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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비밀의 여자 (38/100)


38. 비밀의 여자
2022.10.10.



 
청소를 한다고?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권재하는 종종. 아니, 자주 저만 아는 소리를 한다.

당연히 주변 사람, 특히 옆에서 보필해야 하는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일이다.

핸들을 잡은 강 비서의 눈빛이 조금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힐끗, 룸미러로 말쑥한 모습의 상사를 살폈다.

청소하러 갈 건데 600만 원짜리 최고급 슈트를 입겠다고.

역시 수상해.


“…….”

강 비서는 어제 오후 이연경과 긴 통화를 했다.


[웬일이야, 엊그제 만났는데 또 뭐가 궁금해서.]

시들하게 전화를 받더니 ‘비밀의 여자’라는 소리에 목소리 톤을 바꾸었다.

전화기 너머에서도 그녀의 눈이 번쩍 띄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비밀의 여자는 당연히 보스 권재하의 여자를 뜻한다.

이연경은 가끔 ‘유일무이(唯一無二)’라는 알 수 없는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최측근들조차도 그 실제 여부와 내용을 두고 추측만 하는 게 전부일 정도로 매우 비밀스러운 존재였다.


[나도 알아, 은조 씨. 그런데 넌 어떻게 알았어?]

[나야 미국에서부터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 다만 서울에 들어오고 나서의 일이 궁금한 거야. 무엇인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건 느껴지는데.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도대체 모르겠어. 너, 뭐 알잖아. 아냐?]

[에디, 권재하 옆에 오래 있더니 감이 좋아진 거야? 대단한데.]

[그렇지? 나는 모르는데 네가 아는 거, 그런 게 있을 줄 알았어!]

[음…… 글쎄.]

[지금 망설이는 거야? 왜? 뭐 때문에? 누굴 위해서지? 당장 아는 걸 말해.]

[에드워드 강, 네가 아무리 대단하신 수석보좌관의 위치라고는 하지만 권재하의 사생활까지 전부 알아야 해? 그건 아니지.]

[아니지!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심이야. 공적인 거 말고 사적인 거. 근데 뭐 형하고 나의 사이는 공적이고 사적이고 딱히 그 경계가 애매해진 지 오래야.]

[그만, 에디. 내가 아는데, 그건 분명 너 혼자만의 착각이다. 일과 사적인 관계를 정확하게 구별 짓지 않은 건 별로 좋은 생각이…….]

[그러니까! 비밀의 여자, 유일무이 윤은조 씨랑 현재 어디까지 진행 되고 있는 건데? 재하 형은, 아니- 대표님은 완전히 맛이 갔어! 빼박캔트라고. 네가 그 눈을 못 봐서 그래.]

[흐음…… 역시 예상대로군.]

[이연경!]

[권재하에게 그녀는. 한마디로- 되게 예쁘고, 몹시 예쁘고, 아주아주 예쁜 여자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사실은 너 만나기 전에 방을 하나 만들어 줬어.]

[뭐? 방이라니? 어디다?]

[어디겠니. 그의 집이지. 방을 하나 따로 꾸며 달라고 요구했거든. 가구며 장식은 물론, 심지어 속옷까지 최고로 준비해달라고 했는데- 그게, 나탈리 사이즈가 아니더라고.]

[뭐! 그럼 같이 산다는 얘기잖아!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하냐고!]

[그나저나- 나 빨리 윤은조 씨 다시 만나보고 싶다. 너무 궁금해, 어떤 사람인지.]

[이연경,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오랫동안 봐와서 알잖아. 그 비밀의 여자 일이라면 나의 대표님 몸에서 날카로운 칼날들이 솟아나. 알아?]

[하! 그게 안에서부터 저를 찌르고 나오는 거라서 문제잖아. 몰라?]

[연경아, 와- 표현이…… 안에서 부터, 스스로를 찌르고 나오는 칼날이라니…….]

[근데, 너 왜 꼬박꼬박 연경아- 연경아-야? 내가 니 연경이니? 누나라고 부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먹을래?]

[…….]

[들었니? 에디, 들었냐고!]

[누나, 라고 부를게. 사귀자.]

[냐!!!]

그래서 지난 밤 그는 상사의 지시에 몹시 흥분했었다.

집으로 옷을 가지고 오라는 게 흥분할 일은 아니지만 이미 연경에게 들은 얘기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설마, 설마- 긴가민가했는데…….

현관문을 열고 나온 그 얼굴을 본 순간 평정심을 유지하느라 진땀을 뺐다.

정말. 집에. 들이다니. 대박.

뉴욕에 있을 때 강 비서는 딱 두 번, 그녀의 신상에 관해 재하에게 보고를 올렸었다.

천하의 권재하가, 이유도 목적도 없이 혼자만의 고통에 갇혀 있었다.

저 자신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다 술에 취했던 밤.

그 입에서 결국 서울에 있는 윤은조에 대해 알아 오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잘 먹고 잘살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명령인지 부탁인지도 애매모호하고, 정확하게 무엇이 궁금한 건지 설명도 없었지만.

여자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남자의 눈빛이, 애달프기 그지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소식을 접하는 재하의 태도를 본 강 비서는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강하고 오만한 줄만 알았던 권재하를 가두어 둔 것은.

애정과 증오. 혹은 미련과 원망.

내지는, 그 전부가 엉망으로 뒤섞인 절망의 구렁텅이었다는 것을.


“……대단하네.”

윤은조, 그녀는 한마디로,

권재하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얼뜨기로 만들었던 대. 단. 한 인물인 것이다.

