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 “넙니까?”_너냐고 이 새X야 (40/100)


40. “넙니까?”_너냐고 이 새X야
2022.10.17.



 
나탈리 와이즈먼이 떠난 그날.

재하는 상윤과 은조의 과거 연관에 대해 보고를 받았었다.


[윤은조 씨와 차상윤 씨, 두 사람 사이에는 특별히 보고드릴 내용이 없습니다.]

[주변 인물들의 관계는요.]

[차하윤이라고 차상윤 씨 여동생이 영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최근에 입국했습니다. 인사차 윤은조 씨를 만났고 그때 차상윤씨가 잠시 동석하기는 했는데 역시 특이사항은 없…….]

[잠깐, 이 사진은 뭡니까.]

H호텔에서 찍힌 여자의 사진이 재하의 눈에 들어왔다.

빨간 세단의 넘버는 다름 아닌.


[아, 6209의 차주는 왕나나, DL 그룹 막내딸 입니다. 정황상 차상윤 씨는 윤은조 씨 쪽보다는 왕나나 씨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보시는 게 정확합니다.]

밀접하다?

재하는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삼켰다.

얼마나 품위 있고 고상한 표현인가.

큰돈을 대 주는 고용인의 품격에 맞추려는 것일지 모르겠으나.

차상윤과 왕나나가 하고 다닌 짓은 시궁창과 다를 게 없었다.

사진 몇 장에는 그 둘에게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넘기는 인간의 모습도 남아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차상윤과 왕나나의 관계에 대해 좀 더 디테일하게 알고 싶군요. 빠를수록 좋습니다. 여기 회색 SUV에서 내린 남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네.]

더럽고 추악했다.

그들에게 은조를 잠시 가져다 붙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졌다.


[왕나나, 이제까지 네가 한 행동 중에 제일 마음에 든다.]

남자라고는 권재하 밖에 모른다는 듯 아양을 떨며 요조숙녀인 양 구는 것이 전부 연기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 속담이 뭐더라.

도랑 치고 가재 잡는다?

그래, 님도 보고 뽕도 딴다!

하하하- 이게 뭐 대단하게 즐거운 일이라고. 결국 웃음이 터졌다.

한국에서는 오디. 미국에서는 mulberry라고 부른다.

짙은 보라색의 매우 달콤한 맛이 인상적인 열매는 ‘약용’으로도 쓰인다고 알고 있다.

차상윤과 왕나나가 맛보는 것이 그것과 이름은 같을지 모르겠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몹시 부정적이며, 위험천만한 것이다.


[생각보다 청소가 쉽겠어.]

그렇게 잠시 승리감에 도취해 있다가 마 실장의 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은조와 문제의 ‘지인’ 차상윤이 찍힌 사진.

지난 8년 동안 아무런 상관없이 지냈다 해도 지금, 현재!

같이 있지 않은가!

윤은조는 권재하를 뒤흔들고 어지럽게 만들려고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두고 봐. 한방에 싹 다 쓸어버릴 테니까.]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커다란 꽃다발을 바라보던 재하는 이를 갈았다.


[정문에 차 대기시켜요. 당장!]

싹 쓸어버리기 전에 일단 애벌 청소가 급한 상황이었다.

***

이게 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재하의 빈 집, 드레스 룸 앞에 선 이연실 여사는 아연실색했지만 속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왜 도와줄 사람까지 붙였는지 현장을 보니 이해가 갔다.

단정해야 마땅한 권재하의 옷 방은 태풍이 쓸고 지나간 것처럼 보인다.

옷걸이에서 떨어진 슈트며 셔츠, 타이들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 위에 드문드문 끼어 있는 구두까지.


“일단 저 안쪽부터 제 위치에 맞게 정리를 합시다. 현주 씨는 구두부터 좀 선반에 올려줘요.”

젊은 여성의 손이 야무지고 빠르게 움직였다.

작업의 진행에 꼭 필요한 대화 말고는 오가는 말도 없다.

언제 무슨 일이 일었나 싶을 정도로 드레스 룸은 빠르게 원래의 모습을 찾아갔다.

