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이리 와, 내 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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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이리 와, 내 곁으로
2022.10.20.
그날 이후 아주 오랫동안,
재하는 자신이 한 행동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물론 속으로 저 혼자.
결국에는 은조가 알아버린 게 가장 씁쓸한 부분이었다.
영원히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인격은 물론 학식까지 높고 빼어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카일 J. 알렉시스.
권재하가 주먹질이라니.
본인은 물론 상대도 납득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게 특히 거슬리는 부분이었다.
망할 ‘우리’라는 단어.
특히 ‘윤은조 포함 한정’으로 왜 유독 그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의문이다.
***
뭐? 우리?
“이런 시X 개X의 새X.”
슬로모션처럼 상대방의 턱이 돌아가고 몸이 따라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았을 때 남자는, 그러니까 윤은조에게 미혼모 딱지를 붙인 천하의 잡놈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턱이 돌아갔는지 코뼈가 주저앉았는지, 양쪽 모두인지.
바닥으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맛이 좀 간 인간처럼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여전히 주먹을 꽉 쥔 재하가 뜨거운 숨을 골랐다.
불이 붙은 것 같은 폐부로 차가운 공기를 채우는 동안 남자가 몸을 추스르며 일어섰다.
이내 흔들리는 공허한 눈이 재하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군요.”
“뭐요?”
“새로운 남자가…….”
커흑- 규호가 핏덩어리를 바닥에 뱉었다.
“새로운 누군가가 생겼을 거라는 느낌이…… 확실하게 왔었거든요. 나를…… 계속 피하는데…… 그게 뭔가 달랐어요.”
하! 재하는 흐트러진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주제에 무슨 권리로.”
“그러니까요. 내 여자도 내 아이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말이죠.”
예상보다 훨씬 나약한 상대 때문에 재하는 다소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입술 안쪽이 찢어지고 부어올랐는지 간신히 뱉어내는 발음이 점점 부정확해지고 있었다.
“알면서 왜 얼쩡거리지.”
“알면서도…… 어쩔-수가 없었거든요. 이런 심정을…… 경험해 본 적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크흑.”
울음을 참는 것처럼 진한 탄식 비슷한 소리를 토해낸 규호가 재하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어두침침한 구석에서도 빛이 나는 재하의 외모를 찬찬히 훑는다.
“나를 보면서는 그렇게…… 말간 눈으로 나뿐이라고, 사랑한다고 활짝 웃더니…… 어떻게 사랑이 이렇게…… 쉽게 변하지.”
“웃어? 사랑한다고 활짝 웃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웃은 재하가 양손을 허리에 얹은 순간, 규호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래!! 시X놈아! 너 같은 새끼들이 뭘 알아! 어? 사랑을 아냐고! 겉만 번지르르- 컥!”
후…….
아까 그냥 한 방에 보낼걸.
다시 바닥에 뒹구는 사내를 보며 재하는 제 주먹을 털었다.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어 봐.”
“야흐……윽 이……씨.”
“길에 깔린 게 사내 새끼들인데 어디서 이런 같잖은 새끼를 만나서.”
“이…… 흑…… 이 개X끼야…… 잤냐?”
“뭐?”
아- 이런 망할 수컷이라는 종자들.
너나 나나 참.
재하는 뜨거워진 이마를 짚으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시X놈아…… 흐흑, 우리…… 내 민아랑 잤냐고 묻잖아!! 이 개X끼야!”
“…….”
“우린 서로한테 처음이었어!! 이 X신 새끼야…… 뭔 소린지 알어!! 흐흑, 아냐고…… 첫사랑이고, 첫정이고…… 전부였는데…….”
재하는 바닥에 널브러져 흐느끼던 규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다시 말해 봐,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내가 전부 다시 찾을 거야!! 이 개XX야!! 흐흐흑…… 민아는 영원히 내 거야!! 우리는 아직 사랑한다고!!!”
