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반칙
(44/100)
44. 반칙
(44/100)
44. 반칙
2022.10.31.
“아빠 지금 뭐라고 했어? 누구?”
“처음 듣는 이름도 아닐 텐데 뭘 자꾸 물어.”
“누구라고 했냐고!!”
“나나야, 일단 진정해!”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며칠 전에 알아듣게 말했잖아! 아니, 며칠이 뭐야, 내가 언제적부터 권재하, 권재하 노래를 불렀냐고! 오빠 아니면 결혼 절대 안 해! 싫어!!”
“그래, 할 말 다 했니?”
왕덕진이 이제까지 본 적 없는 차갑고도 살벌한 눈빛으로 제 딸을 쏘아본다.
“나나야, 다시 앉아.”
이성자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소리를 질러댄 나나를 끌어 앉혔다.
“너, 잘 들어. 그렇게 미친X같이-.”
“여보! 딸한테 그게 무슨…….”
“당신은 좀 가만히 있어요! 이 계집애가 하고 다닌 짓을 알면 당신은 뒤로 넘어갔어! 내가 지금 뺨이라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은 걸 애써 참는 거니까. 자꾸 말 자르면서 성질 더 돋우지 말아요!”
“아빠, 지금 뭐라고 했어? 뺨을 후려갈겨? 나를 때리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래, 이 철없는 것아!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헛소리만 해대는 것을 보니 한 대가 아니고 열 대, 스무 대라도 매를 들어서 가르쳐야겠어! 아비가 돼서 그걸 이제야 깨달은 내 잘못이 크다만, 계속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면 나도 별 수 없다.”
손이며 고개를 세게 가로젓는 왕덕진은 참을 만큼 참았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여보, 제발 알아듣게 말해요.”
입을 꾹 다문 나나는 슬슬 제 아비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까지 아버지가 저를 향해 언성을 높였던 적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도 안 된다.
그나마도 어릴 적에 편식을 하거나 친구를 때려서가 전부였고, 다 자라서는 일절 듣기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가끔은 무관심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쓰고 싶은 대로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있었고 마음대로 무슨 짓을 하고 다녀도 되니 오히려 편하다고 생각했다.
가끔 저지르는 하찮은 실수도 아버지의 이름과, 회사의 변호사들이 알아서 소리소문없이 처리해 주니 사는 게 그저 공짜로 얻어진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랬던 아버지가 갑자기 생전 처음 보는 눈, 낯선 목소리로 저를 심하게 힐책한다.
뺨을 갈기겠다고? 이 왕나나의 뺨을?
“아빠, 방금 나한테 무슨 소리를 했는지 알아? 나 아빠 딸이야! 왕덕진 외동딸 왕나나라고!”
“나나야, 목소리 낮춰.”
뜨거운 콧김을 뿜어대는 왕덕진은 아까보다 더 사나워진 눈으로 제 딸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영상에서 본 자료들이 생생하게 뇌리를 스친다.
그것이 세상에 알려졌다고 상상하니 뺨을 갈기는 게 아니라 호적에서 파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다.
“네 녀석이 하고 다닌 짓을 이 아비가 다 알게 됐어. 아주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말이다. 시시콜콜이라고 말하면 또 제대로 못 알아듣고 감히 적반하장 식으로 눈을 부라리겠지만! 차마 내 입으로, 네까짓 게 그래도 자식이라고 이렇게 끝까지 지저분한 단어를 쓰기 싫어서 참는 거야! 알아!”
“뭐? 그러니까 차상윤이랑 내가 하고 다닌 짓? 무슨 짓? 내가 미성년자야? 남자 좀 만나고 다닌 게 무슨 큰 죄라도 되냐고!”
역시 돼먹지 못하게 목소리부터 키우며 끝까지 잡아떼는 왕나나.
“그냥 사내를 만나고만 다녔다?”
이제 왕덕진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수시로 색을 바꾸며 눈가에는 잔 경련마저 일었다.
“여보, 대체 무슨 일인데 이래요. 혈압 올라가요. 진정하시고…….”
