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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키스해줄까, 키스해줄래 (26/100)


26. 키스해줄까, 키스해줄래
2022.08.29.



 
새벽 한 시가 다 된 시간.

넓고 넓은 집 안을 채운 공기마저 깊이 잠이든, 파란 밤의 한가운데.

재하는 은조와 아이가 잠든 방 문 앞에 서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한참이나 망설이며 뒷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내가 윤은조를 집에 들여놓고 찍고 싶은 드라마는.

그러니까- 굳이 장르를 나누자면 격정 멜로나, 치정에 얽힌 복수극에 가깝지.

결코 시트콤은 아니다.

그런데 저 미니미니한 인간이 갑자기 등장하는 바람에 심히 혼란스럽다.

열세 살 이후로 어린아이를 상대한 일이…….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

숀 알렉시스의 손을 잡고 들어섰던 뉴욕의 그 집, 문을 열자마자 와 닿았던 프리지아의 은은한 향기를 잊을 수 없다.

허드슨 강과 센트럴파크가 내려다보이는 맨해튼의 최고층 펜트하우스.

거기에는 나이 든 미스터 카일 알렉시스와 미세스 제니스 알렉시스, 그리고 개 네 마리가 있었다.

심지어, 개들마저 재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노부부, 특히 제니스는 영민함이 넘치는 재하를 매우 예뻐했지만, 동시에 알렉시스 가문의 사람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리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제니스는 본인과 부모의 나라인 영국식 영어와 문화, 문학을 가르치는데 열성적이었다.

외국어와 경제학을 기본으로 피아노, 바이올린, 테니스, 승마 등을 가르치는 선생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렇다고 재하가 그 부분에 딱히 반감을 가진 적도 없었다.

오히려 노부부가 감탄할 정도로 쉽고 빠르게 귀족의 태도를 갖추었다.
 


[신이 카일에게 태어날 장소와 부모를 잘못 정해주었어요. 이 아이는 원래 우리 집안에서 태어났어야 했다고요.]

 
제니스가 가끔 하는 소리였다.

숀이 결혼도 하지 않은 독신인데, 대체 무슨 소리인지.


‘하긴…… 이제 나는 진정 피 한 방울까지 ‘알렉시스’가 맞기는 해.’

어린 재하는 속으로 그런 어른 같은 생각을 했었다.

사실 그는 열 살에도 스스로를 어린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권재하는 태어난 지 며칠 안 돼 버려진 아기였다.

10년 동안 나라를 대신해 그를 거두었던 사람들, 따듯한 마음의 소유자들.

그들 중 대부분은 또래보다 총명하고 훨씬 어른스러운 재하를 단순히 어린이로 봐주지 않았다.

너무 머리가 좋은 불쌍한 아이.

혹은, 똑똑하니까 다른 아이들처럼 울거나 생떼를 쓰는 행동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 특별한 아이.

그곳에 있는 다른 아이들과 사실 다를 것 하나 없는 불쌍하고 가엾은 상처를.

그렇게 허울 좋은 말로 쉽게 덮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아이라는 존재는 그에게 어떤 개념조차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윤은조와 세트로 나타난 동그란 녀석 때문에,

아주 좋게 표현해도, 불편하고 부정적인 쪽으로 관념이 바뀌었다고 해야 하나.


“…….”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앞뒤 없는 생각들을 지워버리려는 듯 재하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미친 새끼. 개소리는.

그냥 안에서 자고 있는 둘의 모습이 궁금한 거면서.

인정하고 나니까 방문 손잡이를 잡는 게 꺼려지지 않았다.

.
.

커다랗고 색깔이 화려한, 회오리 모양의 사탕이 은조의 눈앞에 가득하다.

새콤하고 너무…… 달콤하다.


“은조야, 맛있어?”

“……응.”

여기가 어디지. 이 목소리는…….


“여러 가지 맛이 느껴지지 않아? 딸기, 복숭아, 바나나.”

