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전부 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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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전부 내 스타일
2022.09.01.
그 밤.
재하는 제 팔을 베고 깊게 잠이 든 은조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귀엽게 오뚝 솟은 코끝을 톡톡 건드려도 보았다.
예전처럼, 아름답게 드러난 쇄골을 따라 검지로 부드러운 직선을 그어도 보았다.
“……은조야.”
원래 의지할 데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는 우리 은조.
가엽고 안타까운 네가,
이렇게 숨소리만으로도 나를, 제정신이 아닌 놈으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앞으로 더 힘들고 지치고,
반짝이는 눈물로 이 예쁜 뺨을 적시길 바라.
기댈 어깨도 안길 품도 오직 나, 권재하 하나뿐이기를 간절히 원해.
부드러운 손바닥 중앙에 입술을 누른 그는 가녀린 손가락 끝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었다.
어둠을 밀어내고 방안으로 스며드는 여명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같은 밤,
H호텔 2406호.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는 두 사람은 상윤과 나나였다.
산발을 하고 엎어져 있는 왕나나는 뜨거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역시 덜 진정된 숨을 몰아쉬는 상윤은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담뱃갑으로 손을 뻗었다.
침대 주변으로는 구겨진 맥주 캔이 여러 개 흩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쿨한 사이’라는 것이 바로 이 둘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미국에서 알게 된 두 사람은 쉽게 친해졌다.
서로에게 이성적인 마음이 없다보니 잘 보이려 애를 쓸 이유가 없는, 아주 편한 사이.
비즈니스보다 더 용무, 용건에 충실한, 간단명료한 사이.
마음이 동하는 시간과 장소에 각자가 불만이 없으면 그만이다.
감정적으로 누굴 만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몰래 하는 나쁜 짓이라서 그저 구미가 당기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억눌린 자아를 풀어내는 쓰레기통으로 서로를 이용한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연달아 담배를 피우던 상윤이 끙끙거리며 몸을 바로 누이는 나나에게 담뱃갑을 건넸다.
“요새도 하루에 한 갑 피우냐?”
“남이야 한 갑을 피우건 열 갑을 피우건 뭔 상관이야.”
별생각이 없는지 손등으로 상윤의 팔을 밀어버린 나나는 끙 소리를 내며 다시 돌아눕는다.
“남이니까 이런 것도 묻지. 남 아닌 애들은 죄다 비흡연자라서.”
싱거운 웃음을 흘린 상윤이 근처에 있던 맥주 캔을 흔들어 본다.
“제길- 목마른데. 넌? 맥주나 뭐 좀 가져오라고 할까?”
“마음대로 해.”
불퉁하게 내뱉은 나나는 푹신한 베개 위에 있던 머리를 괜히 쿵쿵 찧었다.
씨……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어.
그게 언제 적인데…… 어떻게 아직도 그럴 수 있냐고.
그 간절하고 절절한 눈빛. 더욱 지독해졌으면 지독해졌지 덜하지 않았다.
출근 시간, 회사의 지하 주차장이면 대놓고 뭔 짓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이제 와서. 아니, 아직까지도?
누구라도 있을까 봐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변을 둘러보느라 바쁜 윤은조.
그에 비해, 권재하의 시선은 오직 그 여자에게만 박혀서 움직일 줄 몰랐다.
멀리서도 느껴지던 재하의 열기 가득한 눈길을 떠올린 나나는 이를 악문 채 욕을 씹어뱉었다.
“찰거머리, 같은 X…….”
“적당히 좀 해라.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그냥.”
“시끄러워! 뭘 안다고 훈수 질이야!”
막 컨시어지와 통화를 마친 상윤에게 나나가 베개를 냅다 집어 던졌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담뱃갑을 내놓으라는 듯 손을 흔들어댔다.
“빠른 시일 내에 만나. 알아들었어?”
“내가 얻는 건 뭔데?”
