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 밝히기는, 위험하게시리 (43/100)


43. 밝히기는, 위험하게시리
2022.10.27.


미국, 뉴욕.

맨해튼의 인기 주거지역 어퍼 웨스트 사이드(Upper West Side).

그 중심에 위치한 고층 건물 ‘101 Amsterdam’.

럭셔리 맨션의 정점을 찍은 건물의 50층, 펜트하우스에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Honey! 자기야, 어디 있어요?]

이른 아침, 넓은 창으로 이제 막 아침 햇살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여자는 어깨 바로 위에서 구불구불, 크고 아름다운 웨이브를 만든 은회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바쁘게 움직였다.


 


[카일! 카일!]

플로럴 프린트가 화려한 가운 자락이 경쾌한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 나부꼈다.

여인이 머물다가 지나간 자리에는 꽃향기가 가득했는데, 그것은 향수 때문이 아니다.

거실과 방, 주방과 욕실까지 이곳저곳에 자리한 생화가 가득 담긴 꽃병 때문에, 178평이나 되는 집 안에 싱그러운 향기가 가득했다.

제니스 알렉시스(Janice Alexis)

올해 74살인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풍성한 꽃 더미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음- 완벽해.]

테이블 위마다 놓여 있는 꽃병에는 흰색 장미와 노란색 장미가 풍성하게 섞여 있었다.

그녀는 엄청난 재력가다.

좋아하는 꽃들로 넓은 집 안을 가득 채우는 정도는 제니스 알렉시스가 가진 취미들 중에서도 아주 아래 단계다.

화장기 하나 없는 그녀의 맨얼굴은 몹시 수수했다.

자연스럽게 주름이 진 얼굴 어디에도 인위적으로 손을 댄 흔적은 없었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사파이어처럼 파랗게 빛나는 눈동자를 소유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평생 자신감이 넘쳤다.

우아하고 고상한 그 얼굴이 문득 당황한 기색으로 물들었다.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빠르게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재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 남편을 발견했다.

품에 안고 있던 강아지 릴리를 바닥에 내려놓은 제니스는 양손을 허리 위에 올렸다.


[카일! 여기 있으면서 왜 대답을 하지 않은 거예요!]

[왜, 어디서 죽기라도 했을까 봐?]

종이로 된 신문에서 눈을 뗀 카일 알렉시스가 장난스럽게 윙크를 날렸다.


[재미없어요! 그런 농담! 장난이래도 싫어요,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죠! 우리처럼 나이 든 사람들이 하기에는 좀 불편한 농담이잖아요!]

[미안. 이리 와요, 제니스. 키스해 줘요.]

역시 은빛 머리카락의 카일이 제 아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내 미소 가득한 얼굴로 남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제니스는 기도하는 소녀처럼 양손을 높게 맞잡았다.


[하니, 서울에 좀 가야겠어요!]

이게 제니스 알렉시스의 전형적인 말투다.

상대방에게 동의나 의견을 구하는 것이 아닌 제 결정을 통보하는 방식.

왕 위에 군림한 여왕의 그것이었다.

제니스는 발아래에서 알짱거리는 어린 강아지 릴리를 다시 안아 올렸다.

얼마 전 18년을 키운 로지를 잃고 슬픔을 달래려 데려온 강아지였다.

하지만 꼬리를 치고 저만 바라보는 릴리보다는 완벽하게 왕의 모습을 갖춘 손자 카일이 더 그리웠다.


[아이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군말 없이 제니스의 의견을 따를 늙은 카일이 물었다.

로지는 떠났지만 아직도 나이든 개들이 셋은 더 있었다.


[전부 데리고 가야죠. 당연한 걸 뭘 물어요. 비행기가 넓으니 시중을 들어 줄 사람도 서넛 정도 데리고 가요.]

[오, 제발- 그 농담도 재미없어요, 제니스. 개 네 마리로도 충분히 과해. 당황할 녀석을 떠올려 보라고.]

