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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느낌을 말해 줘 (42/100)


42. 느낌을 말해 줘
2022.10.24.



“여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누구요?”

놀라서 휘둥그렇게 변한 이성자의 눈이 남편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들은 그대로지, 무슨 소리긴.”

흠- 왕덕진의 두터운 손바닥이 오래 된 가죽 의자의 팔걸이를 탁탁 때렸다.

벽면 한쪽이 전부 책으로 빼곡하게 들어찬 서재 안에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먼지처럼 떠다녔다.

어두침침한 공간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두 사람은 부부면서 동시에 오랫동안 사업 파트너로서 기업을 이끌어 왔다.

누구든 상대방에게 어떤 제안을 내놓았다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분명히 회사의 이익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들고 있던 찻잔을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이성자는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목소리 또한 더없이 차분했다.


“라성 그룹도 송 의원도 아닌, 차대성 의원이오. 차 의원 정도면 썩 나쁠 것도 없지만 일단 이유를 정확하게 말해줘요.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는지.”

“하…… 나 이거 참.”

왕덕진이 난감한 얼굴로 뒷덜미를 문질렀다.

말을 하는 게 옳은지 어쩐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자신이 본 영상과 사진들, 그 내용을 절대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다고 다짐했건만.

아무리 나나의 어미라고 해도 알아서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여보.”

“거, 그냥 그렇게 해요. 4선 의원에 알아보니 안 사람도 유명한 피아니스트에다가 명문대 교수더구먼.”

“겨우 그게 라성 그룹이나 송인재 의원보다 나은 이유예요? 톡 까놓고 얘기하자면 라성은 아쉽지 않아요. 하지만, 송 의원 쪽은요? 이희연 여사는 이명춘 전 법무부 장관의 고명따님이에요. 아시는 걸 제가 이렇게 일일이 설명해야 하나요.”

“아, 그러게! 왜!!”

빽 소리를 지르려던 왕덕진이 급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다.

문득 방 안에 누가 이상한 장치라도 설치하지는 않았을까,

문 밖에 누가 귀라도 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황당한 조바심이 일었다.


“방금 그건- 제 탓이라는 뉘앙스로 들렸어요, 맞게 들었죠?”

역시 마누라를 속이지는 못하겠다.

서로 하루 이틀 겪어본 사이도 아니고 이제 숨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어떤지 아는 사이인데.

왕덕진은 소곤소곤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그게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나나를 너무…… 아니, 사업은 그리 똑 부러지게 하는 사람이- 왜 자식은…… 에이, 우리가 나나를 잘못 키웠다는 얘기야! 쯧.”

“네?”

“애당초 매질이라도 해서 그놈의 성질머리를 고쳤어야 했는데. 미국이고 뭐고 공부도 시키지 말고 집에나 처박아둘 걸 그랬어요! 다 글렀어! 텄다고!”

잘못하다가는 경찰서에나 들락거리게 생겼으니, 원.

애꿎은 소파의 팔걸이만 냅다 주먹으로 내리치는 왕덕진의 목소리가 서재에 울렸다.


“알아듣게 말해요. 우리 나나가 좀 철부지고 아기 같은 면이 있지만…….”

“아기이? 지금 아기라고 했어요? 하! 환장하겠네.”

“…….”

“당신이 그렇게 평생 아기 취급하면서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어화둥둥 금지옥엽 업어주기만 해서 키운 딸이 무슨 짓을 하고 다녔…….”

크흠- 왕덕진이 다시 급하게 입을 닫아버렸다.


“저한테 털어놓기에도 불편하다, 이 말씀이네요.”

“그래요! 불편한 정도가 아니야. 입에- 요요, 입에 담기도 망측해요!”

“여보, 왕 회장님. 전 나나 어미에요. 이미 웬만한 건 나도…….”

똑똑- 짧고 빠른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무거운 서재 문이 벌컥 열렸다.


“두 분이 여기 숨어서 뭐하셔!”

비밀 얘기하는구나- 왕나나가 냉큼 제 부모 사이에 끼어들었다.