집을 나오기 전 이연실 여사는 짧은 메시지를 집주인에게 보냈다.


[일을 마쳤습니다. 다음엔 요리를 시켜주세요.]

 

***

드레스 룸은 물론 제 물건이라면 아무것에도 손대지 말라고 했으니까.

집에 있지 말라는 소리지 뭐야. 좋아, 잘 됐어.


“칫.”

그럼 출근하겠다는 은조의 메시지에 재하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 실장의 차를 타고 회사로 향하던 길이었는데.


“실장님. 저, 집으로 데려다주세요.”

그녀는 충동적으로 차를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어차피 병가 처리됐는데 굳이 출근해서 이래저래 사정을 설명해야 하는 것도 귀찮고.

그냥……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차가 유턴을 하는 동안 은조는 충동적인 행동을 하는 자신이 좀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얼마 전 지각에 이제 결근까지.

매일 다니던 안전하고 익숙한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만난 것 같았다.

낯설고 약간은 두렵지만 왠지 싫지도 않았다.

윤은조 답지 않은, 10대에도 하지 않던 비뚤어진 짓에 은근한 희열마저 느꼈다.

***



“또 시작이군. 좀 쉬면 큰일 나? 발목도 그 모양인데? 언니같이 너무 그러면 오래 못 산다고 TV에서 그러더라.”

“일찍 죽으라고 악담하는 거야?”

집은 깨끗했지만 은조를 습관처럼 몸을 움직거렸다.


“돼지우리 같을 줄 알았지? 언니가 하도 앞장서서 치우고 난리를 피우니까 내가 상대적으로 게을러 보이나 본데 절대 아니잖아. 안 그래?”

“다온이 간식 뭐 해줄까. 냉장고 보니까 너 살림 제대로 하려면 멀었어, 냉동식품만 잔뜩 채워두고 말이야.”

“……언니.”

“……?”

“다온이 말이야, 더 늦기 전에 내 호적으로 넣고 싶어. 사실도 알려주고.”

“그냥 둬. 넌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도 하고 당연히 아이도 더 낳아야지.”

“그건 그거야. 그리고 좋은 사람이라면 내게 아이가 있다는 것도 좋아할 거야. 그게 흠이 된다면 누굴 만날 생각도 없어. 요즘에 아이 있고 없고가 사람을 만나는데 영향을 줘? 누가 그런 구닥다리 같은…….”

“미안하다. 구닥다리 언니라.”

“그리고 결혼은 언니가 먼저 하면 나도 생각해볼게.”

“나는 다온이 키우면서 살 거야. 전에도 말했잖아. 연애든 결혼이든 생각 없어.”

“누가 언니 좋다고 사랑한다고 결혼하자고 하면? 그래도? 그리고…… 다온이는 아빠가 필요해. 미안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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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다온이는 아이답지 않게 센 힘으로 은조를 꼭 끌어안았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썬샤인!”

“나도 너무 보고 싶었어. 뽀뽀해 줄래, 뽀뽀해줄까?”

은조의 목에 매달린 다온이는 쪽쪽 소리도 크게 양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누가 보면 한 두어 달 떨어져 지낸 줄 알겠네.”

“엄마가 뭐 만들어 놓았을까요?”

“간식? 나 배고파!”

“넌, 항상 배고프잖아. 아침도 밥 한 그릇 싹 비우고 갔으면서.”

힝- 다온이가 민아를 향해 눈을 부릅뜨는 것을 본 은조가 빠르게 말했다.


“엄마가 고로케 만들었지! 참치 고로케.”

“우와아! 신난다!”

민아는 참치 야채 고로케에서 야채라는 단어를 쏙 빼버린 은조를 흘겨보았다.

감자에 피망은 그렇다 치고 당근까지 때려 넣었으니 다온이에게 거부당할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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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어!”

은조의 예상대로 거의 다지다시피 잘게 썰어 넣은 야채를 다온이는 아무렇지 않게 잘 먹었다.