“당신! DL 바이오팜에서 개발 중인 신약, 언제가 출시인지 알아요?”
“그걸 왜 모르겠어요, 올해 말이잖아요, 늦어도 내년 초. 갑자기 그건 왜요.”
“그리고 아띠제리에서 새로 나오는 커피 음료는 어떻고? 그동안 연구하고 생산 준비하느라고 돈을 쏟아부을 대로…….”
“아빠!!! 그놈의 돈 얘긴 됐고! 그냥 알아듣게 말해! 지겹고 짜증 난단 말-”
쩌억!
나이 들고 육중한 왕덕진의 몸놀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번개처럼 빠른 손이었다.
크고 두터운 손바닥이 정말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외동딸의 뺨을 거침없이 후려갈긴 것이다.
얼굴과 목은 물론 상체까지 휙 돌아간 나나는 아예 소파로 엎어진 모양이 되었다.
“여, 여보.”
너무 놀란 이성자는 마치 제가 한 대 맞은 것처럼 넋이 나간 얼굴이다.
“어디 배워먹지 못하게. 이제 보니 내가 아주 자식 농사를 망쳤구먼. 그렇다고 회사까지 망칠 수는 없겠지. 너, 지금 이 순간부터 외출 금지는 물론이고. 이것 봐요, 이성자 씨. 당신도 크게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얘 카드랑 차 전부 못 쓰게 감시 잘해요! 알아들었어요?”
애지중지 키운 딸에게 손찌검을 한 왕덕진이 먼저 자리를 떴다.
흐흑- 나나가 엎어져 있는 자세 그대로 흐느끼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나야, 엄마 좀 봐봐, 어서.”
“몰라!”
몸을 마구 흔드는 딸을 잡아 상체를 일으켜 세우게 한 이성자는 아비에게 맞은 뺨부터 살폈다.
100킬로 가까이 나가는 거구의 왕덕진에게 맞았으니 딸의 목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금세 붉게 부풀어 오른 손자국이 선명했다.
“이걸 어째.”
“아! 만지지 마! 아파!!”
“빨리 엄마한테 전부 말해. 그래야 해결을 해도 하지. 네 아빠 보니까 절대 입을 안 열 게 분명한데, 대체 무슨 잘못을 또 한 거야?”
“또? 또오?? 엄마 지금 또, 라고 했어?”
맞은 지 3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눈부터 부라린다. 천둥벌거숭이도 이런 천둥벌거숭이가 없다.
이성자가 드디어 목소리를 높였다.
“어허! 자꾸 딴소리하면 엄마도 장담 못 해! 네 아버지가 하자는 대로 하는 수밖에!”
“…….”
“어서 말하지 못해! 차상윤이라는 그 남자랑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닌 건데? 설마…… 얼마 전에 그 사람 파혼 얘기로 사모들 사이에서 말이 좀 많았어. 알아? 너, 혹시 그거랑 상관있는 건 아니지?”
“…….”
“당장 말 못 해!! 엄마까지 화나는 꼴 보고 싶어!”
“그게…….”
나나는 체념한 듯 제가 한 짓들을 불었다.
겨우 3분의 1 정도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성자는 불같이 화를 냈고 왕덕진 못지않게 낯빛을 붉혔다.
당장 카드와 자동차 키를 가져오라는 말에 나나는 풀 죽은 아이처럼 일단 그 말을 따랐다.
어느새 깨끗하게 말라 있는 눈의 왕나나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겨우 카드와 자동차 키? 부모가 아직도 저를 잘 모른다는 것이 신기했다.
***
800?
80?
막 집으로 돌아온 은조는 핸드백도 내려놓지 않은 채 와인 셀러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지난 밤 마신 것과 같은 모양의 와인이 두 개 더 보였다.
“80이겠지.”
꽁- 어쩌고 이름도 길었던 와인을 검색해 보기 귀찮아진 그녀는 그냥 믿고 싶은 대로 믿기로 했다.
800만 원이면 또 어쩌게.
분명히 먼저 마시자고 했고, 뚜껑을 딴 것도 권재하 본인인데.
