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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키스가 아닌 악수를 나누었다 (33/100)


33. 키스가 아닌 악수를 나누었다
2022.09.22.


그날 밤.

은조가 떠나버린 오크트리 하우스에는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내내 입을 다문 채 와인만 마시는 재하를 바라보던 나탈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알아, 내가 좀 과했어.]

[그랬지.]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됐어, 좋고 나쁘고 그런 거 없어.]

[사람이 어떻게 기분이 좋고 나쁘고 그런 게 없어?]

[난 그래, 와이즈먼. 대단한 알렉시스거든.]

희미한 비소를 머금은 재하는 실제로 기분이 특별히 나빠 보이는 건 아니었다. 목소리도 담담하다.

하지만 그를 감싸고 있는 공기가 무거운 것은 사실이었다.

와인대신 차를 마시고 있던 나탈리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허리를 곧게 폈다.


[……카일 그게 있잖아- 우린 거짓말을 너무 오래 끌었어. 6년이면 길어도 너무 길었다.]

[그래서 왔구나. 이제 그만 끝내자고.]

[맞아. 할아버지는 오래 못 버티셔. 돌아가시기 전에 전부 말할 거야.]

[솔직한 게 반드시 좋은 건 아니라는 거 알 텐데.]

[아니, 솔직한 나를 다 알려 드릴 거야. 그게 맞아. 그리고 너도 이제 좀 솔직해졌으면 좋겠어. 그 여자, 은조 맞지?]

[무슨 소리야.]

[네 가슴 속에 숨겨둔 여자 말이야. 왜 스스로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아?]

[숨겨? 내가 뭘 숨기고 그러는 인간 못 된다는 거 알잖아. 그리고 감정이 있었다 한들 다 과거야. 아주 오래전 일이라고. 만족해?]

[와, 카일- 이제야 약간이나마 솔직해지네. 그런데 말이야, 그녀가 저렇게 예쁘게, 그것도 현재 진행형으로 네 옆에 있는데 지난 일이야? 혹시, 그녀의 아이 때문이라면.]

[그건 아냐.]

[우린 진짜 친구잖아. 난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을지 모르는 큰 비밀을 너에게 제일 먼저 털어놨어.]

[그리고. 우린 약혼했지.]

[그래 네 덕분에 남자랑 결혼할 일은 피했어. 그건 인정. 게다가 할아버지는 널 좋아하고. 하지만 넌?]

[…….]

[나랑 이렇게 길게 가짜 관계를 유지해서 얻은 게 뭐야.]

[너랑 마찬가지야, 자유.]

[그래 난 원하지 않는 결혼으로부터 자유로워서 내내 편했어. 하지만 너는 무엇으로부터? 아니, 누구로부터-라고 해야 하나.]

[…….]

[카일- 나는 이제까지 본 적 없는, 너의 가장 슬픈 얼굴을 약 15분 전에 봤어.]

[……?]

[맞아, 은조가 집을 막 나갔을 때.]

[헛소리.]

재하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웃었다.


[그런데 사실, 진짜 문제는 네가 아닌 것 같기도 해. 그녀의 얼굴이 왜 그렇게 어둡지?]

[그 이유는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어. 나한테 빚을 많이 졌거든.]

[어떤 빚? 심리적? 아니면?]

[양쪽 모두.]

[오, 카일- 너 혹시…….]

[그만 자야겠어. 먼저 올라갈게.]

자리에서 일어선 재하는 마시던 잔과 술병을 정리했다.


[카일,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그리고 나는 뉴욕으로 돌아가는 대로 커밍아웃하겠지만 공식적인 발표는 네게 맡길게. 파혼의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어.]

[잘 자.]

 

.
.

행복?

한때 숨 막히게 행복한 시절이 있었지.

아주 짧고 강렬했던 순간순간들.

하지만 충격과 슬픔이 지독하면 지독할수록,

행복이건 사랑이건 그 찬란했던 색은 희미해지기 마련이야.