“진심이냐 윤다온? 케첩 맛으로 먹는 거 아냐? 아니면 오랜만에 엄마 봐서 잘 보이려고 아양 떠는 건가?”

“잘 먹는데 왜 자꾸 넌- 그냥.”

은조가 아랫입술을 물며 눈을 크게 치켜떴다.


“엄마, 근데 아저씨는?”

“아저씨?”

“응, 아저씨는 안 와? 아니면 내가 이따 큰 집에 갈까?”

“아저씨는, 갑자기 왜?”

“내가 만원 줄 건데. 나 2만원 있어. 이모 어깨 주물러주고 받았어. 돈은 그렇게 버는 거래. 잘했지, 엄마?”

“응…… 대견해. 우리 강아지.”

“언니야, 정말 만원이면 돼?”

은조와 민아는 서로를 향해 눈을 흘겼다.


“아저씨한테도 이거 만들어 줘. 이렇게 얼굴 찌푸리지 않게.”

다온이가 귀엽게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드륵- 드륵- 민아가 아까부터 자꾸 울리던 휴대폰의 전원을 꺼버리는 것을 은조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우리 셋이 장 보러 가자, 같이 아이스크림도 먹고.”

“와- 다온이 계 탔다.”

“그게 모야, 이모?”

“응, 대충 만원이 200개 정도 생겼다는 말이야.”

“와! 200만 원!”

“대박- 우리 다온이 뭐가 되려고 이렇게 똑똑하지.”

“채린이 남편!”

“야!!! 윤다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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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행복한 몇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아이가 잠들자마자 은조는 그만 가겠다며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규호, 그가 1층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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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호 씨, 이건 정말 아니에요! 동네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우리 여기 못 살아요.”

“저 정말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민아 좀 만나게 도와주세요, 부탁드려요.”

“잘 됐네요, 그런 식으로 더 노력해요. 전부 좋아지고 하던 일로 다시 복귀하면, 그때 자리를 만들어 볼게요. 민아가 완강하지만 내가…… 약속할게요.”

“아뇨, 애걸복걸 구걸하는데 지쳤어요. 민아는 쉬운지 모르지만 저는 아니에요. 너무 힘들다고요.”

“규호 씨…… 전혀 나아지지 않았군요.”

 

***



“에디, 윤은조 당장 데리고 와서 차에 태워.”

재하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차문을 열었다.

더 지켜보다가는 사내가 은조에게 손이라도 댈 듯싶었다.


“뭐하시게요?”

“일단 태우고 아파트 입구 쪽에서 기다려, 곧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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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하겠습니다.”

“……!”

놀라서 멈칫한 은조에게 강 비서는 자동차가 있는 방향을 가리켜 보였다.

어서 오라는 듯 고급 세단의 헤드라이트가 날카롭게 한번 번쩍였다.


“누굽니까? 이 사람 누구예요, 처형?”

강 비서가 몸으로 규호를 가로 막자 은조는 빠르게 자동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처형? 그럼 이민아 씨의? 오, 이런.


“저도 이만 가도 될까요? 아니, 먼저 가시죠.”

당신을 기다리는 인물이 썩 친절하지는 않겠지만-

강 비서는 상대방을 위해 길을 열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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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하고 겁 많은 규호가 터덜터덜 걷는 모습을 은조는 차 안에서 바라보았다.

빠르게 차로 다가온 강 비서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혼자, 오신 거예요?”

“아, 혼자 오지 않았습니다.”

“……?”

 

***



“이봐.”

패배자처럼 걷던 규호는 앞을 가로막는 커다란 그림자에 어깨부터 움츠렸다.


“네? 저요?”

“여기 너 말고 누가 더 있습니까.”

“누구신데…… 초면에…….”

“넙니까?”

“……네?”

“하…… 그쪽이 윤다온의 생물학적 아비냐고 묻는 겁니다.”

“우리 다온이를, 어떻게 아세요? 혹시……?”

뭐? 우리?

이런 시X 개X의 새X.

퍽-

이성을 잃은 재하의 주먹이 차가운 밤공기를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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