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임신 6주 차, 멀리서 그를 보았다
(32/100)
32. 임신 6주 차, 멀리서 그를 보았다
(32/100)
32. 임신 6주 차, 멀리서 그를 보았다
2022.09.19.
“나탈리, 인사해. 이쪽은 윤은조 씨.”
약혼자의 어깨에 둘렀던 팔을 푼 재하가 건조한 목소리로 인사를 권했다.
조금 전까지 미소를 머금었던 얼굴도 무표정이고, 현재의 상황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느낌이다.
이럴 거면 애초에 집에 손님이 왔으니 들어오지 말라고 메시지라도 넣어두면 됐을걸.
어색함에 입술을 감쳐무는 은조와 달리 나탈리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새파란 눈동자를 마구 굴렸다.
제 눈앞의 은조를 샅샅이 훑느라고 정신이 없다.
“오. 마이. 갓! 믿을 수 없네! 맞죠? 세상에. 안녕하세요. 유는…….”
“윤, 은조.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간신히 엷은 미소를 만든 은조는 나탈리가 내민 손을 잡았다.
키가 거의 재하만 한 나탈리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반짝거리는 눈을 껌벅인다.
“윤은조. 한국말은 어려운데. 역시 이름은 더 어려워요. 아, 앉아요!”
“아니요, 저는 가봐야 할 것 같아요.”
[no!!]
은조의 앞을 막아선 나탈리가 양손을 크게 휘저으면 빠르게 한국말을 쏟아냈다.
“안 돼요! 왜 가야 하죠? 먹을 것이 너무 많아요. 도와줘야 해요. 예고 없이 온 사람은 나예요! 카일! 왜 그녀가 간다고 하는 거야? 뭐가 잘못된 거지?”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어깨를 한번 들썩이고 잔에 든 와인을 들이켠 재하의 눈빛은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은조. 일단 그- 가방을 내려놓고. 음- 그래! 손을 좀 씻고 오는 건 어때요? 욕실은 왼-쪽? 오른쪽- 저기 첫 번째 문이에요.”
“네? 아…… 네.”
수선을 피우는 나탈리는 제 맘대로 은조의 어깨를 잡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거의 빼앗는 수준으로 핸드백을 받아내 소파 위에 내려놓더니 욕실이 있는 방향으로 등을 떠밀었다.
욕실의 문이 닫히기 전 은조는 조금 흥분한 것 같은 나탈리의 목소리를 들었다.
[카일, 대체 누구야? 친구야? 설마 여자 친구는 아니지?]
[나탈리, 농담하지 마. 넌 내 약혼자야, 세상이 다 아는 사이라고, 우리는. 한국이라고 예외는 아냐.]
[오, 카일! 묘하게 핵심을 피해 가는 말인 거 너도 알지? 친구라고 하기도, 여자친구라고 하기도 싫은 거네. 그렇다고 딱 어떤 관계인지 정확하게 말하지도 않았어. 너야말로 나한테 장난해? 난 와이즈먼이야!]
[잘났어. 난 알렉시스야. 됐어?]
나탈리를 향해 못 말리겠다는 듯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은 재하는 빈 잔에 다시 와인을 채웠다.
[말 잘했어, 카일! 그러니까 알렉시스의 명예를 걸고 제대로 대답해 봐. 그 전에! 내가 먼저 와이즈먼으로서 말하지. ‘그녀는. 너무. 환상적이야!’]
Amazing…… 역시 고개를 가로젓는 나탈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알을 굴렸다.
하!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는 재하는 그저 헛웃음을 웃었다.
이틀에 걸쳐 참 길게도 코미디 영화를 찍는 이 기분.
정말 어메이징하다.
“집안일을 잠시 도와주고 있어. 알아들어?”
재하가 다시 한국말을 뱉은 순간 은조가 나타났다.
[나, 완벽하게 알아듣지 못해. 무슨 헛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말을 빙빙 돌리면서 뭔가를 숨기려 한다는 느낌은 확실해.]
저기- 재하가 턱짓으로 은조의 존재를 알렸다.