“몰라서 물어? 오빠 그X 좋아라 했잖아. 아주 얼빠진 바보같이.”
픗- 인정이라도 하는 양 상윤이 싱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잘 좀 해보라고! 그리고, 하나 더. 난 오빠가 누구랑 뭘 하든 평생 오빠랑 할 건데, 이제까지처럼.”
“글쎄- 누구 맘대로? 그리고 네 말을 세상에 누가 곧이곧대로 믿냐.”
“이제까지 우리가 한 짓을 보면 그냥 믿어야지, 아냐?”
“대체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지만 너, 나 엿 먹이는 거면.”
“차상윤!! 여태 어디로 들었어! 난 그게 JS에 있는 꼴 못 본다고!”
“두고두고 봐도- 넌 우리 엄마 뺨친다.”
“뭐?? 할 거야, 말 거야? 그것만 말해!”
“생각 좀 해볼게. 골치 아픈 일이 아직 전부 해결된 게 아니라 복잡하다, 여기가.”
상윤이 제 가슴을 쿵쿵 때렸다.
***
동그랗고 같잖은 녀석의 극대노를 경험하고 참교육을 받은 아침.
식탁에서 일어선 재하는 은조에게 같이 내려가자고 말했다.
“……밖에까지 배웅해야 해?”
“그거 아냐, 병원 간다며. 일단 따라 나와.”
그럼 그렇지- 분명 은조에게 나오라는 말이었지만 미니 인간이 당연하다는 듯 달라붙는다.
살짝 욱신거리는 검지를 느낀 재하는 모르는 척 앞장서서 현관을 나섰다.
.
.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마준희라고 합니다.”
처음 보는 흰색 외제 차량에서 내린 여성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목소리에서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네? 아, 예. 안녕하세요.”
얼떨떨한 은조가 큰 눈을 껌벅거리며 재하를 올려다보자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내리며 속삭였다.
마치 사랑의 밀어라도 나누는 것처럼.
“네가 언제 어디로 튈 줄 모르잖아. 너 먹튀 전문이니까.”
으응? 갑자기 눈을 빛내며 고개를 위로 쳐드는 다온이를 은조가 재빨리 끌어당겼다.
재하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말려 올라간다.
“마 실장님, 오늘 이 사람이 병원 갈 일이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잘 부탁드립니다.”
“네, 걱정 마십시오.”
170㎝가 훌쩍 넘을 것 같은 큰 키에 커트머리와 흰색 블라우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그녀가 다시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무래도, 태도며 말투가 군인 같다.
그럼 전 이만- 거만한 목소리를 낸 재하가 몸을 막 튼 순간.
“안녕히 다녀오세요.”
다온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배꼽인사를 올린다.
어라- 재하가 한쪽 눈썹 끝을 바짝 치켜세웠다.
사람을 아주 들었다 놨다- 딱 내 스타일인데.
어색하게 웃고 있는 은조의 얼굴은 발그스름하다.
-이런 젠장, 전부 내 스타일이군.
“그래, 동그라미- 엄마 말씀 잘 듣고.”
두 여자에게 차례대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재하는 이내 근처에 있던 제 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세단 앞에 서 있던 박 실장이 은조를 향해 묵례를 했다. 그의 얼굴에 번지는 잔잔한 미소가 보였다.
“아드님 얘기는 제가 못 들었습니다.”
귀엽네요- 그녀, 마준희가 은조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다온이를 내려다보며 처음으로 얼굴에 엷은 미소를 담았다.
아…… 이게. 제가 좀 당황스러워서요.”
“혹시, 제가 사모님께 서프라이즈입니까?”
도리어 그녀가 되묻는다.
40대 초반 정도 되었을까. 아니, 30대 중후반?
앳된 얼굴이면서도 운동선수처럼 다부진 몸매를 가진 여자의 나이를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
“서프라이즈, 요?”