다리가 저려 오는 느낌에 막 일어서는데 현관문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많이 늦는다고- 아까 메시지가 왔는데.
……?
“엇!”
강 비서는 은조보다 더욱 놀랐는지 크게 멈칫거렸다.
“아, 죄송합니다. 일찍 와 계셨네요.”
“네, 안녕하세요.”
“잘 됐다. 이것 좀 받아 주세요. 저는 바로 가봐야 해서요. 매우 한국스러운 회식이 있거든요.”
그는 양손에 꽤 커다란 종이가방을 네 개나 들고 있었다.
“네, 주세요. 근데 이게 뭐예요? 음식?”
“아뇨.”
큭큭- 그가 가방을 넘겨주며 소리 내서 웃는다.
“……?”
“어느 분이 선물은 뜯어보는 맛이라고 하셔서 포장까지 신경을 썼는데, 아이 맘에 들까요? 그거 장난감입니다.”
“장난감요?”
“넵.”
아, 사과하겠다느니 어쩌니 하더니.
“혹시……?”
“네, 다온이요. 언제 기회가 되면 소개 좀 시켜주세요. 저는 아이들을 되게 좋아하는데 주위에 온통 싱글들뿐이라-.”
말끝을 흐린 강 비서가 안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럼, 담에 뵙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더니 이내 휭하니 사라져 버린다.
선물은 뜯어보는 맛?
은조는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포장지에 싸여 있는 상자를 두어 개 흔들어 보았다.
그래 봐야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다온이가 좋아하리라는 것은 안 봐도 뻔하다.
한 번에 이렇게 많이 장난감을 사준 적은 없다.
“아무튼 무조건 돈으로 그냥.”
은조는 하던 말을 문득 멈추었다.
그의 돈 때문에 불행을 피한 게 바로 자신의 가족 아닌가.
그나저나 은근슬쩍 자꾸 선을 넘으려고 들어서 큰일이다.
아침에는 또 얼마나 놀랐던지…….
숨을 쉬기 답답해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처음에는 숙취인 줄 알았는데.
웬걸.
묵직한 팔이 가슴 위에, 더 묵직한 다리가 허벅지 위에 올려져 있었다.
[아아, 정말 자꾸 왜 이래!]
재하를 밀쳐내려 있는 대로 힘을 다 썼지만 그는 잠이 깊게 든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진한 눈썹이 꿈틀꿈틀-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게 빤히 보이는데 말이다.
[반칙 좀 쓰지 마!]
[반칙?]
스르륵- 긴 속눈썹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래! 반칙. 정당하지 못하잖아! 비켜.]
[내가 정말로 반칙을 쓰겠다고 작정했음 넌 벌써-.]
[…….]
[더 자. 새벽이야.]
[하…….]
은조는 그대로 약 40분 정도 엎어져 있었다.
점점 더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지만 그의 무게 때문만은 아니었다.
“…….”
***
민아는 집으로 찾아온 손님에게 막 저녁 식사를 차려주는 중이었다.
“미안해, 오빠. 요리도 못하면서 집으로만 부르고…….”
“아냐! 나, 네가 해주는 거 맛있어.”
선우가 활짝 웃으며 민아가 내민 수저를 받아 들었다.
“거짓말 좀 하지 마.”
“거짓말 좀 하지 마세요!”
난데없이 아니, 눈치 없이 다온이가 불쑥 끼어든다.
“아저씨 거짓말하는 거 아닌데.”
“피자 시켜달라니까! 흥!”
“아- 우리 다온이, 그래서 기분이 별로구나. 그럼, 지금이라도 시키자.”
다온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선우를 바라보는 민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선우가 뱉은 ‘우리 다온이’라는 말에 이유 없이 콧등이 시큰해졌다.
그의 존재를 알게 된 건 6년 전.
처음으로 만났던 건 3년 전.
의사고 간호사다 보니 쉽게 친해졌다.
자주 통화를 하게 된 지…… 꽤 되었다.
이제 언니한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민아야. 사실은 토요일에 밖에서 보자는 얘기를 하려고 오늘 온 거야.”
선우가 머쓱한 듯 뒷머리를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