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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뜨겁고 날카로운 이름 (30/100)


30. 뜨겁고 날카로운 이름
2022.09.12.



“아버지, 어머니 드릴 말씀 있습니다.”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상윤이 양 주먹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정색하며 자세를 바로 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이혜정의 눈빛이 차다.


“드릴 말씀? 그냥 입을 열지 마. 넌 입 꽉 다물고 있는 게 여럿 도와주는 거야. 아냐?”

쯔쯔쯔, 혀를 찬 혜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티브이 리모컨을 찾는다. 볼륨이나 높이겠다는 뜻이다.


“뭔데, 그렇게 무게를 잡아.”

쥐고 있는 태블릿에서 눈도 떼지 않는 차대성이 성의 없이 한마디 던진다.


“아휴, 됐어요. 들으나 마나야. 내가 아주 망할 여편네들이 뒤에서 놀리고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생각을 하면- 아직 이렇게 숨이 붙어있는 내가 용해. 아휴…… 속 터져.”

“엄마…….”

“어머니라며? 고새 또 엄마야? 왜, 용돈이라도 필요하냐!! 야, 내가 모임에 부회장인데 당분간 얼굴도 못 디밀게 되었으니 이게 무슨 개망신이냐고. 대답해 봐!!! 이게 다 누구 때문이냐고!!”

“거, 목소리 좀 낮춥시다.”

관심이라고는 오로지 정치.

권력과 명예 아니면 숨겨둔 애인이 전부인 차대성이 다시 시큰둥하게 말로 만 거든다.


“…….”

입을 한일자로 다문 상윤은 부모가 대체 언제부터 저를 이렇게 업신여겼는지 잠시 되짚어보았다.

공부를 못 한 것도 아니고, 외모가 빠지지도 않는데.

물론 그, 예민하고 불안정한 정신을 좀 다스리려고 흠, 좋지 않은 것들에 가끔 손을…….


“너, 웬일로 일찌감치 집에 기어들어 와서 밥을 먹나했더니, 또 무슨 헛소리를 해서 나를 기함시키려고 그러니. 머리 아프니까 입도 열지 마.”

“지난번 일은 다시 사죄 드…….”

“됐대도!”

“됐긴요, 이제 제가 결혼할 여자는 제가 알아서 데려오겠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정 됐다고 하시면 관두고요.”

잠시 의젓한 자세를 취했던 상윤이 다리를 꼬며 내려 두었던 찻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선전포고를 한 아들이 흥미롭다는 듯 잠시 눈을 들어 상윤을 바라보는 차대성이 피식 웃고 만다.


“차, 잘 마셨습니다. 두 분이 알아서들 하세요.”

역시나 남의 일 보듯,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이쯤에서 자기 볼일이나 보러 갈 심산인 게 분명하다.

방관자. 평생 방관자- 상윤이 소리 없이 입술만 작게 움직였다.

하긴, 더 있어봤자 이혜정의 높고 찢어지는 음성이 고막을 할퀴기밖에 더할까.

꽥꽥거리기에 앞서 이를 갈고 있는 혜정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게 보였다.


“너, 파혼한지. 아니, 파혼 당한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헛소리를 술술 뱉어, 뱉기를.”

“생각 많이 하고 하는 소리에요.”

“무슨 생각? 생각 같은 걸 할 줄 아는 놈이 그런 더러운 짓을 하고 다니고? 아아- 맨 정신이 아니었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네 아비 같은 인간도 모자라서 너 같은 걸 아들이라고. 이혜정이 이런 후진 인생을 사는 걸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하겠어. 세상에, 남들이라고 대충 입히고 가르쳐 키운 자식새끼들도…….”

네, 네, 네- 혜정의 말을 자른 상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저는 말씀 드렸습니다. 이게 다, 두 분처럼 살지 않으려고 이러는 겁니다. 잘- 착하게- 열심히 살고 싶게 하는 여자를 찾아서 아주, 아주- 행복하게 살려고요. 이제까지와 다르게.”

“미친놈…….”

