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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심장은 영 다른 소리를 내고 있다 (31/100)


31. 심장은 영 다른 소리를 내고 있다
2022.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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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과 상윤을 만나고 집으로 들어온 은조는 사 가지고 들어온 도시락으로 혼자 저녁을 해결했다.

재하가 말했다.

밖에서 약속이 많으니 따로 연락이 없다면 저녁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고.

오늘은 그에게서 단 한 번의 연락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혼자 맛없는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다.

내가 왜 부리나케 이리로 들어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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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이랑 같이 저녁을 먹을걸.”

어쩌면 일을 시키려는 것보다 고립시키려는 게 목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뭐든 힘든 것은 마찬가지지만.

집에서 다온이와 민아랑 즐겁게 먹던 저녁 식사를 생각하니 조금 건드렸을 뿐인 도시락에서 흥미가 싹 가신다.

반도 먹지 않은 도시락을 치워버리고 집 안 공기도 바꾼 은조는 할 일을 찾아보았다.

없었다.

어디 한군데 닦고 문지를 곳도 없이 깨끗하다.

재하의 드레스 셔츠도 원래 맡아서 하던 전문세탁소에서 가져가 버렸다.

[새것처럼 만들어서 제자리에 두겠습니다.]

관리실 오크 하우스 전용 캐비닛, 빈 옷걸이에 붙어있던 단정한 메모의 내용이다.

다림질이 영 별로였나.

그럼, 이제 내가 할 일은.

권재하가 들어오기 전에 방에 꽁꽁 숨어버리는 것뿐.

역시나 예전 그때처럼 슬슬 도망이나 다녀야 하는 제 모습에 은조는 씁쓸하게 웃었다.

꽤 늦은 시간 잠들기 전까지 그가 들어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아침에 나가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그도 나를 피해 도망 다니나?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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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은 한 시간 전쯤에 이미 출근하셨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차를 출발시키던 마 실장이 건넨 말이었다.

***

같은 날, 오후 2시.

인천 국제공항, 제1 여객터미널.

공항철도 서울역 방향 플랫폼.

여자는 백패커스(backpackers), 흔히 말하는 배낭족으로 보였다.

대충 땋아 내려뜨린 금빛의 머리카락은 떡이 지고 부스스한 상태였고 등에 짊어진 배낭이며 걸친 옷은 끝이 다 헤진 모양이다.

누가 봐도 가난한 여행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지도를 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바닥에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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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마침 근처에 있던 젊은 남자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그쪽을 향해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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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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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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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괜찮아요. 나는 질문이 있어요. 서울역으로 가려면 이거 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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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서울역 가요!”

남자는 어설프지만 정확하게 한국말을 하는 금발의 여성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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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한국 날씨가 참 좋아요. 춥지 않고 덥지도 않아. 아, 반갑습니다. 저는 나탈리 와이즈먼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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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남자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31살, 푸른 눈 금발의 미국인.

나탈리 와이즈만은 여성 운동가 겸 환경운동가다.

넘치는 에너지의 소유자인 그녀는 최근 반핵, 반전 평화운동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마음이 맞는 친구와 함께 만든 환경단체 리브어스(LIVE US)의 부의장이기도 한 그녀는 매번 10만 명 이상이 참가하는 평화적 시위를 주도해왔다.

주 내용은 세계 여성의 권리 신장과 지구 환경 지키기 등이며, 광범한 국제적 동참을 이끌기 위해 쉬지 않고 세계를 돌아다닌다.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친환경 생활을 하는 나탈리는 마지막으로 새 옷을 사 입은 것이 언제인지 스스로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다.

옷은 물론 기타 필요한 것들은 중고를 사거나 다른 사람이 버리겠다는 것을 얻어 입기도 한다.

전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도시에 머물면서도 숙소로는 꼭 유스호스텔을 이용한다.

