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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처음, 그날 (28/100)


28. 처음, 그날
2022.09.05.


인천공항.


“오빠!”

하윤은 공항으로 저를 마중 나온 상윤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동생을 본 상윤이 환하게 웃었다.


“차하윤!”

“와, 정말 우리 오빠 맞아?”

부모님의 수행비서를 대신해 나온다더니. 정말로 나타난 친오빠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녀의 손에서 캐리어의 손잡이를 빼앗아 간다.


“아니면 뭐 같아 보이는데?”

“오빠가 웬일인가 해서 그러지. 놀랍고 반가워서.”

“동생이 완전히 귀국했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아무튼 고마워. 오빠, 그런데 전보다 얼굴 좋아 보인다. 뭐, 맞았어?”

“뭐어?”

도둑이 제 발 저린 다고 상윤이 괜히 눈부터 부릅뜨고 본다.

높아진 목소리에 지나가던 사람 서넛이 힐끗거리자 하윤이 얼른 제 오빠의 소매를 붙들었다.


“아니! 피부가 좋아졌다는 말이야. 안색이 좋다고.”

“…….”

“솔직히 파혼 얘기 듣고 나 엄청 걱정 많이 했거든.”

어떻게 보면 누나 같은 하윤이 상윤의 비위를 맞추려 애교 섞인 웃음을 흘리며 팔짱을 끼었다.


“어차피 엄마가 원한 집안, 난 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도 않았어. 저 혼자 잘나서 그냥 어디 살가운 맛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있어야 말이지. 잘 됐어, 하늘이 날 도운 거지.”

머쓱해서 하는 소리인가. 하윤이 제 오빠를 대신해 낯을 붉혔다.

추저분하게 다른 여자와 호텔에 있다가 현장을 잡혔다고 들었다.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는 이혜정이 국제전화로 한참이나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하윤의 인생은 항상 이런 식으로 흘렀다.

아빠는 밖으로만 돌며 무슨 짓을 해도 그만인 대단한 사람.

그걸 매번. 아니, 평생 눈감아주는 엄마는 아들에게 목숨 건 집착을 한다.

딸인 하윤은 어떻게 보면 자유롭게, 또 어떻게 보면 소외돼서 살았다.

형제나 자매가 하나만 더 있었어도 좋았을걸.

하긴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부모님을 보면 남매가 있는 게 신기할 정도긴 하지만.


“오빠, 뭐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어?”

“그냥 한 이주일 빡세게 운동 좀 하고 노폐물 쫙 뺐더니 가뿐하고 기분이 좋아서 그런다. 됐냐?”

“멋지다 우리 오빠. 너무 좋아 보여. 원래도 잘생겼지만 오늘따라 훤하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 것을 알면서도 상윤은 제 누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듣기 좋은 소리라도 진심으로 해주는 게 동생 하윤이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그 여자 윤은조도 그랬었다.

아주 작은 칭찬이나 듣기 좋은 소리라도 진심이 아니면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던 여자.

시작은 조금 불손했지만 끝은 매우 안타까웠던 인연.

만일 다시 윤은조 앞에 서게 될 거라면 최소한 X같이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며칠 독하게 맑은 정신을 유지하며 운동도 하고 사무실에도 정시에 나가 밀린 일도 처리했다.

상윤은 이렇게 생각만으로도 저를 정화시켜주는 여자가 있다는 게 새삼 놀라울 따름이었다.


“너 윤은조 기억하지?”

운전대를 잡은 상윤이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가볍게 물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하윤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다시 정면을 바라본다.


“은조 쌤? 기억하지. 오빠가 짝사랑했던 것도 아는데!”

“…….”

“뭐야? 오빠 갑자기 은조 쌤 이름은 왜 들먹이는데? 어디서 만나기라고 했어? 설마 일부러 알아보고 그런 건 아니지?”

“알아보려면야 진작 알아봤겠지.”

“오빠!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오빠가 또 뭐 나쁜 짓이라도 할까 봐?”

실없이 킥킥거리며 웃어대는 상윤을 하윤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빠, 쌤은 정말 괜찮은 여자야. 아니 최고지. 하지만 오빠 짝으로 엄마가 허락이나 하겠어? 허락은커녕. 쌤은…… 알잖아, 천애 고아야……. 엄마가 알면 바로 응급실행이라고. 예전에도 오빠랑 어떤 이상한 눈치 없냐고 얼마나 자주 나한테 캐물었는데. 다 알면서 뒤늦게 왜 또 이래?”

상윤의 미간이 바짝 우그러졌다.

이혜정의 반응을 미리 맛보기한 것 같기도 하고, 전혀 틀리지 않은 하윤의 말에 왠지 반감이 확 생긴다.

더럽게 불쾌하다.

이제라도 엄마랑 인연을 확 끊어버려?

왕나나와 만난 다음 날 그 성화에 못 이기는 척, 상윤은 JS에 갔었다.

6년이나 지났고 어쩌다 우연히 마주친대도, 그 시절처럼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가 아직까지 남아 있을까 생각했는데.

멀찌감치 서 있는 그녀를 본 순간.

이상하게 슬펐다.

인생을 허투루 살아온 것 같고. 잘못하다가는 앞으로도 병신같이 이렇게 살다가 그냥 죽는 건 아닌가 하는 서글픈 생각이 가슴에 꽉 들어찼다.

그 시절,

겉보기에는 너무 다른 은조와 상윤은 사실 속으로 꽤 비슷했다.

나이답지 않게 삶에 지치고 상처 입은 영혼이었다.

부모가 있든 없든 외롭고 쓸쓸했던 두 사람.

