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스물셋. 스물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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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스물셋. 스물넷.
2022.09.29.
[당장 학교 그만두고 미국 가자.]
[……뭐?]
3학년 2학기.
기말 시험을 앞둔 어느 날, 은조는 집에 늦게 들어왔다.
오후에 하윤이 과외가 있는 날이었고 이후부터 죽 도서관에 있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온 그녀를 보자마자 재하가 뱉은 소리였다.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잔뜩 얼굴을 구기고.
미처 신발을 벗기도 전이었다.
[데리러 오겠다는 거 또 거절해서 이러는 거야? 버스 타도 겨우 10분이잖아. 그리고 다짜고짜 학교를 그만두라니?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해?]
[생각 없이 한 소리로 들려?]
[…….]
[학교야 미국에서 다니면 되지. 네 성적 정도면 이 학교보다 훨씬-.]
[아니, 잠깐만. 말로는 너무 쉽고 간단한 것 같지만 이건 너무 급한 거지. 그러니까, 좀 생각을 해보고 결정해야 한다는 얘기야.]
[나는 충분히 생각했다고! 너도 같은 생각일 거라고 믿었는데, 아냐?]
이제 막 스물넷이 된 권재하는 팔짱을 단단하게 낀 채로 성마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잘 다니던 학교를 전부 정리하고 너를 따라서 미국으로 가자고? 권재하!]
[그냥 가자는 게 아니라 미국에서 결혼하자는 거야, 은조야. 난 계속 네게 같은 얘기를 되풀이하고 있었어.]
[나는 이제 겨우…… 스물세 살이야. 너도 그렇고 우리는 결혼하기에…… 너무, 어려.]
[나이가 중요해? 미국에서는-.]
[그건 그들의 얘기고! 나는 결혼 같은 거,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당장 학교 다니고 공부하고…… 먹고사는 것만으로도 벅찬 게 내 현실이었어. 알잖아.]
[그래서 내가 이렇게 네 곁에 있잖아. 대체 뭐가 문제야? 싫다는 소리야?]
아무 능력도 없으면서 무작정 그에게 계속 기대고 의지하라는 말을.
낯이 얇은 은조로서는 단박에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뭐가 문제냐고? 전부…… 문제지.]
[그럼 이제껏 무슨 생각으로 밤이고 낮이고 나랑 함께한 거야? 그저 재미야? 재미만 보기에는 충분한 나이라는 얘기인가?]
[권재하!]
[재미는 나랑 실컷 보고, 그럴듯한 양친 부모 있는 그 새끼는 잘 묵혀둬 보겠다는 건가?]
[……뭐? 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면, 이미 그 새끼랑도 재미 봤…….]
짝!
은조의 손바닥이 재하의 뺨을 치고 붉은 흔적을 남겼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슨 신호라도 받은 사람처럼 더욱 뜨거워진 숨을 몰아쉬며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
[권재하…… 말, 함부로 하지 마.]
[내가 그 새끼보다 못한 게 뭐야. 나랑 있을 땐 숨넘어갈 것처럼 내 이름을 불러대면서 침대 밖에서는 또 다른 생각으로.]
[그만!]
다시 한번 제 뺨을 향해 날아오는 은조의 손을 재하가 낚아챘다.
[어딜…….]
[놔! 놓으라고! 놓……!]
커다란 한쪽 손만으로 가녀린 두 손목을 꼼짝도 못 하게 그러쥐고는 아주 쉽게 입술을 부딪쳐왔다.
바동거려봤자 가는 허리를 꽉 휘감은 단단한 팔은 더욱 조여들며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뿐이었다.
거칠고 뜨거운 입맞춤이 잠시 사그라지는가 싶으면.
[얼마나 더…… 확인시켜줘야…… 말을 들을래. 응?]
어느새 부드러워진 재하의 손이 은조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향기로운 목덜미며 귓가에 입술을 누르고, 안타깝고 애타는 숨을 토해내며,
[…….]
제 것을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어린애처럼 어찌할 바를 몰라 몸을 떨었다.
[너…… 이렇게 사람 돌아버리게 만드는 눈을 뜨면서…… 어?]
[……안아 줘, 재하야.]
안아 줘- 이번에는 은조가 먼저 입술을 열었다.
자유로워진 팔을 재하의 목에 감으며 매달렸다.
제게서 떨어져 나간 뜨겁고 부드러운 입술을 찾아, 몹시 조급하게 붙들고 늘어졌다.
그렇게 또 서로를 태워버릴 것처럼,
세상의 끝에 선 것처럼 사랑을 나누었다.
그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점점 커지는 갈등과 대립은 매번 격렬하게 서로를 탐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결론 없이 제자리를 맴도는 모양이었다.
그 뒤에 남는 의문은 항상 은조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큰 걸림돌이었다.
재하와 제가 나누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서로를 향한, 처음 알게 된 육체적 갈망일 뿐인지.
정말 그 듣도 보도 못한 ‘사랑’이란 것인지.
흐트러졌던 이성이 돌아올 때면 생각했다. 사랑한다고 말해주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같이 차를 마시며 비오는 창밖을 바라보다 갑자기.
혹은 함께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간 길 위에서 아무렇지 않게.
……아니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서로를 바라보다 문득.
그렇게 좀 더 가벼웠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고.
권재하가 보여주는 방식은…… 혼란스럽고 힘들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그녀에게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환희와 두려움을 동시에 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스물셋, 스물넷.
두 사람은 너무 어렸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 줄 정도의 여유가 없었다.
쉽게 제어가 안 되는 달뜬 감정을 다스리는 것에도, 한발 뒤로 물러서는 것에도 당연히 미숙했다.
갈등의 골은 소리 없이 각자의 해석으로 깊어졌다.
