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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아빠 역할 놀이_99.99% (46/100)


46. 아빠 역할 놀이_99.99%
2022.11.07.



“우와아아아!”

입이며 눈을 크고 동그랗게 벌린 다온이가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을 높이 들어 보여주었다.


 
RC카(RC car-무선조종 자동차)였다.

재하는 쓸만하다는 듯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음- 람보르기니군.”

“네, 노란 차예요!!”

“동구리, 따라 해봐- 람보르기니.”

“람보으기니.”

“라암-보르-기니.”

“적당히 해. 어차피 장난감이야.”

잔뜩 쌓여 있는 상자들을 보고 심기가 불편해진 은조가 톡 쏘아붙였다.


“무슨 소리야, 적당히, 라니. 누가 애를 적당히 키워? 동구리, 잘 들어봐.”

“……?”

“이 차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스포츠카 제조업체인 람보르기니의 대표적인 스포츠카야. 차 이름은 ‘시안’인데 볼로냐어로 ‘번개’라는 뜻이지. 내 취향은 아니지만 너와는 썩 잘 어울리는구나. 흠- 노란색.”

“번개! 아주 빠르고 날쌘 사람을 뜻해요!”

“그렇지! 놀라운걸.”

재하가 거보란 듯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은조를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는 은조는 눈동자를 굴렸다.

누가 보면 애 서넛은 키워 봤는지 알겠네.


“그냥 장난감이라고 사다 던져주기만 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안 그래?”

“그럼, 6살짜리한테 람보르기니 시안은 무슨 의미가 있겠어? 말해 봐!”

“방금 볼로냐어를 하나 알았잖아! 게다가 바로 은유적인 표현까지 읊었다고! 듣고도 몰라? 너는 네 아이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잘났어- 은조는 널려 있는 상자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누가 전부 꺼내 놓으라고 했어. 난 분명히 두 개만이라고 말한 것 같은데.”

“그럼, 네가 어디다 버리고 오든가. 동구리, 들었어? 네가 정해 나머지 상자들도 풀지 말지.”

다온이가 은조의 눈치를 살폈다.


“……엄마.”

“넌, 애를 기죽이기까지 하는구나! 윤다온, 다 네 꺼야. 당장 모두 풀어 봐도 돼.”

어서- 재하가 나머지 상자들을 다온이 앞으로 밀었다.

망설이는 아이가 제 어미의 안색을 살핀다.


“하…… 일단 두 개만 더 풀고 나머지는 나중에- 그게 더 재미있지 않을까?”

말 끝나기 무섭게 다온이는 저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상자의 포장을 야무지게 뜯어내기 시작했다.

별 이상한 논리를 보겠네. 재하가 중얼거렸지만 은조는 못 들은 척했다.

일일이 대꾸했다가는 저만 피곤해질게 불 보듯 뻔하다.


“점심은 뭐 먹을까? 강아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딩동-


“피자랑 치킨 시켰는데.”

“와아아아아!!”

자리에서 일어서 방방 뛴 다온이는 이제 재하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저씨 최고!!”

“고맙다.”

 

.
.



“미국의사협회저널(JAMA)에 실린 의학전문대학원의 연구 결과를 보면, 25세 이상 성인 가운데 남성의 70%, 여성의 66%가 비만이거나 과체중이거든. 즉 3명 가운데 2명이 몸무게가…… 하…… 지나치게 많이 나간다는 얘기지.”

무시로 일관하는 은조와 다르게 그저 씨익 웃은 다온이가 닭다리 하나를 재하에게 건넸다.

꽤 큰 마음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고맙지만 엄마 줘. 아저씨는 충분히 먹은 것 같아.”

이미 포크를 내려놓은 지 한참이나 된 재하는 언제 준비했는지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엄마는 날개를 좋아해요. 뻑뻑한 가슴살이랑.”

“아, 날개랑 가, 슴. 기억해 둘게.”

기억할 필요 없어- 날개의 살을 바르는 은조는 여전히 새침하고 냉랭하다.


