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연애해요. 다른 건 나랑 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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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연애해요. 다른 건 나랑 할 거니까
2022.09.26.
“아, 이건 아닌데.”
역시 회사 정문 앞에 차를 대기시키고 있던 마 실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커다란 꽃다발을 든 남자가 연신 자동차 유리에 제 모습을 비춰 볼 때 느낌이 딱 안 좋더라니.
하필 그 꽃다발의 주인이 윤은조 씨여서 그랬군.
마준희는 은조에게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고 있다.
본인이 한사코 다온이 엄마, 혹은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한 게 제일 큰 이유였고.
무엇보다 권대표와 윤은조, 다온이까지 세 사람의 관계가 꽤 애매모호하다.
고용주 권재하에게 미국인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사전 조사로 미리 알았다.
하지만 경제력이 있는 남자들 중에는 사모님이 하나가 아닌 경우도 많았다. 경험상 봤을 때.
같이 사는데, ‘사모님’은 아니고.
아이는 있는데, 아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권재하 대표가 자신을 고용한 이유는 그 활활 타오르는 눈빛만 봐도.
뭔지 딱 알겠고.
“나 원 참.”
직함이 실장이지 경호업체 [퍼스트]의 대표나 다름없는 마준희는 프로페셔널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상대방이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질문은 절대 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매너는 ‘모르는 척해주는 매너’다.
이 두 가지 원칙을 지킨 것이 [퍼스트]가 고위층을 상대로 높은 신뢰와 지명도 쌓은 여러 이유 중 하나다.
그런데. 감성이란 단어와 담을 쌓고 산 지 어언 20년.
태권도, 합기도, 공수도, 검도 기타 등등 무술 도합 18단의 마준희가.
흔들린다.
회까닥, 사랑에 눈이 먼 고용주에게 과연 이 사실을-
“보고해야 돼, 말아야 돼.”
모르는 게 약인가? 아는 게 힘인가……?
사랑은 역시 마준희에게는 힘들다. 애가 셋인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래도 저 큰 꽃다발은 너무 과해.
좋아라 할 여자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을 게 확실하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윤은조 씨에게?
아니나 다를까, 저를 힐끗 쳐다본 그녀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준희는 기다리겠다는 뜻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
“갑자기 저를 왜…….”
“별거 아니고 근처에 맛집 있는데 같이 가서 밥이나 먹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별거 아니라고 하기에는, 꽃다발이 너무. 은조는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
“정 별로면 그냥 갈게요, 상관없어요. 근데 이거는 받아요. 예쁜데 버리긴 그렇잖아.”
그가 웃는다. 애써 괜찮은 척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예전에도 은근히 순진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휘둘리기 쉬운 사람인 것도 같았고.
은조는 상윤이 내미는 꽃다발을 받았다.
그래, 예쁜 꽃이 무슨 죄야.
어차피 한 며칠은 휴가나 다름없으니 휴가답게 보내지, 뭐.
지인과 밥 한번 먹는 게 대수겠어.
권재하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니-라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유는 외면하고 싶었다.
“잠시만요.”
상윤은 총총걸음으로 멀어진 그녀가 검은 정장의 여자와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요, 밥 먹어요.”
“정말?”
활짝 웃는 그가 조수석 문을 냉큼 열어준다.
마치 그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태우고 싶은 것처럼.
***
‘오카네 일식.’
상윤이 은조를 데려간 곳은 회사에서 멀지 않은 요릿집이었다.
꾸덕꾸덕한 보리굴비로 유명한 50년 전통 일식집. 두 사람은 프라이빗한 개별 룸으로 안내되었다.
그에게 메뉴선택을 맡긴 은조는 통창 밖으로 보이는 일본풍의 정원을 바라보며 식전 차를 마셨다.
“은조 씨,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우리 예전에도 같이 서너 번 밥 먹었는데. 해산물 좋아한다고 했던 거 나 기억해요. 여기도 그래서 골랐고. 숙성회가 정말 끝내주거든.”
“거의 하윤이랑 같이 먹었죠. 해산물을 좋아하는 건 맞아요. 회 좋아하세요?”
“좋아하죠. 이렇게 좋은 사람이랑 맛있는 거 먹으면서 달달한 사케 한잔하면 최고 아니겠어요. 아, 사케도 시켰는데 괜찮죠?”
“네, 좋아요.”
“많이 먹는 스타일 아니잖아요. 일단 제철 사시미로 가볍게 시작하고 초밥 나오면 따듯한 사케 한잔씩 해요.”
“네.”
은조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혹시나 했던 우려와 다르게 신사적이고 깔끔한 상윤의 태도에 마음이 놓였다.
거의 음식과 일상에 대한, 부담스럽지 않고 가벼운 이야기가 오고 갔다.
식전 입맛을 돋우어 줄 샐러드와 해초 모둠이 금방 나왔고, 일본식 푸딩 계란찜 차완무시까지 차례로 제공이 되었다.
“천천히 즐겨요. 맛있네.”
음식을 천천히 먹는 은조에게 속도를 맞추는 상윤은 별말 없이 가끔 흐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끄덕여 보이곤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래전에도 먼저 선을 딱 긋고 필요 이상 냉담하게 군 건 저였다.
상윤은 단 한 번도 미심쩍은 행동을 하거나 찜찜한 행동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과외가 있는 날이면 학교에서 최대성의 집으로 상윤이 제 차를 이용해 데려다준 적이 꽤 있었지만.
신경 쓰이는 건 [어떻게 같이 와?] 라고 물으며 눈을 치뜨는 이혜정.
혹은, 놀라울 정도로 질투가 심한 권재하였다.
“…….”