그것도 사실 아주 호사스러운 경우고 대부분은 침낭을 깔고 딱딱한 바닥 어디에서도 잘 잔다.

그녀의 유일한 불만은 뉴욕 맨해튼, 집에 있는 강아지 커스터드를 껴안고 쓰다듬을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도 처음 그녀를 만나고 일정 기간 함께 생활해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미국의 석유 재벌 와이즈먼 가(家)의 유일한 상속녀 ‘나탈리 와이즈먼’이 바로 그녀라는 것을.

전철을 이용해 서울역에 도착한 그녀는 기어코 한국 사람 여럿을 당황하게 만들고 나서야, 타야 할 버스를 찾아냈다.

생전 처음 와보는 도시, 낯선 버스 정류장에 내려 한참이나 언덕길을 따라 걷는 동안에도 그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접한 서울의 풍경에 반한 듯 두 눈이 반짝거렸다.

그리고 드디어.

비행기, 전철, 버스, 도보까지 헤아리기도 지칠 만큼 길고 긴 시간을 들여 도착한 목적지 앞에 섰다.

브리티시 헤리티지(British Heritage).

카일 J. 알렉시스- 권재하의 집.

그녀의 공식적인 약혼자의 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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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카일! 넌 여전히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는구나.]

무거운 배낭을 깨끗한 대리석 바닥에 내려놓은 나탈리는 바로 욕실부터 찾았다.

그리고 약 30분 후.

와삭와삭- 사과를 껍질 째 씹어 먹는 나탈리는 재하와 통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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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 너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나랑 했던 약속은 전부 어떻게 된 거지? 넌 지구와 인류 미래를 죽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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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제발, 나탈리. 그 입 좀 다물어 줘. 계속 이렇게 굴겠다면 난 너를 재워 줄 생각이 없어.]

막 날인을 마친 서류를 비서에게 건넨 재하는 바로 다음 서류를 펼쳤다.

온다고 했지만 정말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줄이야.

신분을 숨기고 다니는데 이골이 난 그녀였기에 망정이지.

넬슨 와이즈먼의 손녀가 국내에 들어온 걸 알았다면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시끄럽게 굴고도 남았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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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 나 저녁은 집에서 먹고 싶어. 불고기, 준비해 줄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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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정말 지구를 생각한다면 육식부터 끊어야 하는 거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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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지는 법이 없구나. 카일, 역시 너다워. 알아, 알고말고. 계속 노력 중이야. 어쩌면 불고기가 내 인생에 마지막 고기 요리일지도 몰라. 제발 협조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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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는 없지만 준비는 해 줄게. 바로 누군가 갈 거야. 나의 최고의 요리사지. 넌 좀 기다리기만 하면 될 거고.]

덤덤한 재하는 눈으로 빠르게 훑은 서류에 다시 날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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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너랑 한국 식당에서 먹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 아프리카에서도 내내 그 생각뿐이었어!! 그런데 드디어! 한국에서 진짜를 먹어보다니! 어쩌면 나는 코끼리만큼 많이 먹을지도 몰라. 네 요리사에게 미리 알려주면 좋겠어. 참, 방은 아무 데나 쓰면 될까? 어차피 난 필요한 게 별로 없어서 1층 맨 끝 방에 짐을 풀었어,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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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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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이. 이따가 봐!]

전화를 끊은 재하는 들고 있는 휴대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눈빛으로 뭘 태워버릴 수 있다면 아마 휴대폰은 그의 손안에서 녹아내렸을 것이다.

감히 그따위 사진을.

어제 저녁 퇴근 직전,

휴대폰으로 들어온 사진을 본 재하는 전화기를 가루로 만들어버릴 뻔했다.

지나가는 남자를 보고 웃어도 뒷골이 쑤실 판에.

어디서 그 개자식한테.

마치 코미디 영화를 찍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끝나지 않는 악연’이라는 제목의 절대 웃을 수 없는,

기분 더러운 코미디 영화.

