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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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당근
2022.09.08.
한편, 주인과 동거인이 떠나버린 오크하우스에 낯선 이가 들어섰다.
이 연실 여사, 63세.
오래전 주한 미 대사인 숀 알렉시스의 집안일을 담당했던 이 여사는 성품이 곧고 손이 야무지며 한식은 물론 양식까지 요리 솜씨 또한 수준급이다.
8년 전, 한국에 들어온 권재하의 집안일을 돌보던 사람이 그녀다.
재하는 이번에도 이 여사를 찾았고 운이 좋게도 그녀가 브리티시 헤리티지 근처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건강하시죠? 제가 용돈 많이 드리려고 준비했는데.]
[아휴- 용돈은 무슨, 우리 재하 밥해주러 그냥도 갈 수 있지. 아니 이제 대표님이라고 불러야겠다!]
[저, 그런데 밥은 안 해 주셔도 돼요. 대신…….]
보수는 전보다 몇 배, 어디 가서도 들어본 적 없는 큰 액수인데.
그에 반해, 해야 하는 일은 전의 삼분의 일 수준에도 못 미치는 이상한 제안이었다.
냉장고가 비지 않도록 넉넉히 장을 봐서 채워주고. 청소며 기타 집안일을 해야 하는 건 맞는데.
세탁물은 절대 건드리지 말 것.
모든 일은 주말 제외하고 주중 이틀이나 사흘 안에 신속하게.
이상한 요구였다.
***
띠링.
[민아야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거야? 제발 한번이라도 좋으니 대답 좀 해 줘. 나 너무 힘들어.]
천천히 움직이며 퇴원준비를 하던 민아는 한동안 핸드폰 메시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띠링.
[나 정말 안 되겠어. 못 견디겠다고.]
네가 나보다 힘들었을까. 약해 빠진 인간.
민아는 핸드폰을 침대 위로 던졌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움직여 벗은 환자복을 며칠간 옆을 지켜준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편안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는데 사뭇 움직일 만 했다.
초반 이틀을 전혀 움직이지 않은 게 큰 도움이 된 것이다.
“저 이제 다 되었어요. 가보셔도 되요, 고생하셨습니다.”
망설이던 아주머니는 언니가 곧 도착 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리를 떴다.
허리 좀 삐끗한 걸 가지고 무슨 간병인까지-
돈을 많이 받는 일을 한다더니 씀씀이가 헤퍼지기라도 한 건가.
“…….”
이규호 씨. 규호오빠.
그래도 한 때는 사랑했었던 사람인데. 이제 별 감정이 들지 않은 그 이름.
다른 여자라도 만나서 저도 행복하면 좀 좋아.
“무슨 거지같은 미련이냐고.”
민아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제 전부라고 말했던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해놓고 왜 자꾸 미련을 두고 이러는 걸까.
어쩌면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다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일 수도 있는데.
자꾸 저 자신을 괴롭힌다.
상대를 하지 않는 게 도와주는 길이라고 믿고 그저 무시로 일관할 뿐이다.
[어디 근본도 없는 걸 데려 와서는.]
[아비 어미가 범죄자인지 무슨 중병이라도 걸려서 죽었는지 알게 뭐야? 너 유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저런 애를 사귀었니? 그리고 결혼이라도 하겠다고 이런 자리를 만들었고? 이 일을 어쩌면 좋아.]
규호의 부모님들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절망적인 한숨을 쉬었다.
그에 반해 규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두둔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그 흔한- 애가 착하다든지…… 뭐, 그런 거.
화장실에 다녀오던 민아는 규호의 부모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아무 말 못하는 그에게 실망했다.
결국 그날 말하려고 했던 임신 사실은 꺼내지 않았다.
.
.
핸들을 잡은 마 실장은 별 표정 없이 운전에만 집중하는 모양이다.
반면 아까부터 짙은 의심의 눈초리로 은조를 쏘아보던 민아가 마 실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차가 굉장히 좋아요. 이거 되게 비싼 차 맞죠? 마. 비서님.”
