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장난감 앞에 동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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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장난감 앞에 동구리
2022.11.03.
그래서.
토요일 정오, H호텔 한정식 담(憺).
민아는 선우의 부모와 함께였다.
“여기 이분이 아버지시고, 이분은 우리 어머니.”
“……안녕하세요. 이민아입니다.”
“반가워요, 선우 아비 최병현입니다. 이쪽은 소설가 김남희 여사고요.”
고급스러운 슈트를 맵시 나게 차려입은 노신사의 말에는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선우의 엄마, 김남희가 제 남편을 곱게 흘겨보았다.
“이 양반이 안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또 이러네. 그럼…… 부끄러운데, 한번 안아 봐도 돼요?”
네? 당황한 민아를 덥석 끌어안은 여인에게선 은은한 향기가 났다.
이런 게 엄마 냄샌가…… 속이 왜 울렁거리지.
“반가워요. 긴장할 거 없어요, 우리도 처음 겪는 일인걸.”
남자의 엄마가, 괜찮다는 듯 제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아들은 처음이거든요.”
김남희는 제 품에서 떼어낸 민아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고, 민아는 곁에 서 있는 선우를 바라보았다.
저도 어쩔 수 없다는 미국식 제스처를 하는 선우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툭,
아니지- 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던 걸까.
첫눈에 그렇게 된 것은 분명 아니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던 새카만 밤하늘에 문득 그믐달이 나타났는가 싶었는데,
어느 날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로 변해 있던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최선우.
그를 알게 된 건 3년 전이다.
미국에서 온 잘생긴 의사.
처음에는 그저 생긴 것 못지않게 성품까지 너그럽고 매력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었다.
은조를 집에 데려다주려고 들른 그를 만났을 때는 언니의 지인, 혹은.
언니와 어떤- 남녀 간의 어떤 것이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자매가 아니라 쌍둥이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은조와 민아는 비슷하다.
하지만 민아는 언니가 훨씬 예쁘다고 생각했다.
좀 차갑게 보이는 면이 없지 않지만 그게 오히려 더 은조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럼 저 사람, 미국에서 언니를 보려고 일부러 한국에 온 거야?]
[뭐? 말도 안 돼. 그냥 친구야.]
은조는 저를 만나러 일부러 그 멀리서 왔겠냐며 피식 웃었다.
차를 내어주고 자연스럽게 의사와 간호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빠르게 친해졌다.
국내와 좀 다른 그들의 병원 이야기는 몹시 흥미를 끌었다.
민아는 십 대 소녀처럼 선우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미국 메디컬 드라마에서 본 장면들이 어쩌고저쩌고- 사실이냐- 허구냐- 부럽다- 너무 한다-
기타 등등 바보 같은 질문에도 그는 매우 상냥하게 성의 있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아마 은조가 말리지 않았다면 밤을 새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그로부터 머지않은 시점에 둘은 영상통화로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했다.
실제로 만난 것이 단 한 번뿐인 두 남녀가.
각각 노트북을 앞에 두고.
대체, 어디서 그렇게 쉬지도 않고 길게 늘어놓을 이야깃거리가 솟아났던 걸까.
지금 생각해도 의문이다.
그래도 처음 가슴을 쓸어내렸었던 순간은 정확히 기억한다.
번듯한 직업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하고, 잘생기기까지 한 그가-
[여자친구, 없는데. 하하하하.]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뒷머리를 문질렀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데 얼굴이 왜 달아오르는지. 심장은 왜 튀어나올 것처럼 난리를 피우는지.
민아는 혼자서 작은 비밀을 키우게 되어버렸다고 생각했었다.
[오빠, 피곤하지 않아요? 내가 너무 말이 많았죠? 미안.]
[아냐, 나는 너랑 떠들고 나면 일주일 치 스트레스가 날아가! 신기하지만 정말이야. 미안한 건 오히려 나지. 너 졸리지? 거긴 날 샜겠다.]
[나야 당분간 집에만 있는걸, 뭐. 게다가 건강해서 그런 건지 네 시간만 자면 언제든 충분해요. 피곤하고 그런 거 없어.]
[민아야, 혹시 뉴욕에 올 생각은 없어? 음- 너 기분 나쁠까 봐 조심스럽긴 한데- 내가 비용을 전부 댈 수 있거든. 3일 정도 휴가도 낼 수 있고.]
[아…….]
알고 보니 집안까지 좋았다.
초 긍정 마인드인 민아가 좀 기죽을 정도로.
은행장이셨던 할아버지, 증권회사를 경영하는 아버지, 게다가 어머니는 유명한 소설가라고 했다.
아마 그래서였을까.
저도 모르게 보이지 않는 적당한 선을 긋게 되었다.
편하고 길게 이어지던 대화가 뚝 끊어지고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어느 새벽.
여느 때처럼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선우가 말했다.
[민아야, 들어 봐. 나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좋아. 네가 좋고,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아.]
[…….]
[네가 먼저 원하는 게 아니라면 달라지는 건 어떤 것도 없을 거야. 오빠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응…… 고마워.]
그날 새벽, 잘 울지 않는 민아가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너무 좋아서.
그렇지만 이민아가 더 욕심내면 안 될 것 같은 남자라서.
그런데…….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 어디서 본 적 없어요? 아무래도 낯이 익는 것 같아서요.”
“저는…… 처음 봬요. 너무 아름다우셔서 잊을 수 없는 얼굴이시고. 게다가 저 선생님 책 읽었거든요.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이제 한물갔는데. 그리고 선생님이라니- 그나저나 이상하네. 내가 한 번 본 얼굴을 절대 잊지 않거든. 처음이 아니야, 분명해.”
“나이 들었다는 소리지.”
“어머! 이 양반이 또 그 소리네. 나이든 여자한테 그것도 농담이라고. 흐이그.”