멘사(Mensa)면 뭐하냐고.

머리만 좋으면 뭐하냔 말이야.

You cannot scratch your own back. 제 등도 못 긁으면서-

그래!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는 얘기지. 아무렴.

마침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졌다.

차를 멈춘 강 비서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중얼거리는 것처럼 크게 말했다.


“Real love is a permanently self-enlarging experience- said M. Scott Peck.”

“뭐? 아침부터 무슨 헛소리야.”

보고 있는 태블릿에서 눈도 떼지 않는 재하가 톡 쏘듯 말했다.

큽- 강 비서는 터지려던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윤은조 씨에게 계속 제 할 말을 전하라고 하던 상사가 이제 귀엽게까지 보인다.

유치한데다 귀엽기까지? 역시 사랑은 위대한 게 맞는 거였군.

천하의 권재하를 그렇게 바ㅂ-.


“너, 방금 웃었어. 아냐?”

“진정한 사랑은 영원히 자신을 성장시키는 경험이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모건 스캇 펙 박사는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정신과 의삽니다. 그가 말하길 인간은 용서를 통해서 성장할 수 있고 인격적 성장이야말로 자기 안에서 신을 찾는 길이라고 했죠. 인생은 참 복잡하고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흠흠- 실-연이나 배신, 불륜? 아무튼, 그 모든 걸 한 가지 잣대로 판단하기보다는 크-게 용서할 수 있는 마음. 그것에서 얻어지는 진정한 치유와 인격적 성장을 경험하는 것이야 말로-.”

“그래, 커피부터 경험하자. 저기 들러야지. 난 오늘 샷 하나 더 추가해.”

“넵.”

짧게 대답한 강 비서는 드라이브스루(drive-through) 카페로 방향을 잡았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샷 추가한 에스프레소 도피오 두 잔요.”

넌 단 거잖아- 룸미러 속의 재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사람이 항상 같을 수는 없죠. 대표님도 사람이고요.”

“놀고 있네.”

의뭉스러운 미소를 흘리는 강 비서가 진한 커피가 든 잔을 재하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상사를 어떻게, 어디까지 변하게 만들지 몹시 기대가 되었다.

***

오후에 시작된 회의는 길게 이어졌다.

TF-22(task force-22)는 블랙스톤 한국 지사 대표로 온 권재하가 만든 팀이다.

스페셜리스트만으로 구성된, 한국 중심의 투자를 이끌어 나갈 일시적인 조직이다.


“휴먼텍 보다는 아무래도 A&C바이오(A&C BIO)를 인수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봅니다.”

“단지 한국에서 가장 큰 유전자 검사 업체라는 이유 때문인가요?”

권재하는 책상 위, 가볍게 맞댄 양손을 모아 첨탑 모양을 만들었다.

내로라하는 분석가들의 날카로운 논쟁을 묵묵히 지켜보는 중이다.

그리고 그 귀족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보디랭귀지를, 바로 옆에 있는 강 비서가 지켜보고 있었다.


“A&C바이오의 기존 주주는 부채를 포함해 68억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재협상에서는 62억 달러 정도 예상합니다. 한화로 7조 9,856억 원입니다.”

“나쁘지 않군요. 40억 개 이상의 기록과 등록된 2000만 명의 사용자층을 감안한다면 말입니다.”

대표의 긍정적인 메시지에 분석가 몇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쨌든 길고 지루한 회의가 끝나려면 대표의 의견이 중요하니까.


“1999년에 설립된 회사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유전자 검사 자료가 많습니다.”

“미국처럼 한국에서도 유전학적 계보를 추적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날 겁니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가족병력 유무를 파악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할 회사로 A&C 바이오만 한 곳이 없다고 봅니다.”

“추후 협상에서는 블랙스톤이 지분의 약 75%를 차지하고, 현재 주주 중 김대준 회장에게 나머지 25%를 제시할 계획입니다.”

“좋습니다. 부채를 포함 59억 달러. 우리가 차지할 지분은 78%로 합시다.”

대표의 깔끔한 마무리에 강 비서는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강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던 스페셜리스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재하에게 바짝 붙은 강 비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시간에 딱 맞춰서 가야지.”

“네, 위아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미국 스타일. 알죠.”

“너, 오늘.”

자주 기어오른다- 마치 내 약점이라도 잡은 것 같은 태도네- 재하는 말을 아꼈다.

이래저래 청소를 서둘러야 할 이유만 늘어난다.

쯧.


 

***

Blackstone partners Inc.

핵심 인물은, 카일 알렉시스(회장&CEO), 조나단 D. 데멈(회장&COO).

그리고 카일 J. 알렉시스(부회장& 한국지사 대표).

순이익 22억 6,200만 달러, 자산총액 증가 262억 6,900만 달러?


“이런 뻔한 걸…….”

왕덕진의 매서운 눈초리에 비서실장이 급하게 덧붙였다.


“권 대표는 지난 37년간 그룹을 경영해온 알렉시스 회장의 투자 절차 및 원칙을 제대로 승계했다고 합니다. 대학 시절부터 경영에 참여했으며 투자자와 기업가들에게 명확한 청사진을 제시해 준 사례가 많아 회장을 능가하는 후계자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사생활은? 약혼녀 이야기 말고. 술이나 뭐, 기타.”

“놀라울 정도로 깨끗합니다. 일밖에 모른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흠- 길게 고개를 끄덕인 왕덕진이 시간을 확인한다.


“차 대기시켜. 일찌감치 출발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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