부질없는 남자의 절규가 아파트 단지에 울려 퍼졌다.
규호의 옷깃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재하의 손에서 일순간 힘이 빠져버렸다.
***
엇- 강 비서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빠르게 움직이는 강 비서 앞으로 나타난 그림자가 재하라는 것을 은조는 바로 알아차렸다.
뭐를 하다가…… 어디 있다가 나타난 거지.
두 사람이 몇 마디 말을 나누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강 비서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
묵직한 자동차 문이 열렸다.
주인을 맞이한 자동차가 기분 좋은 정도로 가볍게 흔들렸다.
“……안녕, 윤은조.”
재하가 은조 옆으로 들어오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
다정하다 싶을 정도의 인사를 해놓고 막상 시선은 차창 밖 먼 곳을 향해 있다.
그것도 어울리지 않게 간격을 두려는 듯 문 쪽으로 바짝 앉은 모양으로.
“술…… 마셨어? 이 근처에서?”
“응, 마셨어. 근처는 아니고.”
“…….”
왜 넓은 어깨를 움츠리고, 팔짱까지 단단하게 끼고 있지.
머리카락도 좀 흐트러진 것 같고.
음…… 취했나 봐.
아무래도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어.
은조도 슬금슬금, 재하처럼 자동차 문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저녁은 먹었니? 아이랑…… 이민아랑?”
“……응.”
“즐거웠겠다.”
“……그렇지, 뭐.”
“맛있는 거 먹지, 고기라든가- 뭐, 좋은 거.”
“응, 맛있는 거 먹었어. 고마워.”
“……다음에는 내가 사줘야겠다.”
“……뭐?”
은조는 떨어져 있던 시선을 재하에게로 휙 돌렸는데 그는 아니었다.
얼굴이 거의 창밖을 향해 있어 표정을 조금도 확인할 수 없다.
나랑 얘기하는 거 맞나.
하고 있는 폼은 영락없이 화난 사람의 그것 같은데.
뜬금없이 우리 가족에게 밥을 사주겠다고 하고.
“집에 가면- 내 집에 가면 뭐 할 거야.”
“응? 아…… 글쎄. 일찍 자야겠지. 내일은 출근해야 하니까.”
“그래.”
“아, 맞다. 드레스 룸…….”
“다 치웠어. 정리 다 됐다고.”
“응? 어디가? 나는 아무것도 안 건드렸어! 정리 못 했는데…….”
“했어. 누가.”
“……?”
“발목은 좀 어때.”
“…….”
입술을 꼭 붙인 은조는 재하가 눈길을 돌리기를 기다렸다.
취해서 귀신이랑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발목이 어떠냐고 물어볼 정도면 최소한 잠시라도 눈을 마주치면서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아직도 불편해?”
휙- 드디어 고개를 튼 그의 얼굴은.
마치…… 슬픈 영화라도 본 것 같은 그런 얼굴이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검은 바다 같은 눈빛이 은조의 잔잔한 눈빛과 섞였다.
“아니, 멀쩡해. 덕분에 하루 잘 놀아서 좋았고.”
가냘픈 어깨가 가볍게 한번 들썩였다.
재하는 어색하게 미소 짓는 은조를 빤히 바라보았다.
“…….”
“나 완전 땡땡이 체질인가 봐. 그걸 이제야 알았어. 웃기지?”
“…….”
그래- 너무 웃겨서 안고 싶다.
너를 꼭 끌어안아보고 싶어서-
그게 또 웃기고.
이제 너무 짙게 가라앉은 남자의 눈빛은 그 빛깔을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 미묘하다.
“어디…… 불편해? 속이 안 좋아?”
은조는 질문을 해놓고 바로 시선을 차창 밖으로 돌려버렸다.
불편한 것은 사실 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심장을 간질이는 느낌 때문에- 진작부터 속이 울렁거렸다.
재하가 저만의 관능적인 향취를 밀어 넣으며 차 안으로 들어온 그 순간부터.
