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그녀 집 앞에 처음 보는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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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그녀 집 앞에 처음 보는 놈이
2022.10.13.
“살짝 삐끗했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나중에 만성으로 발전하는 수도 있어요.”
“그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아요. 약간 부어 보이기는 하지만 크게 불편한 것도 없거든요.”
은조는 제 발목에 테이프를 감아주는 여의사의 손놀림을 주시했다.
“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소염진통제를 좀 드리고 갈게요. 말씀대로 아주 살짝 삐끗하신 게 맞기는 한데, 그래도 하루 정도 쉬시는 게 아무래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긴 테이프가 아킬레스건, 복숭아뼈 약간 윗부분을 시작으로 발등, 발바닥, 발등 순으로 감기며 발목을 안정으로 잡아주었다.
느낌에도 단단하게 지지해주는 힘이 생겼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별것도 아닌 걸로 여러 사람 번거롭게 만든다는 생각에 민망하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혹시 더 불편해지시거나 하면 전화 주세요.”
나이 지긋한 여의사는 올 때처럼 조용히 집을 떠났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의사를 집으로 부를 거면 드레스 룸은 왜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건데.
병 주고 약 주고, 뜨거웠다 차가웠다-
윤은조를 애먹이려 하는 게 그의 목적이라면 아주 제대로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예전 그때, 스물둘 철없는 대학생과는 거리가 멀다.
아이를 키운다는 게 어떤 건지 권재하는 감히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이 정도로 의사를 만난다면.
아니, 만난 것도 아니지 집으로 부르다니- 정말 못 말려.
다온이를 키운 지난 6년 동안 몇 번은 저승에 다녀왔을 것이다.
뜨거운 스팀에, 혹은 냄비에 손을 데거나 날카로운 칼에 베이거나.
이렇게 가끔 삐끗하고 넘어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진짜 무서운 건 아이가 이유도 없이 토하거나 열이 오르는- 혹은
은조는 설핏 웃음을 터트렸다.
지난해 봄, 다온이가 태권도 도장에서 넘어져 손목을 다친 적이 있었는데 어찌나 놀랐는지.
전화를 받고 응급실로 달려가면서 기절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정작 아이는 눈물 찔끔 흘리고 내내 씩씩했다.
오히려 뒷걸음을 친 제 잘못이라고 이야기해서 은조를 가슴 뿌듯하게까지 만들었다.
그 귀여운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아이를 이용한 것에 약간의 부끄러움도 느꼈다.
그 남자는 다시 만났던 그 순간부터 내내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증오한다고.
제게 진 감정적 빚을 갚으라고.
손상된 자존심에 대해 몸으로 마음으로 용서를 빌어보라고.
애초에 그에게 6억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안다.
케케묵고 쓸모없는 감정놀음이 필요하다면.
이용당해주는 수밖에…… 현재로선 달리 방도가 없다.
“……집에 가고 싶어.”
너무 단조로운 나머지 심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던 일상이 몹시 그리웠다.
최고급으로 가구들로 채워진 넓고 화려한 주방과 거실.
현재 눈앞에 보이는 것들과 극도로 대조적인, 수수한 제 집이 너무 그리웠다.
비 오는 것처럼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수입 식기세척기에 기대어 있던 은조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2층, 문제의 드레스 룸을 향해서.
.
.
……왜 이래?
문이 잠겨 있다.
손잡이가 옴짝달싹도 않는 게 전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비스듬히 고개를 꺾은 은조는 고급스러운 베이지 골드 컬러의 핸들 아래에 있는 동그란 열쇠구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근 거야, 잠긴 거야.
근처에 혹시 열쇠가 있을까, 두리번거려보았지만 결국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던 그에게 전화를 하고 싶지 않아서- 혹은 바쁠지도 모르니까. 일단 메시지를 넣었다.
[드레스 룸이 잠긴 것 같아.]
“…….”
[잠갔어. 깜박했네.]
-잠그다니? 열쇠는 어디에 있어?
[건드리지 말라고 잠근 거야. 내버려 둬.]
-…….
[니가 내 물건 만지는 거 싫어.]
-…….
[내 물건은 물론이고 나한테도 손대지 마. 당분간.]
당, 분간?
[설마 기억 못하는 건 아니지. 지난밤 내 입술에, 내 몸에 네가 한 짓.]
-그럼 나 출근할게.
.
.
내가 한 짓? 하!
누가 들으면 내가 엄청 꼬이기라도 한 줄 알겠네.
하긴, 계속 이대로 지내다가는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겠어.
윤은조는 거액을 불쏘시개로 쓰고 있는 권재하에게로 달려든 불나방 같은 신세다.
머리는 자꾸 그러지 말라는데 몸은…… 따로 논다.
“후…….”
한참이나 굳게 잠긴 드레스룸 앞에 서 있던 은조는 겨우 자리를 떠났다.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돌고 또 돌아봤자 여전히 원점이다.
출구를 찾아 아무리 헤매도 막다른 골목 뿐이다.
……괜찮아.
어쨌든 우리 민아가 아무 일도 겪지 않았잖아. 곧 임용도 될 거고.
우리 가족은 건강하고 행복해,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거만 생각하자, 윤은조.
***
저녁 7시.
청담동에 위치한 일식당 ‘요코모리’.
외관부터 고급스러운 음식점은 안으로 들어서자 모던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를 보여준다.
특히 한쪽 벽면 전체에 진열된 도자기들은 꽤 품격 있는 장소임을 은근히 드러냈다.
