혀. 난 괜찮아요, 마침 별일 없었어요.”
그가 또 사람 좋은 함박웃음을 웃는다. 더 미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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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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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우리 강아지 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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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은조는 냉큼 달려온 다온이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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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쟁이!”
아이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그녀의 가슴에 비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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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근데 일하는 거라고 말했잖아. 우리 강아지 똑똑하게 다 알아듣더니 또 이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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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었어요. 썬샤인.”
애써 울음을 참는지 입술이며 동그란 뺨이 귀엽게 실룩거렸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자랐나 봐- 은조는 다시 아이를 품에 가두었다.
민아는 이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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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게 놀랐죠, 다온이랑 뭐 좀 먹고 와요. 여기는 내가 있을게요.”
그새 얼굴이 반쪽이 된 은조의 등을 선우가 떠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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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크림이 들어간 카스테라와 우유를 맛있게 먹는 다온이를 바라보던 은조는 결심한 듯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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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무래도 당분간 못 들어갈 것 같아. 집에 일이 좀 생겼어.]
한참 뒤에 답이 오거나- 당장 전화가 오거니- 꼴깍, 마른침을 한번 삼킨 순간 바로 답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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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야. 듣기 싫고, 지구가 두 쪽 나도 들어와.]
참, 빠르고 간결한 대답이었다.
그래, 정 그렇다면야- 은조는 다 비운 우유곽을 내려놓는 다온이의 입가를 손으로 닦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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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염둥이,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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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집에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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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집.”
아주아주 좋은 집- 엄마가 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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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되게 좋다!”
어려도 좋은 건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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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부터 씻자! 놀고 있으면 엄마가 먹을 거 만들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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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은조는 집에서 간단하게 챙겨온 다온이의 짐을 그녀의 방. 아니, 다른 누군가의 화려한 방에 두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먹일 저녁을 간단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기분도 상황도 대단하게 뭐를 볶고 지지고 할 마음이 들지 않아, 버섯을 넣은 달걀덮밥을 만들어 먹일 생각이었다.
집주인이 먹겠다고 할지도 모르니 양은 넉넉히 준비했다.
***
집으로 들어서던 재하는 저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짭조름하고 달콤한 냄새 때문에 입안에 침이 고인다.
이렇게 말을 잘 들으니 얼마나 좋아 서로에게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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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아아아앗! 어어? 누구세요?”
공처럼 데구루루- 어디선가 굴러온 작은 인간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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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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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시냐고요! 엄마아아!”
엄마?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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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어? 다온아,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아군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다온이의 목소리에 반기는 기색이 없다.
기계적으로 허리를 접어 배꼽 인사를 했을 뿐이다.
평소의 발랄함과 귀여움 가득했던 맑은 눈에는 경계와 의심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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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조, 너…….”
외계 생명체라도 보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을 한 재하를 은조가 쏘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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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일이 생겼다고 했잖아. 민아, 내 동생 이름은 기억하지? 민아의 허리가 두 쪽이 나게 생겼지만 이렇게 들어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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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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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워? 그럼 지금이라도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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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천하의 권재하가 시간을 달란다.
새침하게 눈을 내리깐 은조는 옆에 붙어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권재하, 덩치만 큰 어린애.
어르고 달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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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아직 전이면, 갈 때 가더라도 차려줄게. 대단한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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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물이나 한잔 줘.”
움직이는 은조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작은 인간에게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 녀석이 혀를 쭉 빼더니 메롱-을 날렸다.
허.
기가 찰 노릇이군- 넥타이 매듭을 손으로 잡아당긴 재하는 오랜만에 겪어보는 갈등에 난감했다.
퇴근 직전 밀크 티 프랜차이즈 ‘블랙차이’의 한국 사업부 지분을 인수하는 비용으로 360억 원을 쓰는데 10초의 망설임도 없었던 권재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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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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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크리스털 잔에 든 차가운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간신히 입술을 뗐다.
아버지 숀에게서 배운 대로 매너 있게, 정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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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다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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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좀 삐끗했어. 물어봐 줘서 고마워.”
다행이네- 빈 유리잔을 다시 은조에게 건넨 재하는 여전히 그녀 곁에 들러붙어 있는 작은 인간을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등을 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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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갈아입고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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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저 아저씨가 아빠는 아니지? 응? 나 저 아저씨 싫어!]
미니 인간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뒤통수에 와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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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재하는 다시 1층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은조와 그녀의 아이를 내보낼 마음도 없었고, 저녁을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아니, 그냥 아무 생각도 없다는 표현이 가장 맞을지도 모른다.
그저 이전처럼, 이 시간이면 늘 그렇듯.
다시 노트북을 열고 일을 시작했다.
시시각각 진화하는 금융시장의 흐름을 자세하고 빈틈없이 살핀다.
간단하게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진화하고 있는 투자 기법들을 경쟁자들보다 앞서 파악하려면 작은 숫자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된다.
독자적인 투자기법을 찾기 위해.
아니, 누구보다 빠르게 돈 냄새를 맡기 위해,
밤이고 낮이고 끈질기게 집중에 집중을 더한다.
절대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으려 노력하는 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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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과 몇 걸음 건너에 있는, 그들의 밤은 어떨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재하는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