난감한 은조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마 실장이 사정을 알 리 없다.
“제가 알기로는 고가의 자동차면서도 꽤 날렵한 외관이라 여성분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전면에 큼직한 앰블렘이 정말 멋지죠? 안전이야 뭐 말할 것도 없고, 저도 이 모델은 처음 타보는데 묵직하면서도 매우 잘나가네요.”
민아는 고급스러운 크림색 나파 가죽 시트를 손으로 문지르며 은조를 쳐다본다.
“언니 이게 나파 가죽이라고 원래 미국 나파에서 생산되던 부드러운 양가죽을 뜻하는데.”
“알아. 다온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맛있는 거 먹자, 우리 셋이.”
민아의 말을 자른 은조는 그만 입을 다물라는 뜻으로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
“우리 강아지, 졸려?”
“……웅.”
민아는 옆에 붙어서 졸고 있는 다온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어린애들이 다 그런지 모르겠지만 잠이 오는 다온이는 아주 솔직해지는 경향이 있다.
“엄마랑 자니까 좋았어?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고?”
“엄마 일하는 집 되게 좋아. 근데 아저씨는 싫어.”
“아, 그렇구나. 아저씨가 왜 싫었어? 우리 다온이는 착한 어린인데.”
“이모…… 나 만원만 주면 안 돼……?”
애착담요를 뭉쳐서 끌어안은 다온이가 뜬금없는 소리를 하더니 그나마 반 정도 뜨고 있던 눈을 감아버린다.
“만원을 어디다 쓰게?”
“그 아저씨 주게…… 아저씨가 엄마 뺏어갈지도 몰라…….”
정말 기분이 나쁜지 작은 얼굴이 설핏 구겨진다.
“…….”
그러니까, 언니는 지금 돈을 빌려준 권재하의 집에 있다는 거네.
참, 남자 여자의 일이란- 복잡하고 미묘해.
둘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모르는 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오후 7시.
집안으로 들어서던 은조는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재하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벌써 퇴근했어? 미리 연락을 좀 주지…….”
말하다 보니 멀찍이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그릇이며…… 그리고 이 냄새는.
“혹시 누가 와? 그럼 나는.”
“아냐, 우리가 먹을 거야. 옷 갈아입고 내려와.”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않은 재하가 무심하게 말했다.
.
.
“……되게 맛있어.”
흰 쌀밥과 간이 딱 알맞은 부드러운 갈빗살이 입안에서 살살 녹아 사라졌다.
은조는 저도 모르게 맞은편에 앉아있는 재하를 향해 미소 지었다.
누군가 저를 위해 특별히 차려준 것 같은 밥상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나저나 과일도 갈아 넣은 게 분명하고 부드러운 식감이며- 어디서 먹어봤었던 맛인데…….
“많이 먹어.”
“응, 그런데 이게 다 어디서…….”
“내가 먹고 싶어서 주문했어.”
“아아- 주문.”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뜬 흰쌀밥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재하의 따가운 눈길이 느껴진다.
“너무 많이는 먹지 말고,”
“……응?”
“벨지안 다크초콜릿- 아이스크림 있어. 후식”
시선을 내리깐 그가 젓가락으로 또! 당근을 집어갔다.
갈비찜이 가득 든 큰 접시 안에는 이제 은조가 싫어하는 당근이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무서워…… 왜 저러지.
은조 역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조용한 저녁식사가 이어졌다.
.
.
“여, 영화를 보자고?”
“왜 놀라? 나쁜 짓을 하지고 한 것도 아니고 겨우 영환데.”
그야- 예전에도 나쁜 짓 전에는 항상 영화를 봤었던 기억이 있으니까……. 제대로 끝까지 본 영화가 있기나 할까.
“아이스크림 가져올게. 티비 전원만 누르면 돼, 리모컨 거기 있지.”
저- 철저한 계획성.
은조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오늘 왜 저래- 차라리 일을 시키지.