***


 
이리 와.

달콤한 그 뜻을 알아들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육감적이고 황홀한 꿈의 한가운데 깊이 빠진 것 같은 몽롱한 기분이다.


“…….”

등받이가 없는 피아노 의자에서 슬쩍 몸을 튼 재하가 다리를 꼬아 올렸다.

한껏 내려뜨린 눈꼬리를 하고 미안한 것처럼 웃는다.

툭툭- 곁으로 오라고, 다시 그가 의자를 두드렸다.

마른침을 삼킨 은조는 어렵게 발 한쪽을 바닥에서 떼어냈다.

낡아빠진, 목이 다 늘어난 원피스 잠옷을 걸치고 고장 난 인형같이 어기적어기적 계단을 내려갔다.

플로의 램프의 빛을 반사하는 화려한 그랜드 피아노.

그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영화에서 본 유럽의 귀족 같다.

짙은 네이비 컬러의 실크 가운은 넓게 발달된 어깨를 타고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예전에는 날렵하고 매력적인 어린 표범이었는데-

이제는 얼핏 눈만 마주쳐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그 존재감이 날카롭고 짙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흑표범을 떠올린 순간.

벌어진 옷깃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가슴팍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

쭈뼛거리며 그의 앞에 선 은조는 등 뒤로 맞잡고 있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엷은 미소가 서려 있는 재하의 얼굴은 왠지 평소보다 좀 창백해 보였다.


“그러고 있으니까 선생님한테 혼나는 여학생 같다.”

그가 다시 긴 의자의 한쪽, 제 옆을 툭툭 손바닥으로 쳤다.

저기 앉을게- 은조는 가까운 곳에 있는 1인용 소파를 가리켰다.

선생님의 차림이 몹시 불량하고 야한데- 그 옆에 앉으라고?

그랬다가는 정말 혼날 일을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고집쟁이. 피아노 가르쳐 주려고 그랬지.”

재하의 얼토당토않는 소리에 은조는 입술을 터트려 웃고 말았다.


“이 시간에? 설마- 5분 만에 배울 수 있다는 소리야?”

그럴 리가-

그냥 입술이 제멋대로 아무 말이나 만들었지.

난 지금…….

제 예쁜 인형을 끌어당겨 꼭 끌어안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인형에서 나는, 익숙하고 달짝지근한 냄새를 들이마시면 잠이 올 것도 같고.

그렇거든.


“아마 나는 6개월이 걸려도 못 배울 거야. 자신 없어.”

은조는 어둠 속 맹수같이 빛나는 재하의 눈길을 피하며 빠르게 입술을 움직였다.


“근데 왜 같은 곡을 계속 반복했어?”

“그래서, 지루했어?”

“……아니.”

“나한테 드뷔시는 아름다운 지옥이야. 끔찍해서 다시는 아니라고 하고서는 또- 아마, 나랑 너무 잘 맞나봐.”

“…….”

아름다운 지옥. 윤은조에게 권재하가 딱 그건데…….


“왜 깼어? 방문 닫힌 걸 확인했는데- 아무튼 미안.”

“아냐, 꿈을…… 꿨어. 그리고…… 듣기 좋았어.”

“다행이군.”

은조는 재하의 긴 속눈썹이 만든 그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왜…… 잠이 안 와?”

“잠도 안 오고, 머리도 좀 복잡하고, 와인 한잔할까, 좋은 거 있는데. 물론 네가 좋아하는 부쥬아(Beau Joie)도 있어.”

“아…… 와인이 낫겠어.”

두잔 정도 마시면 나도 다시 잠이 올 것 같기도 하거든.


“좋은 생각이야. 부쥬아는 아무래도- 좀 부족하다.”

“응? 부족해? 뭐, 가?”

“뭐겠어. 알코올.”

그는 두 개의 부르고뉴 와인 잔을 준비하고, 아일랜드 식탁에 빌트인 된 와인 셀러에서 레드 와인을 꺼냈다.