그러다가 아예 잊히기도 하고…….

6년 전.

한국을 떠나자마자 그는 가장 친한 친구인 나탈리와 약혼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일종의 도피였다.

단 하루라도 빨리 기억에서 윤은조를 밀어내 버리고 싶었던 권재하.

그리고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리기 힘들었던 나탈리.

둘은 약혼을 결정지으며 키스가 아닌 악수를 나누었었다.

금융 재벌과 석유 재벌의 결혼 약속.

양쪽 회사의 주가는 급등했고 두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거짓 약혼에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둘이 결혼을 할 거라고 믿지 않는다.

온갖 추측이 난무했던 시기도 지나갔고, 둘의 관계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한다.

둘 중 하나가 뒤늦게 바람이라도 피웠다면 또 모를까.

재하는 이쯤에서 조용히 약혼 관계를 접어 버리는 것도 자연스러운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자고로 계약이란 양쪽 중 누구 하나라도 유지를 원치 않는다면 파기가 옳은 수순이다.

다만, 그녀에 대한 의리는 끝까지 지킬 생각이다.


“…….”

깊고 고요한 어둠 안에 누워있는 재하는 한동안 잠을 청하지 못했다.

나는 대체 윤은조에게 뭐를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약혼녀를 사랑하는 권재하?

너 아니어도 잘살고 있는 행복한 권재하?

어떻게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너란 여자는 나를 이렇게 천하의 병신으로 만드는지.

내내 눈치를 살피며 도망갈 기회만 노리던 너.

그 당황한 눈동자가, 가냘픈 몸짓들이 아른거리며 욕망을 부추긴다.


“…….”

새장의 문을 열어준다면.

미련 없이 훨훨 날아가 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러라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윤은조에 대해서라면 이유도, 목적도, 심지어 결과까지도.

고장 난 두뇌가 멋대로 작동한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도리가 없다.


 

***



[내일 또 볼 수 있나요? 난 이렇게 당신과 작별할 수 없어요, 이제 우리 친구 맞죠?]

나탈리는 끝까지 상냥했지만, 그녀의 말과 행동에 대해 재하는 수차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렇게들 시작하지. 대부분의 수컷들도 보통 우리는 이제 친구죠-라고 하고 며칠 뒤에는 불쑥 입을 맞추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조용하고 햇살이 가득한 옥상정원 벤치.

홀로 앉아 있던 은조는 지난 저녁 재하의 말을 생각해 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튼 나탈리 와이즈먼은 정말 괜찮은 여자인 것 같다.

음- 솔직히- 친구로 지낼 마음은 없지만.


“한 일주일 정도. 아니, 한 달 정도- 길게 놀다 가면 좋겠어.”

늦잠을 자버린 은조는 회사 생활 5년 만에 처음으로 지각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학생 시절에는 물론이고, 회사 생활에서는 더욱 지각 같은 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큰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막상 해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까지 너무 성실하게 생활해서 그런가.

누가 눈치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어디 아프냐는 소리만 몇 번을 들었다.

괜히 웃음까지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후…… 요새 얼굴이 좀 까칠하긴 해.

은조는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고 차가워진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아이가 있어요? 결혼했다는 얘긴가요?]


[아뇨. 혼자 키우고 있어요.]


[와- 믿기 힘들어요, 은조도 소녀 같은데 엄마라고요? 아이는 몇 살이죠?]


[6살이에요, 한국 나이로는 8살이라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요.]


[힘들지는 않아요? 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정말 대단해요.]


[사실 동생이 같이 살아서 함께 키우는 거나 다름없어요. 여동생요.]


[와! 정말로, 완벽하네요!]

뭐가, 대체 어느 부분에서 그녀는 ‘정말로, 완벽’하다고 느낀 걸까.

어제 일을 되짚는 은조는 다시 몹시도 반짝이던 나탈리의 눈을 떠올렸다.