“네. 저는 공인 경호업체 [퍼스트] 소속입니다. 오늘부터 사모님의 수행비서 겸 경호업무를 맡았습니다.”
수, 행비서? 경호?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우와! 그거 되게 멋있는 건데! 아줌마 경찰이에요?”
당황한 은조를 대신해 다온이가 대뜸 반색을 하며 끼어들었다.
“음, 경찰은 아니지만 비슷한 일을 해. 다른 사람의 신변의 안전을 돌보는 일을 임무로 하는 사람이야. 즉, 보디가드 혹은 경호원, 수행원이라고도 해.”
아줌마 아니고- 그녀가 미소 끝에 덧붙였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실장님요?”
“똑똑하구나. 아빠를 똑 닮았네.”
“아빠요? 누가-.”
다온아- 은조가 아이의 손을 잡아당기며 작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차단했다.
“얼른 준비하고 나올게요. 겉옷만 걸치면 되요.”
“걱정 마시고 천천히 하십시오.”
.
.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모자(母子)는 가죽 냄새가 근사한 고급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마준희 실장의 운전 솜씨가 좋은 건지 차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양쪽 다인지.
은조는 잔잔한 파도를 타고 떠내려가는 기분에 휩싸였다.
편안한 것 같으면서도 언제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이유 없는 두려움이 가슴속에 공존했다.
“엄마……?”
“응?”
옆에 앉아 있는 아이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상체를 그녀 쪽으로 바짝 기댔다.
“아저씨가 엄마한테 돈 빌려줬어?”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은조도 다온이만큼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었다.
“엄마더러 먹튀라고 했잖아.”
“어? 우리 강아지가 그걸…… 어떻게 알까?”
“채린이도 가끔 먹튀하거든. 못됐어.”
“채, 린이가?”
“응. 내꺼 훔쳐 먹고 도망가는 거. 그거.”
“아, 하하- 그렇구나…… 채린이가 장난친 거겠지. 이따가 이모한테 물어보자.”
쉿- 은조가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려 보이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 앞에서 그냥…….
“근데 얼마야?”
“어? 어- 뭐가?”
“돈, 얼마 빌렸는데-.”
“응? 마, 만 원.”
“아아…….”
쉬이- 은조는 어쩔 수 없이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모시는 분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인데. 제가 아이가 셋입니다. 아들 둘, 딸 하나요.”
“그러세요? 다복하시네요. 집 안에 활기가 넘치겠어요.”
“활기도 넘치고 빨래도 넘칩니다.”
소탈한 웃음소리를 내는 마준희는 이제야 그냥 보통의 여자, 엄마처럼 보였다.
보통의 여자, 행복한 엄마- 쉬운 것 같지만 참 어려운건데.
옅은 미소를 지은 은조는 다온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그런데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게 좀, 불편해서요.”
“그럼 어떻게……?”
“그냥 다온이 엄마요. 그게 제일 좋아요, 저는.”
***
한편,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한동안 태블릿만 들여다보던 재하가 갑자기 못 참겠다는 듯 소리를 내서 웃었다.
“기분이 몹시 좋아 보이십니다.”
“네. 너무 티가 났습니까.”
“소리까지 내서 웃으시니 보기 좋습니다.”
“그러게요. 오랜만인 것 같네요.”
큽- 재하는 말아 쥔 주먹을 입술 위에 올리며 다시 짧게 웃었다.
내가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지.
여자 경호원이라니- 이렇게 상쾌하게 딱 맞아떨어지는 걸 두고 전전긍긍 얼뜨기같이 군 꼴이라니.
이런 경우를 두고 ‘안성맞춤’이라고 하지, 아마.
아무리 전직 형사고 공인 사설탐정이면, 뭐.
어차피 시커먼 사내놈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는 것을.
전에 고용했던 남자 사설탐정 대신 마준희 실장을 찾아낸 자신이 몹시 자랑스러웠다.
윤은조를 더욱.
옴짝달싹 못하게, 철저하게 가둘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