안녕, 윤은조-
잔잔한 인사를 툭 던진 그때부터.
Ho le farfalle nello stomaco.
내 배 속에 나비가 들어 있어- 간질간질 울렁울렁 미칠 것 같아.
사랑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행복한 불안감.
얼마 전에 읽었던 이탈리안 글귀가 떠올랐다.
아아…… 이건, 너무- 이상해!
“응, 불편해. 속이 안 좋아.”
집에 가서 좀 달리면 나아질 거야. 걱정 마-
“……응.”
들릴 듯 말 듯, 두 사람의 목소리가 비슷한 색으로 차 안의 공기를 물들였다.
.
.
그 밝고 말 많던, 강 비서마저 집으로 차를 모는 내내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은조는 급기야 회사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고 믿게 되었다.
***
차 안에서는 내내 팔짱을 끼고 있더니-
계단을 두 개씩 세 개씩 밟아 2층으로 올라가는 재하는 양손을 팬츠 주머니에 꽂고 있었다.
은조는 천천히 공간과 시간을 벌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8년 전 처음 동거를 시작했을 때같이 어색한 기운이 넘쳤다.
.
.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 계획인 은조는 샤워를 하고 물을 마시러 잠시 방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물이 든 잔을 들고 2층으로 올라와 복도 맨 끝 방을 잠시 바라보았다.
갑자기 밤에 달리기를…….
온갖 종류의 운동기구들이 들어 찬 넓은 방. 자리를 꽤 차지하는 트레드밀과 로잉머신 정도가 기억났다.
가슴 답답한 일이 생겼나 봐.
몸을 돌리려던 그녀는 문득 드레스 룸이 궁금해졌다.
“……헐.”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정말 무슨 일이 있기는 했던 걸까.
깔끔해도 너무 깔끔했다.
바로 냉수를 들이켠 은조는 제 방으로 들어가- 아니, 빨리 숨어버렸다.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모든 게 답답하고 불안한 밤이다.
.
.
그녀는 꿈을 꾸고 있다.
물과 하늘이 맞닿아 경계를 이루는 선 위에 오렌지색 구름이 떠 있고.
그 위아래로 짙은 보라색이 안개처럼 퍼져 있다.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외롭게 홀로 서 있는 나무의 이파리들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좀 쓸쓸하지만, 듣기 좋은 소리다.
수면 위에 비친 달빛도…… 흔들린다.
쇼팽인가…….
아아, 달빛이구나. 드뷔시…….
“……!”
방 안에, 달빛은 없다.
이파리들이 흔들린 게 아니었다.
이건…… 피아노 소리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뜬 그녀는 감미롭게 흔들리는 선율에 저를 맡겼다.
하지만 다시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다.
은은한 드뷔시의 세 번째 달빛이. 결국 나비의 날개 짓으로 변했다.
“…….”
침대를 빠져나온 은조는 꿈 위를 걷는 나비처럼 움직였다.
.
.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권재하였다.
파자마 바지에 나이트가운을 걸친 채,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그는 맨발이었다.
커다란 손이 피아노 건반을 부드럽게, 애태우듯 어루만지고 있다.
남자의 움직임에 따라 벨벳 같은 머릿결이 춤을 춘다.
“…….”
은조는 그때까지 제 숨이 멎어 있는 줄 알았다.
재하가 고개를 들었고, 눈길이 서로 닿고 나서야 겨우 얕은 숨을 터뜨렸다.
그는 2층 난간에 서 있는 그녀와 한참이나 시선을 마주하면서도, 달빛을 그리는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그 빛을 따라 별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아니…… 별이 아니라…….
집 안 전체를 가득 메운 나비들의 날갯짓이었다.
파랗고 긴 달빛의 장막이 걷힌 순간,
재하가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이리 와.
아름다운 얼굴에 번지는 흐릿한 미소가 보였다.
내 곁으로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