활짝 웃는 제니스가 남편의 뺨을 어루만졌다.

오른손 약지에 끼워진 핑크 다이아몬드 링이 영롱한 빛을 뿜는다.


[아- 이 반지를 꼭 끼고 가야겠어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분석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에 뛰어날 뿐 아니라 직관적으로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타고난 지략가였다.

하지만 그 또한 수많은 고심 끝에 이루어진 성과이며, 지나간 세월 자신의 노력과 연구, 경험의 축적에서 나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 잘 지내고 있겠죠.]

[지난 주에도 통화를 했잖아요. 당신 그러는 거, 과도한 집착으로 보여요.]

[너무 사랑하니까, 나의 분신이나 다름없어서 그러죠. 그 애는 완벽한 피조물인걸요!]

[그래요, 당신이 만든.]

[어쨌든.]

그녀는 카일 알렉시스를 왕으로 만든 킹메이커다.

블랙스톤 파트너스가 정상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 더 이상 할일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재하’가 나타났다.

사업을 물려받을 생각도 없고 독신주의를 고집해 실망만 준 아들 숀이 데리고 온 아이였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 안에 깊이 숨겨진 우울과 분노.

제니스는 그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놀라울 정도로 영민한 지능을 가진 아이.

그런 아이가 세상을 향한 분노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녀는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다음 세대- 알렉시스 제국을 다스릴만한 왕을, 드디어 찾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준 것처럼.

멀리 타국에 있던 큰 보물이 제게로 온 것이었다.

***



[좋다…… 사이좋게 지내니까 좋잖아. 나- 너…… 미워하지 않아. 정말이야. 다…… 전부- 지난 일이잖아.]

술이 잠시 착각하게 만든 거지.

인간들이 그러자고, 다 잊고 아주 잠. 깐. 행복하자고 마시는 게 바로 술이니까.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굴이.

너무 예쁘지만, 내일은 딴소리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윤은조- 나, 궁금한 거 있어.]

[응, 뭔데? 근데 이거 진짜 향기가- 너무너무 근사해.]

그녀가 빈 잔을 다시 채우라는 듯 재하 쪽으로 밀었다.

좋은 술을 참 잘도 아는 윤은조, 역시 넌 예쁜 술꾼이야.

많이도 못 마시면서 밝히기는.

위험하게시리.

쯧-

붉은 액체를 다시 빨아들이는 동그란 입술에 눈길을 박아둔 재하가 낮게 속삭였다.


[왜 남자 만나지 않았어? 너 정도면 얼마든지…….]

[나 남자 만났어! 아이도 만들었잖아!]

흥- 재하는 소리 없는 코웃음을 웃었다.

알딸딸하게 취해서도 거짓말을 참 귀엽게 잘도 지껄인다.


[사랑하니까 애까지 만들었다?]

[그러엄- 사랑하지도 않는데 누구 말처럼 뒹굴고 붙어먹고, 또 뭐더라…… 아무튼 그래? 아이 아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별로야! 지금 기분, 좋단 말이야!]

[와인이 정말 훌륭하지. 도멘 드 라 로마네 꽁띠 2016- 빈티지 와인이야.]

[뭐? 도, 도멘드 꽁? 그래서- 얼마짜린데? 응!! 대체 얼마냐고!]

[그게 왜 궁금해.]

[궁금해! 알고는 마셔야지.]

[퍽도- 왜, 6억에 플러스하라고 할까 봐? 네가 거의 마시긴 했다.]

[흥.]

[금액 알면 너, 더 못 마셔. 이거 딴 거는 다 마셔야지. 버릴 만한 가격은 절대 아니거든.]

[짜증 나.]

[있잖아- 그게, 기회가 되면 다온이한테 사과하고 싶은데. 지난번에 내가 좀 그랬잖아.]

[잘도 아시네……. 역시 잘났어.]

[다온이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어.]

갑자기 훅 들어온 재하의 질문에 은조는 뒤로 꺾여 있던 목을 바로 했다.