권, 재하?

곱상하고 하얀 얼굴이 나를 향해 빙긋 웃고 있다.

어어- 여기는 해바라기 언덕인가……?

예쁜 사탕이 손에 쥐어져 있고…… 입술은 끈끈하다.

그리고 권재하는…… 어리잖아!

나…… 꿈꾸나 봐.


“맛있어, 은조야?”

“……응, 맛있어.”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달아?”

“응- 달아. 오빠도- 먹어볼래?”

“응, 먹고 싶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먹고 싶네.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고…… 이마 위로 흘러내린 잔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는 따듯한 손질이 느껴진다.

어…… 이게 뭐야…….

잠결에 손을 들어 올린 은조는 이마에서 뺨으로 내려와 있는 큰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따듯해…….

근데 왜 자꾸 웃지. 왜…….


“……!”

“쉿, 나야, 소리 지르지 마. 동그라미 깨겠다.”

너무 놀라 휘둥그레진 은조의 눈이 어두운 방 안에서 큰 별처럼 반짝거렸다.

거의 옆에 누운 것처럼 그가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뭐, 뭐해? 왜 여기 있어?”

옆에 잠들어 있는 다온이에게로 몸을 움직인 은조는 흘러내린 옷깃을 끌어올렸다.


“달콤한 꿈에서 깨워서 미안한데, 오빠가 잠이 안 와. 어쩌지?”

“……그래서?”

“내가 먼저 물었잖아. 어쩌냐고.”

하…….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을 지그시 바라보던 재하가 제멋대로 손을 뻗어온다.

하지만 재빠르게 몸을 튼 은조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작게 속삭였다.


“일단 나가자, 애 깨겠어.”

그럴까- 기다렸다는 듯 재하가 빠르게 그녀의 뒤를 따라 방을 나왔다.

침침한 어둠 속에서 보다 조금 더 여자의 흐트러진 모습이 선명해졌다.

숨죽이고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은 깊고 까맣게 가라앉는다.


“우유라도 한잔 데워 줄까?”

“그것도 좋지만 난 동그라미가 아냐.”

“쉿, 다온이는 잠귀가 밝아!”

“가자, 그럼.”

“……어딜?”

“어디긴. 내 방이지.”

순간 힘이 들어가 있던 은조의 어깨가 축 쳐졌다.


“…….”

“많이 피곤하지?”

“……응. 알면서 왜 이래.”

“그래도 어떡해. 내가 잠이 안 와서 미치겠는걸.”

“……우유가 싫으면 따뜻한 차를 한 잔 줄까?”

그런 거 말고- 따듯한 다른 거. 갑자기 바짝 다가온 재하가 그녀의 어깨를 잡더니 고개를 비스듬히 꺾는다.

피할 사이도 없이 귓가에 뜨거운 숨이 닿았다.


“……키스해줄까, 키스해줄래.”

“피곤해! 장난하지 마.”

발끈하며 밀어내려 했지만.

손목을 그러 잡힌 은조는 숨을 채 두 번도 내쉬기 전에 재하의 방 안에 있었다.


“책 읽어 줘.”

억지로 은조의 어깨를 눌러 침대 옆 의자에 앉게 만든 그가 두툼한 책을 내밀었다.


“진심이야? 꼭 이래야 해?”

“응. 꼭 이래야해. 빚 갚으려고 여기 있는 거 아니었어?”

다른 거 할 거 아니면 빨리 펴-

215페이지 중간부터. 역시 운이 좋아 윤은조- 번역본이야.

개인주의와 경제 질서(Individualism and economic order)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Friedrich Hayek)

개인주의와 경제 질서라니, 어쩜 책을 읽어도 딱 저 같은.

은조는 침대 위에 누운 재하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 책에 실린 논문들은 순수경제이론으로부터 경제정책, 국제 경제문제, 경제학의 문제로부터 정치사상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서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어. 하지만 일관된 주제는 하이에크가 일생동안 관심을 가졌던 개인적 자유야. 흥미롭지 않아?”