마치 느린 춤을 추듯 우아하게 움직인다.

힘도 들이지 않고 오프너를 가볍게 돌리자, 뽁- 코르크가 병에서 분리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그런데-


“손이 왜 그래?”

“아, 별거 아니야.”

“다친 거 같은데 뭐가 별거 아니야. 좀 봐도 돼?”

“그럼- 봐도 좋아, 만지면 더 좋고.”

끙- 은조는 내밀던 손을 다시 안으로 접었다.


“왜 실컷 봐, 실컷 만-.”

“됐어. 관둬.”

“남자들은 운동하다가 이렇게 되기도 해. 네가 전에 다림질하다가 손등을 덴 것처럼 말이야.”

너무 열 받아서 벽을 친 게 아니고? 은조는 가는 눈으로 재하를 쳐다보았다.

섬세한 유리잔에 붉은 액체가 채워졌다.

스템을 잡고 가볍게 잔을 돌리던 재하가 문득 물었다.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속삭이듯.


“지난 네 시간은 어땠어. 6년 동안 말이야.”

어쩌면 은조에게 묻는 게 아니고 저 자신에게 묻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떻게 살았냐니…… 질문이 좀 이상한데.”

“……행복했니?”

“행복? 글쎄…… 동생이랑 아이가 아프지 않고 그저 걱정이 없는 게 행복이라면, 뭐.”

“너의 행복은 곧 아이와 동생이었다는 얘긴가.”

“응. 가족이잖아.”

“가족.”

“너도 가족이 있잖아.”

“있지. 네 가족과는 사뭇 결이 다른 나의 가족. 아- 나쁜 뜻은 아냐. 난 알렉시스인 게 자랑스러우니까.”

“……그래.”

“그들은- 그러니까 나의 가족은 태생이 귀족이고 우아하면서, 베풀 줄도 아는, 어디 한군데 흠이라고 찾아보기 힘든 완벽한 사람들이야.”

“…….”

“내가 머릿속에 저장한 악보가 몇 개나 되는 줄 알아? 제니스는 악보를 보면서 피아노를 치는 건 제대로 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지. 나도 동감이고. 천만 다행 내가 외우는데 일가견이 있잖아.”

망할 드뷔시- 그가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할머니가 무서웠어? 내 기억에, 전에 네가 들려준 가족들 이야기는 굉장히 자상하고 따뜻한 느낌이었거든. 물론 정확한 건 아니지만.”

“음- 엄청 자상했지. 근데 나를 만든 건 제니스야.”

“만들, 어?”

“말꼬리 잡지 말고, 나만 마시게 둘 거야. 나 다 알잖아, 너 술 잘 마시는 거.”

그래- 옅은 숨을 내쉰 은조는 잔에든 술을 반 정도 비웠다.

포크에 꽂힌 작은 덩어리가 바로 눈앞에 들이밀어 졌다.


“그뤼에르(Gruyère) 치즈야. 에멘탈보다 맛있을 거야. 먹어보고 느낌을 말해 줘.”

먹어보고 느낌을 말해 줘.

느낌을 말해 줘.

은조야…… 지금…… 느낌을 말해 줘.


“…….”

잊고 있었던, 귓가를 달구던 낮고 뜨거운 음성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동그란 눈을 깜박거리며 귀 끝까지 발갛게 물들인 은조를 바라보는 재하가 싱긋 웃는다.


“푸, 풀 냄새, 음- 꽃향기…… 달콤한 과일 향. 그리고…… 아, 몬드?”

“깊지만, 강하지는 않고, 입안에 오래도록 그 향기가 머물지.”

“응.”

은조는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고 재하는 조용히 다시 잔을 채웠다.

두 잔이면 말랑말랑 잠이 찾아오는데 무려 네 잔을 비웠다.


“좋다…… 사이좋게 지내니까 좋잖아. 나- 너…… 미워하지 않아. 정말이야. 다…… 전부! 지난 일이잖아.”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굴이…….

너무 예쁘다.


“윤은조. 나, 궁금한 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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