등을 돌리려던 상윤이 갑자기 몸을 휙 틀더니 미친 소리를 하나 더 남겼다.


“참, 저 오피스텔 계약했어요. 어딘진 안 알려드리려고요.”

“야!!! 결혼 전에 독립은 절대 안 된다고 했지! 차상윤!!!”

“늦어도 더럽게 늦었지. 내가 이 집구석에 무슨 미련이 있다고 여태 붙어있었는지. 역시 제 정신이 아니었어.”

“뭐? 너 이놈의 자식 이리 안 와!”

막 집안으로 들어서던 하윤이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제 어미와 오빠를 빠르게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아- 이혜정이 이마를 짚으며 소파로 주저앉는다.

***


 
은조는 며칠째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 때문에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낮고 그윽한 저음이 수시로 찾아와 온 몸을 콕콕 찌르고 간지럽혔다.

아직도.

그 퇴폐적인 속삭임만으로도 저를 손쉽게 흩뜨리는 남자가 미웠다.
 


[입에 넣기 전에도 그 행복감은 충분하거든, 그래서 좀 참아 보는 거지.]


[어차피 한번 입안에 넣으면 절대 빼지 않을 거니까. 다 녹아 없어지기 전에는 말이야.]


[알아 둬. 내가 너 아주 많이 봐주고 있다는 거.]


[그럼, 잡아 봐, 내 손.]

 
은조는 굵으면서도 섬세한 남자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던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너도 즐기고 있는 걸지도 몰라. 인정하기 싫을 뿐이지.]

 


“…….”

그렇게 손가락이 단단하게 맞물려 있는 동안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은 아찔함을 느꼈다.

아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다는 거 알잖아, 윤은조.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 생각.

이미 아주 오래전에 폈다 접었다, 다시 펴고 또다시 접기를 수없이 되풀이했던 멍청한 생각이다.

그 바보 같은 생각을 지금 또 하게?

지난 일은 결국 지난 일.

전부 잊어야 하는 게 상책이라고 결론을 지은 그걸?

싫어. 안 해.

은조는 살짝 땀이 솟아난 이마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아무튼 결국 같은 일이 벌어질까 봐 두려운 건 사실이다.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인정하기 싫은 것뿐이라는 그의 말이 옳을까 봐 두렵다.
 


[이제 손은 잡았고…… 다음엔 뭘 할지 생각해보자.]

 
권재하라는 남자의 은근한 경고,

혹은 노골적이고 치명적인 유혹.

어느 쪽이든…… 과연 내개 버텨낼 힘이 있을까.

윤은조.

여덟 살 이후 평생 세상과 삶을 두려워했지만 결코 드러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산 여자.

자신을 지키려고 매순간을 소리 없는 전쟁처럼 살아온 여자.

내내 날카로운 새의 부리를 피하는 벌레처럼.

색깔도 무늬도 튀지 않게- 때로는 나뭇잎처럼, 때로는 흙처럼,

납작 엎드려 바닥을 기면서. 살아냈다.

그리고 이제 겨우.

두 발로 땅을 딛고, 손잡고 같이 걸어줄 소중한 가족이 생겼는데.

권재하,

그 뜨겁고 날카로운 이름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

 


[그놈의 사랑타령은- 애까지 혼자 낳아 키우는 마당에.]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하게 굳어진 그녀의 심장에 자꾸 가느다란 실금을 만들어 놓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더 갈라지라고 후벼 판다.

애.

아이……. 나의 아이.

언제든 실금을 쩍 가르고 붉은 피를 콸콸 토해내게 만들 수 있는 오직 단 하나의 이유.

잠시 왔다, 사라진.

가엾은 나의 아이.


“은조 씨? 은조!!”

“네?!!”

“그거 언제까지 징징거리게 내버려둘 거야.”

아- 책상 위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모르는 번호여서 일단 수신거부 버튼을 눌러 소란스러운 핸드폰을 잠재워버렸다.

하지만 이내 같은 번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은조는 빨라진 심장박동을 느끼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쌤! 저 하윤이에요!]