그나마, 정말이지 간신히.

끓어오르는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던 이유는 윤은조와 차상윤, 둘 사이에 다른 여자가 버티고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름까지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은조가 가르쳤던 여학생이었다.

그리고 정확하게는.

[지인 둘과. 회사 근처 카페에서 차를 마신다.] -는 보고를 이미 받은 직후였다.

권재하에게는, 매우 든든한 마준희 실장이 있었으니까.

어쨌든, 의처증 있는 미친 새X 마냥 당장 사진을 찍어서 보내봐라. -라고 하고 싶은 걸 겨우 참아 넘겼더니.

엉뚱한 번호를 통해 사진이 날아온 것이다.

한 장이어도 충분할 것을 아주 여러 장,

그것도 기술적으로 윤은조가 예쁘게 웃을 때를 제대로 잡아낸 것으로.

윤은조와 권재하의 사이를 알고 있다.

그리고 같잖은 사진 몇 장으로 내 심기를 건드려보겠다?

이득을 볼 만한 사람이 뻔했지만 당장에 맞장구를 쳐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냐오냐 내내 봐주니까 아주.

겁대가리를 상실한 계집애.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날뛰는 왕나나는 천천히 손을 봐주면 그만이고.

차상윤부터 처리하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퇴근을 미룬 재하는 사설탐정에게 다시 연락을 넣었다.

요구사항은 두 가지.

차상윤의 지난 8년간의 행적.

그리고 최근 윤은조와의 관계 여부.

만일 그 새X가 아이의 아비라면-

나를 놓자마자 그놈과 만났다는 얘긴가.

이제까지 형태가 없었던 어떤 얼굴에, 차상윤 그 자식의 얼굴이 정확하게 겹쳐졌다.

뒷골이 쑤시다 못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그렇다고 제멋대로 뻗쳐나가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상상들을 통제할 방법도 없었다.

반 정도 미쳐 있는 상태로 집에 들어가 윤은조를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을 미리 찾아 처리해버렸더니.

오늘은 뜻밖의 손님이 집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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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조 씨 바쁘네. 어제도 오늘도 한꺼번에 둘씩 상대하느라.”

낮게 혀를 찬 재하는 시간을 확인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오크트리 하우스로 들어선 순간 은조는 재하의 세단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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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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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이 일찍 들어오셨네요.”

룸미러로 은조의 안색을 살핀 마 실장이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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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러게요.”

아무 메시지도 받은 게 없는데. 생각해 둔 메뉴도 없고. 어쩌지.

머리는 저녁 메뉴를 걱정하는 것처럼 구르는데, 심장은 영 다른 소리를 내고 있다.

무슨 의미인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 차에서 급하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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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장님, 내리지 마세요. 내일 봬요. 조심해서 들어가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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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좋은 저녁 보내세요.”

마 실장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자동차 문이 닫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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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으로 들어서던 은조가 들은 것은 여자의 웃음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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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시원하게 웃는다.

그리고 음식 냄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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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 그건 네 생각이지! 난, 아이는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해. 내 부모님을 좀 봐, 오빠 둘과 언니, 내가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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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어, 일찍 왔네.”

와인 잔을 돌리고 있던 재하의 얼굴은 아주 밝았다.

마치 대학생 시절의 그를 보는 것 같아 은조는 얼어붙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이마를 덮은 검은 벨벳 같은 머릿결.

캐주얼한 크림색 팬츠에 카라가 있는 남색 캐시미어 니트는 완벽하다.

그냥…… 저 남자가 완벽한 건가.

시간이 거꾸로 흐르다 못해 엉망진창 뒤죽박죽,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왜 심장이 이렇게 요란하게 뛰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아니,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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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해, 이리 와. 알지? 나탈리 와이즈먼. 내 약혼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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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어색한 걸음을 옮기는 은조는 미소를 만들었다.

약혼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남자를 보고-

울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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