“아, 미안해요, 은조. 이쪽으로 와서 앉을래요.”
나탈리가 바로 상냥한 한국어를 꺼냈지만 은조는 역시 멈칫거리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
“저 남자는 신경 쓰지 말아요. 자, 어서. 불고기 좋아해요? 아, 한국 사람한테 당연할 걸 물었나요?”
잠시 아무 말 없는 재하를 바라보던 은조는 나탈리를 향해 웃어 보였다.
“친절은 감사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제 집에 가보는 게 낫겠어요.”
“왜요? 불편해요?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정말 실망한 것 같은 표정의 나탈리를 행해 은조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
“두 분이 좋은 시간을 보내야 할 텐데, 제가 방해가 되면 안 되잖아요.”
“카일과 나는 이미 좋은 시간 충분히 보냈는데. 혹시 나랑 친해지기 싫어요? 나 나쁜 사람 아니에요.”
픕- 재하가 갑자기 입술을 터트리며 웃었다.
너 나쁜 거 맞거든. 지금 하는 짓을 봐서는 특히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 같은 동양 여자에게 수작을 부리고 있잖아.
재하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탈리를 바라보았다.
뭐? 네가 좋아하든 말든 내가 좀 친하게 지내고 싶어- 나탈리가 눈빛으로 받았다.
“……?”
“은조, 내가 무서운 건 아니죠?”
“아뇨! 무섭다뇨. 솔직히 너무 아름다우세요.”
“정말? 그럼 은조가 있어 주는 게 내가 더 행복하다면 있어 줄래요?”
“enough! 됐어! 그만해, 나탈리. 윤은조, 앉아. 저녁 안 먹었을 거 아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재하가 식탁 의자 하나를 빼준다. 어서 앉으라고 눈짓을 했다.
기다렸다는 듯 나탈리는 은조 앞에 음식이 든 접시들을 놓아주었다.
후-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쉰 은조는 앞에 놓인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옆에 앉아 있는 파란 눈의 금발이나 맞은편에 서서 내려다보는 남자나-
불편해 죽겠어.
“진짜- 공항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계속? 인형 같은 여자들을 봤지만 은조가 최고야. 실례가 안 된다면 머리카락을 좀 만져 봐도 될까?”
……어, 어디를?
“나탈리!”
묵직한 재하의 목소리에 흠칫 눈을 껌벅거린 나탈리는 합장을 하듯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가볍게 고개도 숙였다 들었다.
“아, 미안. 실례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은조, 어서 드세요.”
이 와중에도 불고기며 잡채는 입에 착 달라붙는 맛이었다.
대놓고 빤히 바라보는 나탈리만 아니면 있지도 않은 엄마가 해준 것처럼 느꼈을지도 모를 정도다.
“직업이 있어요?”
“네. 디자이너예요.”
“와우- 멋지네요. 혹시 여자 인권이나 환경 문제에 관심은 있어요?”
“부끄럽지만 여성 인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최근에 친환경 제품 프로젝트를 맡아서 진행하고 있는데 재미있어요.”
“음- 부끄러울 것 없어요. 나도 처음부터 이 세계에 관심이 있었던 거는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게 좋은 거예요. 뭐든지. 안 그래, 카일?”
“아, 나한테 물은 거야? 난 또 내가 있다는 걸 잊은 줄 알았지. 뭐, 너 좋을 대로 생각해.”
지금처럼 죽- 그렇게-
시큰둥한 그는 연신 와인을 홀짝이며 문득문득 따가운 눈초리로 은조를 찔렀다.
저거 눈치 주는 거 맞지? 빨리 빠져 줘야 되는데.
“…….”
“참, 카일- 욕실에 있는 샴푸와 컨디셔너, 아무튼 그런 것들 말이야.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해?”
“그만. 충분해, 나탈리. 난 너처럼 살 수 없어. 하지만 내가 너의 ‘리브 어스’에 얼마나 기부하는지를 생각해 봐, 제발.”