“……하윤이?”

[네, 하윤이요! 혹시 전화 받기 불편하세요?]

“아니야, 괜찮아! 그런데 지금 어디야? 영국에 있는 거 아니었어?”

[지난주에 완전히 들어 왔어요! 보고 싶어요, 쌤. 아직 JS에 계신 거 맞죠?]

“그럼, 너는 건강하고? 전에 당분간 들어올 계획 없다고 하더니 어떻게 된 거야? 아무튼 잘 왔어. 목소리가 밝다.”

[쌤 저 내일 JS 근처에 갈 일 있는데 시간 좀 내주세요. 차도 좋고 밥도 좋고, 사실 여쭤볼 것도 있지만 아무튼 보고 싶은 맘이 제일 커요. 네?]

“그래, 나도 보고 싶다. 그런데 저녁식사는 좀 그렇고, 차 한 잔 할 시간은 돼. 괜찮지?”

[좋아요! 그럼 내일 제가 메시지 넣을게요.]

 

.
.

얼굴가득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상윤이 제 동생을 바라보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뭐? 내가 꼭 오빠가 시켜서 전화한 줄 알아?”

“어쨌든 예뻐, 내 동생.”

“내가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쌤 남자친구 없다면 오빠가 뭘 어쩌겠다는 건데- 아니, 어딜 봐서 은조쌤이 남친이 없겠어? 혹시 남편이 있는 거 오빠만 모르는 건 아니고?”

“결혼했다는 소리 들었어? 아니지?”

“쌤은 SNS 그런 거 통 안 해. 사생활이건 생각이건 쉽게 드러내는 스타일 아냐.”

“알지.”

“오빠가 알긴 뭘 알아?”

이미 왕나나를 통해 대충 전해들은 게 있었다.

학교 때도 집과 학교밖에 모르더니 여전히 집과 회사만 오가는 모범생 같은 생활을 한다나 뭐라나.

왕나나 고 여우같은 게 무슨 수작으로 자꾸 저를 윤은조에게 붙이지 못해서 안달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한번 속아주는 척 일단 만나 볼 생각이다.

남친이든 남편이든 있고 없고는 만나보면 알겠지.

웬만한 남친 정도면- 간만에 전의를 한번 불태워 봐도 좋고,

이 날아갈 것같이 가뿐하면서도 에너지가 샘솟는 기분-

역시 그녀는 나의 아드레날린.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근거 없는 만족감이 최고 상태에 달한 상윤이 히죽거렸다.

***

다음날 오후.

회사근처 카페에서 만난 은조와 하윤. 막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는데 상윤이 불쑥 나타났다.


“안녕, 숙녀 분들.”

“오빠! 오빠가 왜……?”

당황한 하윤이 은조의 안색을 살피며 얼굴을 붉혔지만 상윤은 짐짓 태연한 낯으로 손부터 내민다.


“오랜만이다, 은조야. 아니, 이제 은조 씨라고 해야 할 것 같네. 잘 지냈어?”

“……네, 안녕하세요.”

자리에서 일어선 은조가 어색하게 상윤이 내민 손을 잡았다 놓았다.


“쌤, 이거 오해하시면 안 돼요! 저는 진짜 모르는 일이에요! 오빠, 왜 나타났냐고!”

“태워다 준 김에 이왕이면 커피도 사주려고 따라 올라왔지. 친구 누구 만난다더니 은조였어? 와- 내가 올라와보길 잘했네. 자, 뭐 드실래요? 두 분.”

재킷 안주머니로 손을 집어넣는 상윤의 얼굴은 밝고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주변의 여자들 몇이 힐긋 거릴 정도의 깔끔한 미남임에는 분명했다.

.
.



“하! 저 병신- 웃는 것 좀 봐. 저렇게 좋은데 여태 어떻게 참고 살았대.”

카페의 맨 끝, 구석진 자리에 몰래 숨어있던 왕나나가 혀를 찼다.

그리고 들고 있던 세컨드 휴대폰의 카메라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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