다양하고 독창적인 요리를 경험할 수 있는 일본 요리점의 실내 공간은 대부분 다양한 사이즈의 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왕덕진은 파인 다이닝(Fine Dining), 정식 코스를 즐기려는 손님들 중에서도 VVIP만이 모셔지는 프라이빗 룸에 홀로 앉아 있었다.
“이런 데는 또 처음이네.”
아직 약속 상대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예약이 된 룸으로 향하며 한 소리다.
유명한 한정식집이나 다닐 줄 아는 그는 오로지 한식만 즐기는 어쩔 수 없는 입맛의 소유자였다.
[할팽 즉, 갓포는 썬 재료를 삶는다는 뜻으로 제대로 요리한다는 의미를 품은 일식의 한 종륩니다. 격식에 맞게 잘 갖추어진 장소는 물론, 좋은 식재료를 바탕으로 정성스럽게 만든 요리를 술과 함께 즐기도록 내놓는 곳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럴 듯 하구만- 그는 비서의 설명에 건성으로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이 소리 저 소리, 다 가져다 붙여봤자 입에 들어가면 다 거기서 거기지.
“크흠.”
만나자고 한 놈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 심기를 건드렸다.
시간을 확인한 그는 제가 20분이나 미리 도착했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한번 놀랐다.
골칫덩어리 딸년 한번 치우기 어렵네. 하나이길 망정이지, 원.
“주문하신 메뉴를 먼저 내어 드리라고 권 대표님으로부터 방금 연락을 받았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그러시구려.”
시큰둥한 왕덕진의 반응에 허리를 접어 인사한 직원은 바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앞에 일본 교토 남부 우지시(巿)에서 맛본 기억이 있는 그 향기 그대로의 최상급 녹차, 교쿠로차가 놓였다.
이어 트러플을 가득 올린 일본식 계란찜 차왕무시가 들어왔다.
“술은 없나?”
“요리에 곁들여 즐기실 수 있는 ‘슈호미가키 니와리니부’가 준비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미리 올릴까요?”
“줘요, 그냥 싹 다 가져와도 좋구. 감질나게 코스는 무슨.”
애먼 직원에게 툴툴거린 왕덕진이 두 번째 사케 잔을 비운 순간 룸의 문이 열렸다.
.
.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이것 보시게, 권 대표! 어른을 불러놓고 놀리나!!”
“그럴 리가요. 제가 그리 한가하지가 않습니다.”
놀라서 눈이 커진 왕덕진과 다르게 잔잔한 미소마저 머금은 재하는 잔을 비웠다.
“그러니까, 말인즉슨. 권 대표 본인이 아니라 그놈한테 우리 나나를 주라고 이 자리를 만들었다? 그것도 이런 협잡꾼들이나 할 법한 소리까지 해가면서?”
쿵- 제법 단단해 보이는 주먹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힘이 잔뜩 들어간 주름지고 두꺼운 턱이 분을 삭이려는 듯 경련한다.
무감한 얼굴로 그 모양을 지켜보던 권재하는 담담하게 왕덕진의 빈 잔을 채웠다.
“협잡질인지 아닌지는 자료를 보고 판단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허허- 이거 참.”
하나밖에 없는 귀한 딸이 하고 다닌 짓은 입에 담기도 부끄럽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다.
손가락질이야 말할 것도 없고 곤두박질칠 주가를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손해 보시는 장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제안입니다.”
“뭐? 제안?”
평온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한 젊은이를 보며, 밀렸다는 생각이 든 왕덕진은 뜨거운 콧김을 뿜어댔다.
“흥분하실 것 없습니다. 받아들이실지 말지는 전적으로 회장님 뜻입니다.”
양쪽 집안 모두에게 최선이고요- 재하는 비어 있는 자신의 잔을 다시 채웠다.
“감히 어떻게. 우리 나나가 자네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래서 더욱 이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재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마이크로 SD카드를 왕덕진 쪽으로 밀었다.
벌써부터 자리가 지겨워지고 있었다.
손톱만한 물건을 내려다보는 노인네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나를 협박하려고 자리를 만들었다, 이 말이군.”
“제안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
“참고로, 내용은 반드시 회장님 혼자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
***
“왕 회장님 얼굴이- 뭐더라…… 그래, 불타는 고구마? 바로 그거던데요. 대체 무슨 일인지 정말 안 알려주실 겁니까.”
“사랑의 메신저.”
“무슨, 메신저요?”
“육체와 탐욕의 메신저라고 해야 하나.”
취기가 오른 얼굴은 아닌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재하를 살피던 강 비서는 질문을 바꿨다.
“이 주소지는 어딥니까?”
권재하의 집과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생소한 곳이다.
자동차 뒷좌석에 몸을 깊게 묻은 그는 눈을 감은 채였다.
“도대체 말이라고는 들어먹질 않아. 자꾸 달아날 궁리나 하고.”
재하는 일식집을 나서기 직전, 마 실장으로부터 은조가 제 집으로 갔다는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그래서 지금 그 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설마.”
“맞아. 밟아.”
입을 꾹 닫은 강 비서는 엑셀을 지그시 밟았다.
***
“맞는데요.”
“알아.”
104동 아파트 근처에 차를 막 대고 전화기를 들었을 때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불쑥, 윤은조를 발견하고 움직이기 시작한 다른 남자의 모습도 포착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처리해 버린 차상윤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놈이다.
게다가 둘이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든다.
권재하의 눈에 냉기가 가득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