참치의 붉은 속살, 아카미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은조는 술잔을 채워도 되겠느냐는 상윤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거 굉장히 은은한데 단맛은 또 어찌나 부드러운지 말 그대로 술술 넘어갈 거예요.”
“잔 안에 금가루 보이죠? 고게 99.99%의 순금이 들어간 거라고 하더라고요. 마시면 복이 온다나 뭐라나- 하하- 기분 좋게 마시기라고 하는 소리겠지만, 나쁘지 않죠?”
말이 별로 없는 은조를 대신해 그가 노력하는 것이 느껴졌다.
문득 그가 오래전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씁쓸하게 흘렸던 개인적인 이야기가 생각났다.
“…….”
부모님들의 사이가 엉망이고, 그들과 자신은 더 엉망이라고.
부모가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가 중요한 거라고.
하윤이는 신기하게 저 혼자 알아서 잘 컸다고, 은조랑 비슷하다고.
갑자기 너무 대단한, 굉장한 아버지와 조부모를 만난 권재하가 생각났다.
……역시 들어오라 마라 메시지도 없네.
“소주도 한잔해요.”
“좋죠.”
상윤은 바로 직원을 호출했다.
머리 띵할 정도로 차가운 소주와 뜨끈하게 끓여서 나온 얼큰한 광어 매운탕이 다음 차례였다.
예상과 다르게 술이 술술 넘어갔다.
기분이 조금씩 좋아졌다.
나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여자로서 얼마 만에- 데이트라면 데이튼데.
……데이트라니.
쓴 소주를 연달아 넘긴 은조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
같은 시각.
마지막 서류의 검토를 끝낸 재하는 날인을 마치고 노트북도 닫았다.
나탈리 와이즈먼은 떠났다.
그녀는 비무장지대(DMZ·Demilitarized zone)를 시작으로 경주시 불국사, 양동마을까지의 긴 여행을 이미 시작했다.
아침 인사. 아니, 작별 인사도 간단한 쪽지로 대신한 그녀는 냉장고를 거의 털어서 재하의 집을 나갔다.
아마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한참은 그녀를 볼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재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어딥니까.]
[지인분과 저녁 식사 중이십니다.]
지인? 지인 누구?
[당장 사진 찍어 보내세요.]
드디어 재하는 원래의 제 모습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아래에 두고 부리는 사람이건 누구건, 저를 어떻게 보고 감히 평가를 하든 말든.
동거녀에게 집착하는 미친 스토커로 보든, 정신이상자로 보든 전혀 신경 쓰지 않기로.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권재하답게 .
마지막 서류를 검토하던 도중 윤은조와 차상윤이 지난 6년 동안 어떠한 관계도 없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마음을 편안하게 먹으려 했건만.
마 실장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직감적인 불안감이 마음을 뒤덮어버렸다.
“고새를 못 참고 또 나를 휘젓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중얼거린 순간,
은조와 문제의 ‘지인’ 차상윤이 찍힌 사진이 들어왔다.
차량 번호 [00두 1027]
두 분은 현재 일식집 ‘오카네 일식’의 프라이빗 룸에서 식사 중이십니다.
일식집 주소까지 차례대로 재하의 휴대폰을 흔들었다.
그의 눈빛도 요동쳤다.
이거 꽃이야? 하! 꼴값을 하네, 아주.
재하의 손가락이 다급하게 인터폰의 버튼을 두드렸다.
“정문에 차 대기시켜요. 당장.”
***
재하는 미친 사람처럼 차를 몰았다.
비상등을 깜박이는 고가의 수입 세단이 곡예를 하듯 이리저리 차선을 바꾸었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그 새끼 낯빛이 어떻게 바뀔지 몹시 궁금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들려줘야 재미가 최고치에 이르려나.
분노와 기대감이 뒤섞였고, 끓어오르는 피가 전신을 휘감으며 흥분을 부추겼다.
***
취기가 오른 은조는 직원이 들어온 줄 알았다.
안녕하십니까- 묵직한 음성과 동시에 퍼진 그의 향기를 알아채기 전까지.
“뭐죠?”
낯선 남자의 등장에 상윤은 목소리에 날을 세웠고 은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집 나간 내 고양이가 여기 있다고 들어서.”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잡고 앉는 재하에게 은조가 당황한 눈빛을 보냈다.
“바쁜 거 아니었어? 나가, 나가서 얘기해.”
“바빠도 밥은 먹어야지. 밥을 해줘야 할 사람이 이렇게 제멋대로 굴어서야, 원.”
앉아- 낮게 혀를 찬 재하가 은조의 손목을 잡아 다시 의자에 끌어 앉혔다.
“이건…… 너무 무례한 거 아냐.”
“나더러 하는 소리야? 네가 허투루 쓰는 이 시간이 누구 것인지 잊었나.”
“이게 다, 무슨 소리예요, 은조 씨.”
“이게 다 우리만 아는 소립니다 차상윤 씨. 그쪽도 알고 싶어요? 그럼 오늘 내 밥값도 그쪽이 내는 겁니다.”
재하는 은조의 술잔을 제 앞으로 놓더니 소주를 채웠다.
“잠깐만, 나 그쪽 기억났어요.”
“그 기억력 한번 빠르고 대단하시네.”
“알렉시스! 블랙스톤 파트너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낫죠? 게다가 나는 8년 전과는 달라진 것도 별로 없는데.”
“아, 그래, 우리 학교!”
“잠깐 다녔죠. 배운 건 아주 크고 값진 거지만.”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은조의 손목을 재하가 그러잡았다.
“앉으라고, 나 이제 시작했어.”
얼떨떨한 상윤이 은조의 눈치를 살피는 그때, 재하가 선심 쓰듯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둘이 연애라도 할 건가- 조소를 머금은 입매가 비틀렸다.
“연애해요. 다른 건 나랑 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