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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이미 미친 거나 다름없어 (36/100)


36. 이미 미친 거나 다름없어
2022.10.03.



 
흰색 세단이 오크 하우스 전용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동시에 자동차 뒷좌석 문이 발칵 열리더니 은조가 튕기듯 차에서 뛰어내렸다.


“거기 안 서!”

마찬가지로 거칠게 문을 여닫은 재하가 그녀의 뒤를 급하게 쫒는다.


“좋은 밤 보내십쇼.”

좋을 때다, 모르고 저러면 더 좋지, 아마. 혼자 작별 인사를 남긴 마 실장은 차를 출발시켰다.

룸미러로 애증의 달음박질을 하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생겨났다.

.
.

급히 뛰어다닐 일.

특히 도망이라는 단어와 생전 연관이 없었던 윤은조는.


“아앗!”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하고 재하의 품에 안긴 꼴이 되고 말았다.

그에게서 잠시 해방된 기념으로, 아침에 반갑게 골라 신었던 굽이 높은 예쁜 구두.

그 덕에 발목이 삐끗하여 넘어가는 것을 재하가 냉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술에 취해서 아주 장난질이 하고 싶어 죽겠지?”

“…….”

“괜찮아? 어디 좀 봐. 완전히 꺾인 것처럼 보였는데.”

한쪽 무릎을 접고 앉은 그가 마음대로 은조의 가는 발목에 손을 댔다.

중심을 잡으려 반사적으로 넓은 어깨를 손으로 짚은 은조는 얼른 잡힌 발을 빼냈다.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다고…… 너, 꼴도 보기 싫어.”

“다시 안아 줘?”

“아니!”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거리며 몸을 사리고 있던 그녀는.

딩-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재빨리 올라탔다.

현관에 도착해서는 문이 열리자마자 두 번째 도망을 시도했지만. 역시나 여의치 않았다.


“어딜.”

그녀의 팔꿈치를 움켜잡은 재하가 진한 눈썹의 끝을 치켜세우며 가볍게 혀를 찼다.


“자동차는 모르겠지만 방문 정도는 부숴버릴 수 있어.”

“뭐? 어쩐, 다고?”

안 그래도 큰 눈이 더욱 크게 벌어졌다.


“거칠게 놀자는 거면 장단을 맞춰주겠다는 얘기야.”

“제발-.”

“그래, 제발- 시작할까?”

“아니! 제발 좀 이러지 마. 노예처럼 사는 것도 간신히 견디고 있다고!”

“그래서.”

“차상윤 씨도 그렇고 마 실장님도 그렇고, 사람들 앞에서 나 바보 만들면 행복해? 즐거워? 이러면 혹시 내 일당이 더 올라가나? 그렇다면 상관없고.”

“내가 우리 은조랑 행복하고 즐거울 게 뭐가 있을까. 쉽고도 편하게 가는 방법에 대해서 몇 번이나 말했는데.”

너무 돌려 말했나보다, 나답지 않게-

또, 또, 그 특유의 눈꼬리를 한껏 내려뜨리는, 상대방을 봐준다는 식의 미소가 번진다.

미소지만, 미소가 아닌 그거.


“……!”

뒤로 물러서려던 은조는 갑자기 휙, 끌어당기는 힘에 이끌려 오히려 앞으로 몇 걸음을 다가서고 말았다.


“그러니까 나한테 돈을 더 내놓아라–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더니, 딱 그 경우네.”

“……그런 거 아니잖아. 괜한 억지 좀 부리지 마.”

“제발 도와 달라고, 뭐든 다 하겠다고 설설 길 때는 언제고 이제 아주 배 째라는 식이야. 염치도 없지.”

“…….”

“됐고, 말해 봐. 그래서 할 거야, 그 연애? 혹시, 이미 시작된 건가?”

은조는 제 팔꿈치를 쥐고 있는 손아귀에 은근하게 힘이 더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선심이라도 쓰듯 연애하라고 먼저 말한 게 누군데.


“하든 말든! 내 시간을 산 거지, 나를 산 거는 아니잖아!”