그 중심에 ‘차상윤’이 있었고.
차상윤 뒤에는 왕나나가 있었다.
상윤은 하윤이가 아파서 병원에 갔다는 이야기를 자동차를 출발시키고 나서야 했다.
놀란 은조를 안심시키고 자연스럽게 유명한 케이크 집으로 데리고 갔다.
[잘됐다! 그럼 오늘 은조 언니 미뇽에 좀 데려가. 그 집 케이크 완전 좋아하거든.]
왕나나의 그림이었다.
단단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은 어리석은 것. 천하의 권재하도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그 생각이 맞았다.
나나는 미국에서 온 친구들을 프랑스 전문 제과점 ‘미뇽’으로 불렀다.
그리고 잠시 얼굴만 비치려고 그곳에 들른 재하는 상윤과 함께 있는 은조를 보고 말았다.
놀라고 당황한 은조와 다르게 재하의 반응은 냉담하다 못해 담담했다.
알은체는 물론 눈길조차 주지 않더니 느긋하게 차 한 잔을 비우고 유유히 떠났다.
하지만.
그날 밤, 그는 말 그대로 최후통첩을 내렸다.
은조의 눈앞에 비행기 티켓과 반지가 놓였다.
[갈 건지 말 건지 당장 정해.]
[당장이라니. 낮의 일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오해야!]
[…….]
[결혼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너는 가족들도 있잖아! 어른들!]
[이건 내 일이고 내 결정이야.]
[네 일? 네 결정? 나는? 너, 아주 독단적이고…….]
[좋은지 싫은지만 말해.]
[…….]
너무나 혼란스럽고, 두려웠다.
슬픈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 좋아’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면 내가 널 찾아서 미국으로 갈게.
그런데…… 그때까지 네 마음이 그대로라는 보장이 있을까.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그의 눈동자 아래에서, 은조의 떨리는 입술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
재하가 잡고 있던 은조의 손을 놓아버렸다.
[충분히 알았어.]
[아니…… 너는 여전히 아무것도 몰라. 이해하려는 마음도 없고.]
[화요일 오후 비행기야. 그때까지 나는 호텔에서 지낼게.]
[…….]
그는 그렇게 등을 돌렸고, 다음 날 아침 은조는 주인 없는 방 앞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상실감은 예상보다 훨씬 혹독했다.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어 놓았던 선.
그 밖으로 잠시 발을 디뎠는데. 대가는 상상보다 비참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생각 없는 여자처럼 따라갔어야 했나.
수없이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반복했지만 여전히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 기말고사를 치른 후,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임신.
그를 찾아가야 할 이유가 너무 빨리, 쉽게.
너무 가슴 설레게 찾아와 버렸다.
***
“연애해요. 다른 건 나랑 할 거니까.”
“다른 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는 상윤.
비소를 머금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재하가 다시 소주를 들이켰다.
“일일이 설명해야 되나. 연애보다 훨씬 찐한 거.”
“상윤 씨, 오늘 정말 죄송해요. 저 먼저 일어설게요.”
결국 은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는 재하에게 물 잔이라도 던질 것 같았다.
정신없이 일식집을 빠져나오던 그녀는 갑자기 올라오는 취기에 비틀거렸다.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바닥이 흔들린다고 느낀 순간, 허리를 감싸는 손길.
“조심해야지.”
재하였다.
은조는 있는 힘껏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이거 치워! 그 입이나 조심해! 놔!”
“고새를 못 참고 누구 맘대로 저 새끼랑 밥을 먹어.”
“무슨 헛소리야! 내가 그럼, 그 집으로 또 갔었어야 해? 나한테 대체 왜 이래?”
“아! 내 생각해서 여기 계셨다? 뭐, 내가 오붓한 시간 보내면 너도 오붓한 시간 보내시게요?”
“내가 여기 있는 거는 어…….”
멀찍이서 허리를 숙여 보이는 마 실장이 은조 눈에 들어왔다.
“윤은조 씨. 나 되게 많이 참고 있는 거야, 아주 여러모로. 알아먹었으면.”
당장 따라와. 턱짓으로 차를 가리킨 그가 먼저 걸어가더니 자동차 뒷좌석 문을 열었다.
하지만 고집스럽게 입술만 짓씹고 서 있는 은조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택시 타고 내 집으로…… 아악!”
맹수처럼 소리도 없이 빠르게 다가온 재하가 은조를 제 어깨 위로 둘러멨다.
아아악-!
반항기 어린 비명은 자동차 안으로까지 이어졌다.
“취했습니다. 출발하시죠.”
“맞아요! 나, 취했어요! 마 실장님, 난 취했고 이 인간은 미쳤어요! 차, 세워 주세요! 당장 내릴 거야!!!”
“미친 소리로 들었나. 진심이야, 연애해! 멋대로 해봐! 같이 손잡고 지옥 끝 어디까지 떨어지나 한번 가보자고.”
“내가…… 내가 왜 너랑 손잡아? 지옥? 내 지옥은 너야! 정말이지…… 소름 끼치고, 너무 창피해!”
“누구한테, 마 실장님? 아니면 네가 버리고 온 저 새끼? 하!”
“아아아악!!!”
정말 술기운에 제정신이 아닌 걸까.
은조는 말아 쥔 작은 주먹을 재하를 향해 마구 날렸다.
“차상윤 씨가 너란 인간보다 백 배. 아니, 천 배는 나아! 인간적이야, 최소한!”
“인간적?”
“그래! 인간적!”
같잖은 솜방망이 질에 마냥 가슴팍을 내어주고 있던 재하가 은조의 양 손목을 틀어잡았다.
“내가 지금 얼마나 안간힘을 다해 참고 있는지 조금 있다 알려줄게.”
집에 가서 말이야. 우리 집.
아주 인간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