베개를 두드린 재하는 천장을 보고 반듯하게 눕더니 눈을 감았다.


“시작해.”

“하…… 진정한 개인주의의 기본 태도는…… 어떤 개인에 의해 설계되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사실상- 개인들의 심리보다도 훨씬 방대한 어떤 것을. 후…… 인, 간이 성취하는 과정에 대한 겸허한 태도이다. 이 순간의 중대한 문제는…….”

“음- 계속해.”

“중대한 문제는, 인간의 심리가 이런 과정의 한 부분으로…… 계속 성장하도록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이성이- 스스로 설계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속시킬 것인가이다…….”

개인주의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개인이 자유로운 경우에만…….

겨우 10분 정도, 4페이지나 읽었으려나.

툭-

재하는 앞으로 숙여지는 은조의 머리를 한 손으로 가볍게 받쳤다.

그리고 원래의 목적대로 그녀를 제 침대 위에 뉘었다.


 

***

깊은 잠에 빠진 은조를 곁에 둔 재하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새벽녘.

달칵, 방문이 열렸을 때 재하의 손은 부드러운 은조의 머리카락 속에 있었다.


“쉿!”

이상한 그림이 그려진 옷을 입은 동그라미가 울먹울먹, 입술을 삐죽거린다.

이리 와- 손가락을 까딱이자 작은 발이 주뼛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쉬- 엄마를 깨울 거야? 그러고 싶어?”

아니요- 다온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여전히 입술과 뺨을 실룩였다.


“좋아, 나도 바라는 바야. 그럼 조용히 다시, 저쪽 방으로 건너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헙-.

아주 순식간이었다. 다온이가 그에게 달려든 것은.

사라지라고 방향을 가리킨 재하의 검지를 왕- 정확하게 물어버린 것이다.


“엄마아!! 엄마아! 이 아저씨가 내 아빠야? 아니지? 흐아아앙…… 싫어!”

어느새 서럽게 우는 아이를 품에 안은 은조는 당장이라도 재하를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근데 애가 원래 이렇게 일찍 일어나나.”

이제껏 본 중에 가장 사나운 눈을 한 은조는 그대로 쌩하니 등을 돌려버렸다.

재하는 붉은 자국이 생겨버린 손가락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결국 시트콤이군.

.
.



“극대노 했을 때 하는, 1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행동이야.”

“…….”

“간만에 참교육 좀 받았다고 생각해.”

“…….”

다온이에게 아침을 먹이는 은조가 얄밉게 톡 쏘아붙였지만, 재하는 그저 멍하다.


“듣고 있어? 대체 무슨 생각으로…….”

“…….”

여전히 대답이 없던 재하가 들고 있던 커피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아까부터 어디를 쳐다보나 했더니.


“이거? 어제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떨어뜨렸잖아, 종이 가방. 기억 안 나? 거적때기 대신 쓰라고 산 거 맞지?”

“응, 그래. 맞아.”

알아, 기억나고말고. 그가 다시 내려 두었던 잔을 들어 올리며 시선을 내리깐다.


“되게 고급스럽고 예뻐. 이거 프랑스 자수야. 아무튼…… 잘 쓸게.”

“그래 뭐, 집에 어울리는 유니폼이면 좋은 거지.”

“엄마, 너무너무 예뻐.”

언제 그렇게 사나웠나 싶게 은조가 걸친 연분홍색 앞치마의 러플을 톡톡 건드리는 녀석이 해맑게 웃는다.

정말? 고마워- 아이의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손으로 털어주는 은조가 더 밝은 미소를 얼굴 가득 담았다.

커피잔을 쥔 재하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주 오래전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은조에게 했던 말.
 


[내 인생에 아이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냥 너 하나면 충분해.]

 
이렇게 보니 그 말은…… 어리석은 소리였다.

아주 많이.

그때 은조의 표정이 어땠었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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