“그래서, 계속 지껄여 봐. 듣기 좋다, 아주.”

정말 듣기 좋은 노래라도 듣는 것처럼 그가 내리깐 눈을 두어 번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연애도 차상윤 씨랑 할 거고, 다른 것도 차상윤 씨랑 할 거야! 됐어?”

“뭐? 방금 그 X끼 이름을 대체 몇 번이나 그 입에 담은 거야.”

응……?

연애가 어쩌고 하지 않았나. 뭐라는 거야.

하…… 그냥 윤은조가 무얼 하든, 어쩌면 숨을 쉬는 것조차. 권재하에게는 비위가 뒤집히고 아니꼬운 일인가 보다.

두통이 오는지 무거워진 머리를 느낀 은조는 눈살을 찌푸렸다.


“몰라! 더 진한 거, 그거! 차. 상. 윤. 씨랑 하겠다고!”

“씨- 씨- 꼬박꼬박 잘도 붙여. 너, 나 가지고 노는 거지.”

“……?”

“그렇잖아. 아주 그냥 깜찍한 소리만 지껄이는 게 나를 돌아버리게 만들려고 작정했잖아, 지금.”

“놔, 아파.”

은조가 잡힌 팔을 흔들었지만 놓아줄 리 만무하다.

오히려. 거칠어진 숨을 고르는지 팽팽하게 당겨진 드레스 셔츠 아래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

이건- 위험해- 아주 위험한 신호라고 느낀 순간,

재하의 커다란 한쪽 손이 은조의 가느다란 목을 감쌌다.


“그 새X랑 그게 가능할까, 진심으로?”

“그딴 게 왜 중요해. 진심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그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는가 싶더니 천천히 뒷덜미로 옮겨갔다.

그 느릿하고 여유 있는 움직임이 숨통을 조이겠다는 뜻이 아님을 안다.

긴장을 풀고, 저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는 무언의 압박, 혹은 유혹이다.

이제 딛고 서 있는 바닥이 흔들리는 건 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먼 기억 속에 밀어 넣어 두었던 감각을 일깨워버린.

남자의 관능적인 향기.

그것을 들이마시고 있던 은조는 따듯하고 커다란 손이 주는 저릿한 압박감에 서서히 무너지는 자신을 느꼈다.


“은조야, 난 지금 이 속에 있는 마음 따위를 논하는 게 아냐.”

그가 긴 검지로 제 가슴을 쿡쿡 찔렀다.


“…….”

“하찮은 마음보다 더 순수한, 욕정에 대해서 말하는 거야. 거짓으로 포장하거나 꾸밀 필요 없는.”

“…….”

“몸으로 나누는, 더할 나위 없이 솔직한 그 진심 말이야.”

“…….”

“예전에 우리가 참 많이도 나누었던 그거.”

“지난 얘기…… 하지 마. 신물 나.”

“그럼, 다 지난 얘긴지 아닌지 같이 알아볼까.”

“뭐?”

“누구 말이 맞는지 알아는 봐야지. 성가시게 이런 유치한 짓거리를 또 할 게 아니라면.”

부드럽게 뒷덜미를 문지르는 손도 뿌리치지 못하는데.

다른 한쪽 손이 마저 시야로 들어왔다.

단단하면서도 섬세한 엄지손가락이 살짝 벌어진 분홍색 입술을 지그시 뭉개듯 쓸었다.


“…….”

“은조야…… 참을만해?”

뿌리쳐야 하는데…… 뿌리치고 싶은데…….

그 마음을 배신하는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

“맞아, 나도 그래.”

“…….”

“나도 비슷해 너랑. 너무 힘들어.”

“…….”

눈앞에 어려 오는 재하의 미소가 어렴풋하다고 느낀 순간, 이마가 맞닿았다.

두 사람의 숨결이 바로 엉겨들었다.


“잘 모르겠지, 자꾸 헷갈리고 골치 아프지? 그러니까 확실하게 해두면 좋잖아.”

“그만 놀려…… 나 어지러워.”

“나도 어지러워. 미치고 환장할 것 같아.”