언젠가 상윤은 은조에게 지나가는 말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녀가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기대대로 은조는 날 선 경계심을 풀고 가끔은 그에게 먼저 미소를 보여주기도 했다.

매우 조심스러운, 보일 듯 말 듯 엷디엷은 미소.

하지만 그때의 상윤은 어미 이혜정을 거스를 마음은 없었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이야기.

아버지를 따라 결국 정치를 해야 하고 반드시 그에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집안의 여자를 며느리로 맞아야 된다는.

네 아내라는 호칭이 사용된 적은 없었다.

오직 내 며느리. 내 며느리.

맞서봤자 어차피 지는 싸움.

매번 지는 싸움.

그 크기만 다른, 그 지겨운 걸 또 해보았자 얻을 게 없었다.

***


 
며칠을 꾸물꾸물 흐리더니.


“잘 되었습니다. 대표님 처음부터 별로 내켜 하시지 않으셨던 약속이니까요.”

결국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집무실의 넓은 통창을 회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태블릿을 들고 서 있는 강 비서의 손이 비워진 스케줄을 새롭게 조정하느라 바쁘다.

멍하니 흐린 창문 너머 무겁게 가라앉은 도시를 내려다보던 재하가 고개를 돌렸다.


“나,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다 압니다.”

말하지 않았는데 다 안다고?


“어떻게?”

“느낌이요.”

“단순히 네 느낌으로 내 속마음을 판단했다는 거네.”

빙글빙글 의자를 이리저리 돌리는 재하가 꼬고 있던 다리를 바꾼다.

몸을 뒤로 깊숙이 묻으며 느긋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역시 탐탁지 않다는 신호다.

느낌으로, 아니, 경험으로 충분히 아는 강 비서다.


“단순한 건 아니죠. 몸의 감각이나 마음으로 느끼는 기운, 혹은 감정을 뜻하는 것이니까, 대표님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시각적인, 청각적인, 기타 등등. 아무튼, 전 다 압니다.”

“잘났으니까, 나가 봐.”

“약 두 시간 가량이 비는데, 아무래도 지난번에 말씀하신 한성 김 상무님을…….”

“아니. 혼자 있고 싶어.”

넵. 강 비서는 두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재하는 눈을 감았다.

거세진 빗발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내 인생에 아이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냥 너 하나면 충분해.]

그때 그 말은 들은 은조의 표정이 어땠었는지-

기억이 났다.

아주 선명하게.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결국에는 슬펐다.

그리고…….

미국으로 함께 가자는 제안에 대한 침묵.

거절이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거절이라고 느꼈다.

그녀의 입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권재하의 느낌은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남자로서 처음 한 고백, 평생을 같이하자는 진심에 대해,

여자는 망설였다.

긴 침묵을 깨려 예쁜 입술이 달싹거리려던 찰나,

거절을 감당할- 아니, 용납할 수 없었던 남자는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었다.


“…….”

그 손을 놓기 전까지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결코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그날은.

지금처럼 비가 내렸었다.

그 애가 얼마나 미치게 예뻤는지…….

그만두라고 아무리 말려도 은조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지 않았다.

얼마나 조심스럽게 구는지 같이 사는 게 거의 첩보영화 수준이라고 재하는 자주 투덜댔다.

차로 같이 등하교를 하기는커녕, 동시에 집을 나서고 들어오는 일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우산도 없이 집을 나간 새끼 고양이가 안 들어오면.


[시X, 망할 알바!]

어디 열 배를 준대도 나간다고 하나 두고 보자.

그 집에 가려면 어떤 자식이 꼭 태워가는 것을 알고 있던 재하는 이를 갈며 거실을 서성거렸다.


[차상윤! 개새X. 잡놈!]

잘 알지도 못하는 수컷에게 악의 찬 욕을 퍼부으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래서 그 애가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들었다.

반은 미쳐 있어서.


[뭐라고? 지금…… 누구?]

[윤은조! 너, 다 젖었잖아!]

[괜찮아.]

[뭐가 괜찮아!]

이것 봐! 뺨이 얼음장이잖아- 저도 모르게 양손을 뻗어 창백해진 두 뺨을 감싼 것뿐이었는데.

비에 젖은 긴 속눈썹이 갑자기 파르르 떨리고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이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재하는 은조에게 바짝 다가갔다.

더 참을 이유가 없었다.

더는 부정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허락은 더더욱 필요 없었다.


[키스, 할 거야.]

비에 젖어 촉촉한 입술 위에서 닿을 듯 말 듯 뜨거운 숨결이 먼저 겹쳐진 순간,

귀신에 홀린 것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의 입술이 거칠게 맞물렸다.

긴 경계와 망설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왜 그토록 알 수 없는 긴장과 흥분이 위험하게 두 사람 주위를 맴돌며 언제라도 넘쳐흐를 것처럼 찰랑거렸는지.

그래서 더욱 망설이지 않았다.

부드럽게 시작한 입맞춤은 점점 뜨거워졌고 은조를 품에 가둔 재하도 젖어갔다.


[하…….]

간신히 떨어진 입술에서 한참이나 참았던 숨이 터졌다.


[……은조야, 내가 너무 늦게 왔어. 미안해.]

아니, 아냐- 넓은 어깨에 기대어 있는 은조가 작게 고개를 흔들렸다.


[이제 나한테 기대. 제발 힘든 거 하지 마.]

놀란 고양이가 복숭아처럼 분홍색으로 변한 뺨을 드러내며 반짝 동그란 눈을 치켜떴다.


[지금도 충분해! 나 살도 쪘다고!]

[그래서 더 예뻐. 내 고양이 감기 걸리겠다.]

[아냐…… 나, 더워. 너무, 덥고…… 숨이……!]

재하는 참지 못하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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