“아니 방금 전에 한물갔다고 말한 사람이 누군데. 이거- 미안합니다. 어서 들어요, 당신 때문에 민아 씨 포크 내려놓았잖아요.”
“아니에요. 저 물 좀 마시려고요.”
“목이 탄다잖아요. 보기는 어디서 봤다고. 조선 시대 남자들이 작업으로 써먹었을 법한 멘트를.”
“어머! 당신이랑 내가 만나게 그럼 조선 시대였구나. 아니, 그럼 대체 내 나이가 몇이야.”
풉- 민아가 물을 뿜었고 선우가 얼른 냅킨을 쥐여 주었다.
“오- 제발요. 점잖고 멋지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저 너무 창피해요!”
“미안, 아들. 나도 이게 처음 겪어보는 일이잖니, 떨려서 그래. 떨려서.”
“네 엄마가 떨린다고 옷을 몇 벌이나 갈아입은 줄 아니.”
“당신 어제 브라이트닝 슬리핑 팩 붙이고 잔 얘기부터 할까요.”
“어허- 이 사람이. 자, 당신 좋아하는 뼈에 붙은 살.”
병현이 커다란 고깃점 하나를 남희 접시에 올려주었다.
“어머, 애들 보는데 주책이야.”
원래 저렇게들 노셔. 속삭인 선우가 쓴웃음을 웃는다.
“너무 보기 좋으세요, 부럽기도 하고요.”
“뭐가 부러워, 너희들도 우리같이 살아. 안 어려워. 어머, 너희라고 했네요. 미안, 민아 씨.”
“아니에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병현이 미소 지었다.
그렇게 어색하고도 따듯한 시간이 무르익어 갈 때 즈음.
다온이- 알고 계셔? 민아가 선우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응, 말씀드렸는데.”
“……아.”
“혹시, 애기? 사진도 봤는걸. 너무 귀여워, 꼭 우리 선우 어릴 적 같아요. 빨리 만나고 싶다.”
“사실은, 언니가 키우고 있어요.”
“음, 그것도 들어서 알아요. 그런데 사정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선우랑 결혼하면 아이는 직접 키우는 게 어떨까. 언니도 아직 결혼 전이라고…….”
“아버지.”
“……결혼이요?”
민아가 둥그런 눈으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아직 그런 깊은 얘기는 안 했어요. 그냥…….”
“사랑하는 여자를 소개해준다고 했지! 얘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답답해.”
“어머니, 저 로즈벨트 하스피틀 닥터예요. 그 어렵다는…….”
“아이가 있는데도, 제가…… 괜찮으세요?”
민아의 질문은 무거웠지만, 남희의 음성은 정반대다.
“아이가 있으니까 더 괜찮은 거 아닌가. 우리 마음을 알 거 아녜요. 아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
“민아 씨도 다온이의 행복을 위해서 언니랑 더 의논하고 고민해 봐요.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지, 뭐.”
“……네.”
민아의 고개가 숙여지는가 싶더니 흰 테이블 보 위로 후두두- 눈물이 떨어졌다.
“에이- 엄마가 뭐 이렇게 여려. 셋은 더 낳아봐야 정신을 차리겠네.”
화장실에 좀 데려다줘. 핸드백을 연 남희는 손수건을 꺼내 아들에게 건네주었다.
.
.
“……나 너무 행복해요. 이래도 돼요?”
“그럼 내가 고맙지. 너무 고마워. 부담스러워할까 봐 걱정 많이 했어.”
“……완전 좋으신 분들 같아요.”
“근데 왜 울어, 맘 아프게.”
“모르겠어요. 너무 좋아서 그런가. 나는요, 사실…… 누구에게 이런 따듯하고 진심 어린 대우를 받았던 기억이…… 없었던 것 같아요.”
“이제 실컷 받으면 되지. 그런데 갑자기 왜 높임말 해.”
선우의 부드러운 손길이 붉어진 민아의 눈가를 쓸었다.
“그것도 모르겠어요. 막 어지럽고 꿈꾸는 것 같고.”
“꿈 아냐, 그리고 은조 씨랑 다온이가 있는데 왜 진심 어린 대우를 못 받아.”
“둘은 가족이잖아요. 내 말은, 남한테…….”
선우는 민아를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랬구나.”
“……키워준 부모님도 티는 안 내려고 하셨지만, 그건 개나 고양이들도 알잖아. 저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물론이지. 그럼…… 내가 너 사랑하는 건 언제 알았어?”
흐어엉- 왜 이래. 나한테 왜 이렇게 다정한데- 민아의 눈물이 선우의 셔츠를 제대로 적셨다.
***
“안녕하세요.”
재하는 뒷짐을 진 채 예의 그 배꼽 인사를 하는 미니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보니 좀 귀여운 것도 같고-
“안녕, 동구리.”
“저는 윤다온인데요.”
“아 동그라미는 너무 길어서. 애칭이야. 애칭 뭔지 알지?”
손부터 씻자- 눈꼬리를 치켜 올린 은조가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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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앞에 장사 없다고 했다.
아니, 장난감 앞에 애, 없다 인가?
은조는 딱 두 개 정도만 꺼내 놓으라고 말했지만.
재하는 크기가 다른 상자들을 전부 거실 중앙에 쌓아 올렸다.
마치 크리스마스트리 같군- 아후, 머리야.
알록달록, 상자를 싸고 있는 종이의 색깔은 보기만 해도 눈이 돌아간다.
“어! 엄마, 저거 봐!”
녀석, 똑똑하군.
직감적으로 저와 관련 있고, 그것도 좋은 쪽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버리다니.
주식을 좀 가르쳐 볼까.
은조의 눈에 가지런하고 하얀 재하의 치아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