“미국인들의 각종 식생활 계획이니, 운동 캠페인은…… 사실상 실패했다고 봐야 해.”

“……?”

다온이는 그가 뭔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면서 눈이라도 마주치면 마냥 귀여운 웃음부터 만든다.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는 외식문화와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등…… 움직이지 않으려는 생활 습관이…… 가장 큰 문제지.”

“내게 차를 내어준 건 누구지. 기껏 배달을 많이도 시키고 먹지 말라는 건 또 뭐야.”

“엄마는 음식을 남기는 걸 제일 싫어해요. 음식을 버리면 지옥에 갈 수 있고 거기 쌓인 걸 전부 먹어야 한댔어요. 우웩.”

“다온아.”

“그래. 그런 것 치고, 엄마는 꽤 날씬하구나.”

재하의 노골적인 시선이 니트 원피스를 입은 은조의 몸매를 죽 훑었다.

저에게 지옥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왜 뇌가 없는 인간처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들을 길게 늘어놓는지, 아직 수컷이라고 할 수 없는 동구리는 절대 알 리 없지만.

윤은조는 알아야 한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

신축성이 좋은 옷감은 거의 피부의 굴곡을 있는 그대로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어디 보여주기만- 들어간 곳은 더 들어가 보이고 나온 곳은 더욱 나와 보이다니.

권재하는-

내내 야생마처럼 날뛰는 ‘본능적인 욕구’를 통제하고, 숨기기 위해 두뇌의 99.99%를 사용하고 있었다.

식욕 따위가 생길 리 만무하다.

왜 나와 둘이 있을 때 생전 안 입던 저런 야한 옷을, 동구리가 온 날 입은 것일까.

나를 엿 먹이려는 의도인 게 분명하다.


“…….”

은조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원피스의 허리부분을 살짝 잡아당겼다 놓았다.

집에서는 편하다는 이유로 자주 입던 옷인데 갑자기 너무 불편했다.

이게 이렇게 몸매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옷인 줄은 미처 몰랐다.

아이와 민아를 상대로는 한 번도 불편한 적이 없었던 최애템인데.


“하…… 동구리, 안되겠다. 먹었으니 소화 좀 시킬까. 에너지를 좀 써야지. 산책 가자. 신나지?”

“우리 다온이가 강아지야? 뭘 신나.”

“다온이 강아지 맞는데. 엄마가 매일 강아지라고 부르잖아!”

“오케이. 동구리 강아지, 나가자.”

“네!”

둘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은조는 옷부터 갈아입었다.

의식한 것 같은 게 또 어색하지만 그 끈적끈적한 눈길을 더 참아낼 자신도 없었다.

.
.

30분 만에 들어온 다온이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입에 자물쇠라도 채운 듯 아무 소리 안 하는 재하를 두고 은조는 아이를 욕실로 데려갔다.

은조가 잠옷을 입은 다온이를 데리고 1층으로 내려왔을 때 소파에 앉아 있는 재하가 보였다.

빨리 오라는 손짓을 하는 그는 리모컨을 쥐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먹기 좋게 다듬어놓은 멜론과 샤인머스캣이 담긴 접시가 있었다.

그녀는 당황했다.

아주 오래전 다정하기 그지없던 그 권재하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하지만 그가 고른 만화가 문제였는지, 긴 산책이 문제였는지. 과일을 몇 조각 먹은 다온이는 잠이 들어 버렸다.

은조가 제 무릎을 베고 누운 아들의 머리를 쓸어준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재하는 TV의 스피커를 꺼버렸다.


“…….”

“…….”

평화롭다.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같은 생각을 하던 둘의 눈길이 마주 닿았다.


“기억나? 와인 마신 밤에 네가 한 말.”

“어떤.”

“잘생기고 착하고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고 했어. 다온이 아빠가.”

“모르겠어. 기억 안 나.”

“내가 기억해, 아주 정확하게. 그는 잘생기고 착한데 좀 여리다.”

“잘생긴 건 맞지만 마음이 여리다는 것은 취소야. 나쁜 인간이라는 말이 더 맞겠어.”