[나는 아이를 너무너무 좋아해요, 최소 셋, 최대 여섯? 뭐, 그 이상도 괜찮고요.]


[거지 행색으로 떠도는 네가 그 많은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킬 능력은 되고? 커스터드랑 인간 아이들은 달라.]

시큰둥한 재하의 태도에도 나탈리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그건 네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고! 게다가 아이라면 너처럼 삐딱하던 인간들도 막상 자신의 아이를 갖게 되면 눈이 뒤집히던데?]


[놉! 네버. 난 절대 아냐. 얼마 전에도 크게 당했는걸.]

재하의 시선이 와 닿았고 은조의 얼굴은 발갛게 익었었다.

……오늘 저녁에는 불고기를 해서 다 같이 먹어야겠다.

손뼉을 치며 좋아할 다온이를 생각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남아 있던 커피를 마저 마신 은조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햇살 아래 있으니 기분이 좋아지고 몸도 가뿐해지는 느낌이다.

계절은 흐르고, 그 계절 안에서도 날씨는 수없이 바뀐다.

사는 건, 낭떠러지 위에 섰다가도, 이내 기적처럼 폭신한 구름 위를 걷는 것 같기도 하다.

윤은조한테는 그 간극이 좀 심하긴 했지만.

그리고 지금도 지옥과 천국을 쉬지 않고 바쁘게 오가는 중이지만.


“다 지나갈 거야.”

서글펐던 지난밤이 좀 우습게 느껴졌다.

.
.

그렇게 기분 좋게 사무실로 내려온 은조는 다시 작은 지옥과 직면했다.

할 일이 없는 왕나나가 제 책상 말고 은조의 책상에 붙어 있었다.


“점심 어디서 먹었어요? 직원 식당에 안 보이던데.”

누가 보면 친하게 지내는 줄 알겠네- 왜 속삭이는데.


“그거 알아서 뭐하게요.”

“누구랑 어디서 먹었냐고 묻잖아!”

드디어 바드득 이를 갈며 반말을 내뱉는다.

대학 때, 처음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왕나나는 순진하고 착한 소녀 같았다.

언니, 언니 하며 몹시 상냥하게 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가면을 단번에 벗어던지더니 바로 반말을 쏟아냈다.

그리고 살면서 윤은조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온갖 욕설들을 가뿐하게 선사했다.

이유는 오직 권재하였다.


“나탈리 와이즈먼이 온 건 알아?”

“알면요? 반말하지 말아요. 여기 회사예요.”

“맞아, 우리 삼촌 회사.”

“아니죠. 주인이 바뀐 거 왕나나 씨만 모르나?”

“뭐? 이 썅-.”

“왕나나 씨!!”

“제발 헛물 좀 켜지 마! 네까짓 게 애를 쓴다고 될 법한 일이야? 그렇게 당하고도-.”

당해? 은조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헛물은 그쪽이 켜고 있어요. 몇 년째인지는 본인이 잘 알고 있죠?”

“이게!! 확, 그냥!”

“이봐, 왕나나!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갑자기 사나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장 팀장이다. 이제 왕나나에게 씨라는 존칭도 아예 쓰지 않는 그녀다.

방금 전까지 제 삼촌 회사네 어쩌네, 헛소리를 하던 왕나나는 입을 꾹 닫았다.

장 팀장에게는 찍소리도 못하고 애먼 은조만 흘겨본다.

간신히 추스른 기분이…… 다시 흐트러졌다.

***

정말 왕나나가 눈앞에 있는 한 어쩔 수가 없나 봐.

재수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안녕하세요.”

“나, 은조 씨 기다린 건데. 너무 당황하는 얼굴이라 내가 더 당황스럽네.”

자신의 차에 기대 서 있던 상윤이 몸을 바로 세우며 멋쩍게 웃었다.

말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며, 단정한 슈트며.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한쪽 손에 들고 있는 꽃다발이 눈에 거슬렸다.

너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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