.
.
운명적 사랑을 믿는 남자의 씁쓸한 500일을 다룬 영화는 역시나 병풍이었다.
달콤 쌉싸름한 아이스크림이 사라지자마자 그의 사설이 시작 되었다.
“은조야 그 사탕 기억나지.”
“……?”
“되게 맛있는 사탕이 여기 내 앞에 있다. 나는 이미 먹어봤었기 때문에 얼마나 다디단지 잘 알지.”
“…….”
“하지만 입에 넣기 전에도 그 행복감은 충분하거든, 그래서 좀 참아 보는 거지. 이제 어. 른. 이니까.”
“…….”
“어차피 한번 입안에 넣으면 절대 빼지 않을 거니까. 다 녹아 없어지기 전에는 말이야.”
“……충분하니까 그만 좀 해. 나, 체할 것 같아.”
“아는구나. 내가 아주 많이 봐주고 있다는 거.”
“…….”
“맛있는 걸 앞에 두고 그게 얼마나 맛있는지 알면서 즐기는 거. 하…… 달콤한 고문이랄까. 잘 생각해 봐, 어쩌면 너도 즐기고 있는 걸지도 몰라. 인정하기 싫을 뿐이지.”
“난, 절대. 아냐.”
“그럼, 잡아 볼래?”
그가 느긋하게 뒤로 젖혀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은조에게로 몸을 틀었다.
긴 팔을 쭉 뻗어 큰 손을 바로 은조의 무릎 위에 척, 올려두었다.
“…….”
“아니라면서. 그럼 잡아 봐. 아무것도 아니잖아 손잡는 거 정도는. 우리가 했던 짓들에 비하면.”
에이, 정말.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심정이 된 은조는 커다란 손 위에 제 손을 툭 올렸다.
“자! 됐어? 만족해? 봐! 아무렇지도 않잖아!”
“아직은.”
긴 손가락이 은조의 손가락 사이를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온 몸에 솜털이 바짝 일어서며 달고 쓴 침이 목안으로 넘어간다.
“이제 손은 잡았고…… 다음은 뭘 할지 생각해 보자.”
놔. 뒤늦게 은조가 손을 흔들었지만 놓아줄 그가 아니다.
“하…… 대체 영화는 왜 틀어 놓은 거야?”
“지금이라도 끌까, 네 생각해서 배경음 깐 거야. 난 전혀 필요 없어, 오히려 거추장스럽지. 너 숨 쉬는 소리도 안 들리고.”
리모컨을 잡은 그가 볼륨을 최대치로 낮추어 버렸다.
입만 벙긋거리는 배우들.
은조의 귀에 새액- 새액- 제 숨소리가 들렸다.
쿵쿵거리는 거센 심장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엇박자를 맞춘다.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너랑 같은 침대도 쓸 수 있어. 봤자나 얼마 전에. 이제 거의 해탈의 경지에 이른 수도자와 다를 게 없거든. 다시 테스트해볼 생각 없어?”
“정말이지…… 뻔뻔하기 이를 데 없어.”
뾰족하게 눈꼬리를 치켜 올렸지만 저절로 붉어지는 뺨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6년 만에 만난 경찰서 주차장, 어둠 속에서 그가 눈짓으로 어디를 가리켰는가.
같이 지낸 지난 며칠 사이에도 대놓고 시커먼 속내를 보여주느라 여념이 없다.
남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나 즐기는 주제에…… 스스로를 고귀한 수도자에 비유하다니.
“내가 앞으로 남자랑 한 침대를 쓸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된대도…….”
“뭐? 사랑? 그놈의 사랑타령은- 애까지 혼자 낳아 키우는 마당에 아직도 소녀 같은 감성이 남아 있나 봐.”
감수성이 풍부한 건 알았지만- 됐어, 얼마나 가나 두고 보자고.
실컷 비아냥거린 재하는 다시 리모컨을 잡아 볼륨을 높였다.
여전히 깍지 낀 손을 풀지 않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