[플라스틱 용기를 줄이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 게다가 너는 새 옷을 무지 좋아하잖아! 그건 죄를 짓는 거야.]
“지저스. 나탈리, 제발- 난 멋진 옷을 입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야. 경쟁자의 등에 칼을 꽂는 일이 아니라면 말이야.”
[페이퍼 타월 대신 행주를 쓰고, 비닐 봉투 대신 장바구니를 쓰는 정도의 일들은 혼자서도 조금만 신경 쓰면 누구나 해낼 수 있어.]
“그건 보통의 사람들이 하는 거고.”
들었지- 재하가 내리깐 눈으로 은조를 바라보았다.
“……잘 먹었어요. 치우는 건 제가 할게요.”
“그래 나탈리, 넌 이제 이리 와서 와인이나 좀 더 마시는 게 어때.”
“은조에게 모든 걸 시키겠다고? 넌 술이나 홀짝이면서? 제대로 돌았구나, 카일.”
“홀짝.”
“…….”
제법 많은 양을 먹었는데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체한 것도 같고.
혼자서도 맘만 먹으면 이까짓 것 치우는 건 일도 아닌데-
내가 도와줄게요- 결국 나탈리가 붙었다.
“은조, 그거 알아요? 웃으면 정말, 정말 인형처럼 보여요. 도자기로 만든 인형 같아요. 피부가 마치…….”
“나탈리.”
“아, 그래 그래, 알았어! 넌 그거나 마셔. 카일- 동양 여자들이 서양 여자들에 비해서 피부가 예쁜 것은 사실이야! 너무 매끈하잖아!”
“나탈리, 제발.”
이들은 이런 식으로 사랑싸움을 하는 건가- 은조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대신 손을 좀 더 빠르게 움직였다.
마지막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손을 씻는데 나탈리가 물었다.
“아이 좋아해요?”
“네?”
“아까 은조 씨 들어왔을 때 카일과 나는 아이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거든요.”
“…….”
***
“대체 뭘 먹고…….”
먹은 걸 다 게워내고 나온 은조에게 민아는 미지근하게 데운 물을 내밀었다.
“괜찮아. 집에 오니까 너무 좋다.”
“오늘 밤에는 다온이 꼭 끌어안고 자. 얼마나 뜨끈한지 인간 난로야.”
민아는 왠지 핼쑥해 보이는 은조에게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
.
잠든 다온이를 품에 안은 은조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강아지, 엄마는 오늘 하루가 일 년 같았어.
난 너 하나면 충분해.
하나면서 동시에 전부고 최고야.
“…….”
나탈리의 말처럼 아이가 여럿 있는 집은 더 행복할까.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겠지.
그 남자도 막상…… 제 아이를 보면 달라질걸,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으면 또 얼마나 예쁘겠어.
잠이 오지 않는다.
문득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실컷 울면 차라리 편해질지도 모르는데.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바보같이 헛웃음이 나온다.
아마 뉴욕에서 너무 많이 울었기 때문일 거야.
어떻게 사람의 눈이 그렇게 많은 눈물을 만들어 내는지.
울면서도 놀랐으니까.
나중에는 소리도 없이 울었다.
그냥 소리 없는 눈물이 내내 뺨을 타고 흘렀다.
권재하는 막 약혼식을 끝냈을 때였으니까. 기념 여행이라도 갔었을까.
그때는 그를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죽어버린 내 아이.
다시는 가질 수 없는 내 가족.
피를 나눈 가족을 평생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고단하던 윤은조의 인생이 드디어 끝났다고 확신했다.
끝낼 생각이었다.
그 대단한 약혼식장에는 초대장 없이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안 보는 게 차라리 나았었을 그 장면을, 왕나나 덕분에 보게 되었다.
멀리서 그를 보았다.
완벽한 황태자의 모습으로 미래의 신부에게 미소 짓는 그 얼굴.
불과 한 달 전 그 미소는 윤은조를 향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권재하가.
옆에 서 있는 왕나나의 입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호텔 밖으로 미친 사람처럼 뛰쳐나왔고.
코너를 돌던 차에 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