정신을 가다듬으려는 듯 큰 눈을 껌벅껌벅, 고개를 좌우로 털듯이 흔들었다.

소주 한 병은 마신 꼴인데.


[착, 하고…… 자, 잘생긴 사람. 마음이 좀 약해서…….]

[잘생겨? 잘생겼다고? 누가?]

괜히 급작스럽게 핏대를 세우는 재하 때문에 은조는 목을 움츠렸다.


[……잘생긴 거 맞는데.]

[이거 800만 원이야.]

[으응?]

[도멘 드 라 로마네 꽁띠. 얼만지 알고 마시겠다며. 자, 받아.]

[…….]

취하긴 취했는지, 아니면 잘 못 알아들었는지 금액을 듣고도 빈 잔을 다시 내밀며 눈을 살풋 접어 웃기까지.


[하! 내가 미친놈이지.]

은조의 가늘고 예쁜 손가락이 깨진 손등의 상처 위를 가만히 쓸었다.


[화가…… 많이 났었어?]

[응.]

[……왜?]

[모르지.]

[바보.]

[…….]

[사과는 어떻게 할 거야?]

[뭐?]

[우리 다온이한테 사과한다며…….]

[아. 그래, 해야지. 윤다온한테- 사과.]

[고마워…….]

멀쩡한 건지 아닌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
.



[아까 옆에 앉으라고 할 때는 기어코 싫다더니.]

[…….]

은조은 저를 안고 2층 계단을 밟는 재하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이 떨어지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재하는 실없이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찌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공주 같은 침대 위에 그녀를 누이고 바로 그 옆에 제 몸을 뉘었다.


[재워 주려고, 예전처럼.]

몽롱한 눈이 저를 바라보며 끔벅-끔벅 움직일 때, 한 번 더 물었다.

참으로 어리석고 부끄럽게도.


[정말 잘생겼다고 생각해? 그 새ㄲ- 사람이?]

그리고 대답을 들었다.


[……누, 가?]

근데 왜 여기 있어- 은조가 얼굴을 살짝 찌푸린 순간,

재하는 커다란 손을 그녀의 눈 위에 냉큼 올렸다.


[쉬이- 우리 은조, 이제 그만 자자.]

깜박- 깜박- 손바닥을 간질이는 속눈썹이 느껴졌지만 이내 숨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잘 자.

내내 바라만 보며 입맛만 다시던 그 입술에 제 입술을 부드럽게 눌렀다.

향기가 정말이지…… 근사했다.


 

***



“…….”

강 비서는 보고를 흘려듣는 권재하를 찬찬히 살피며 하던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일본에서 타스케다라고 하면 TCHC의 톱 브랜드인 아리우민을 떠올릴 정도로 고객의 신뢰가 높습니다. 회사 대표 역시 타스케다의 역사에서 이 브랜드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왔는지 강하게 실감하고 있다고 밝, 혔고요.”

“……그렇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자에 상체를 깊게 묻고 앉아, 문득문득 검지 끝으로 제 아랫입술을 슬그머니 문지른다.


“그럼 제 생일 파티는 대표님 빌라에서 하는 걸로-.”

책상 위에 있던 재하의 시선이 단숨에 위로 들어 올려졌다.

흠칫- 강 비서가 고개를 뒤로 뺐다.


“갑자기 생일 파티 얘기가 왜 나와.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딴생각을 하고 계셨잖습니까.”

“…….”

부정하지 않는 권재하가 눈썹 끝을 치켜 올렸다.


“혹시, 그 일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뭔 소리야, 내가 걱정하는 건 너야, 너. 요즘 쓸데없이 자꾸 간을 보려고 까불잖아.”

“아닌데요. 간을 보다니요. 제가 왜.”

“됐고. 이따 회의에 넌 참석하지 마.”

“또요?”

“좀 다녀와야 할 데가 있어.”

“아, 중요한 일입니까?”

“당연하지.”

“어디를 다녀올까요.”

토이저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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