“넌…… 이미 미친 거나 다름없어.”

“나만? 넌 아니라는 거 증명할 수 있을까.”

증명해 봐, 은조야. 제발-

순식간에 아래로 내려온 입술이 다른 입술의 끝을 아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너무 짧아서. 더 미칠 것 같이 강렬했다.

두 눈을 꾹 감은 은조는 저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친 건 나야.

나약하고 한심한 인간은 내가 분명해…….


“이러지 마. 이렇게까지…… 바닥은 아니었잖아.”

은조는 마치 저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재하에게 의지하고 매달린 모양으로, 애처롭게 사정하는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너에 대해서는 항상 바닥이야. 매번 꼭지를 돌게 만들잖아.”

“…….”

“지금도 이렇게, 사람을 홀리려고 눈을 그렇게 뜨고…… 속눈썹을 나비처럼.”

남자의 손끝이야말로 나비 같았다.

은조의 아름다운 눈썹을 덧그린 손끝이 뺨을 따라 미끄러지더니 가늘게 떨리는 턱을 들어 올렸다.

장난- 혹은, 치기 어린 감정으로 시작되었던 행동의 색깔은 이미 명백하게 바뀌어 있었다.

욕망 때문에 짙게 가라앉은 남자의 눈빛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제 윗입술을 가볍게 머금은 순간.

은조는 그의 옷깃을 꽉 움켜잡았다.

천천히 감미롭게 움직이는 입술이 제 입술을 전부 집어삼키고, 달래고, 찌르듯 위협하기를 반복했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건 아냐. 더는…… 안 돼.

숨이 막히고 바닥이 출렁거린다.

몸은 남자에게 깊숙이 의지하고 있으면서. 실낱같이 남아 있는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쓸 때.

번개처럼 그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아이…… 내 아이가.”

역시나 그의 입술이 고집하던 자리를 쉽게 떠났다.

언제 뜨거웠나 싶을 정도로 차가워져 버린 눈동자가 사납게 그녀를 깔아 본다.


“…….”

“나, 나는…… 떳떳한…….”

“누구한테 떳떳하게.”

“…….”

예상대로 남자의 붉은 입술이 균형을 잃고 일그러졌다.


“맞아. 내, 아이의…… 아빠.”

툭, 더러운 것 떼어내듯 재하는 은조의 몸을 제게서 떨어뜨렸다.

발목의 통증을 느낀 그녀가 비틀거렸지만 그는 뒤로 더 물러섰을 뿐이다.


“떳떳하게 해봐, 그럼. 다른 일을.”

그는 이미 헐거워진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기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2층으로 사라져 버렸다.

간격을 두고 2층으로 올라온 은조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는 바로 알았다.

드레스 룸이 요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물건들이 떨어지고 부딪치며 내는 둔탁한 소리가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

DL 그룹은 디엘 물산을 주축으로 둔 유통업계 대표기업이다.

창업주의 아들인 왕덕진은 디엘을 자산규모 10조 원 대의 대기업으로 이끈 탁월한 경영인이다.

세상 부러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는 그에게 유일한 아픈 손가락이 있었으니.

바로 막내딸 왕나나.

늦게 본 외동딸이기에 귀한 것이야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지만 제대로 아비 노릇을 한번 못했다.

사업을 확장에만 전념하다 보니 어린 딸이 어느새 스무 살 성인이 되어 있었다.

미운 일곱 살 같은 스무 살.

아비처럼 사업을 하느라 바쁜 어미 이성자 역시 오냐오냐하기만 했지 야단 한번 친 적이 없었다.

매를 들어 가르쳐야 할 일에도 오히려 화려한 선물을 안겨주고 달래는 식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부모는 물론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쇠고집이 되었다.

한마디로 왕나나는 ‘어른아이’다.


“약혼녀가 새파랗게 두 눈을 뜨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안 돼.”

이성자가 팔에 달라붙어 있는 제 딸에게 나름 엄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약삭빠른 나나는 제 어미에 눈에 가득 담긴 안타까움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그 약혼 깨지면. 돼? 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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