윤은조, 너…… 지금 누구 얘기를 하는 거야.

말짱한 정신으로는 딴소리를 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재미있네. 재하의 표정은 담담했다.


“의외네 나쁜 인간이라니. 경솔한 행동이랑 거리가 한참 먼 윤은조가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대체 뭐가 궁금한 거야. 상관도 없잖아.”

“아이 키우는데 젊음을 다 바치기로 작정한 건가 싶어서. 내가 기억하는 윤은조는- 퍽 뜨거운 여자였거든.”

“나는 이제, 그런 쪽에 관심 없어. 관심 있다고 해도…… 돈이 얽혀 있는 사람과는 못 해.”

“그것에 관심이 없다, 나랑은 돈이 얽혀 있어서 하고 싶어도 못 하겠다- 이렇게 알아들으면 되나.”

“애가 듣겠어!”

“동구리도 수컷이야. 언젠가는…….”

아아- 그만- 아이의 귀를 손바닥으로 덮은 은조는 재하를 향해 눈을 홉떴다.

뭐가 좋은지 빙긋 웃는 얼굴이 너무 얄미웠다.

***



“기억났어!”

창밖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김남희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민아가 보여준 은조의 얼굴을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놀랐어요! 그래 뭐가 기억이 났는데.”

들고 있던 책을 잠시 덮은 병현이 아내를 다정한 눈길로 바라본다.


“여보, 당신도 잘 생각해 봐요! W호텔 사랑 싸움하던 연인요!”

“그러네, 그럼 권재하 대표랑 민아 씨가…….”

“언니의 남자.”

“글쎄요.”

설핏 눈살을 구긴 병현이 다시 책을 열었다.


“보고도 이러신다. 기억이 안 나요?”

머리 위에 올려두었던 안경을 내려쓴 남희는 휴대폰 검색창에 ‘권재하’ 세 글자를 찍었다.

그리고 한동안 놀라움 가득 담긴 감탄사를 연속으로 터뜨렸다.


“세상에, 아니 우리 며느리가 이런 대단한 형부를 둔 거예요? 여보, 이 사진 좀 봐요! 너무 잘생겼어.”

“잘생긴 건 아는데.”

어어…… 감탄사가 탄식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때 그 두 사람 무지 뜨거웠는데. 내가 착각한 거라고요?”

“맞아요, 권 대표는 약혼자가 있어. 미국 석유 재벌 넬슨 와즈먼의 손녀.”

“…….”

원래 흥미로운 이야기라며 뭐든 즐겨 보고 읽는 남희였지만 사실 유명인들의 기사는 예외였다.

작위적인 것은 물론이고 감동은 찾아보기 힘들다며-

그런 그녀가 한참이나 기사를 뒤지는 모습을 병현은 가끔 눈길을 들어 쳐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 이거네……!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딱 알겠어!”

병현은 여러 가지 빛을 담은 아내의 눈을 마주했다.

단순한 흥미 뒤로 보이는 따뜻함과 감동. 그리고 아련함에 서글픔이 깃든, 깊고 오묘한 눈빛.


“그래서, 당신이 찾은 게 뭔데? 궁금하니까 어서 말해 줘요.”

“……여보, 나 다음 작품에 대한 구상이 마구 떠올라요. 너무 설레. 어떡해!”

“같이 좀 설렙시다. 응?”

“그래!!”

“아, 이번엔 또 뭔데?”

“이건 계시야. 후- 최병현 씨, 부탁 좀 들어줘요. GM투자증권 회장 취임식, 루이 벨몽도 회장 취임 파티요! 거기에 권 대표 좀 불러 줘요.”

“이미 초대자 명단에 있다고 알고 있어요. 겨우 그게 부탁이야?”

“예쓰! 할레루야!”

“아니, 또 무슨 엉뚱한 짓을 하려고 이러시나.”

“별거 아니에요! 당신은 신경 쓰지 말아요.”

안경을 고쳐 쓴 남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전부를 불러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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