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내가? 너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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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내가? 너랑?
2022.11.10.
자정이 지난 시간.
DL 그룹 회장 왕덕진의 자택은 깊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외부의 시선 차단, 즉 사생활을 보호하겠다는 차원으로 심어진 키가 큰 나무들이 길고 높은 담장을 따라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고요하게 잠이 든 저택의 공기는 으슥할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불빛 한 점 없는 2층.
그런 분위기를 신경 쓸 여유가 없는 왕나나가 까치발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으로 긴 출장을 떠난 둘째 오빠의 방에 들어간 그녀는 쉽게 자동차 키를 찾아냈다.
그녀의 아비 왕덕진은 나이가 들기 전부터도 완전한 새벽형 인간이었다.
늦어도 밤 10시면 잠자리에 드는 그는 새벽 4시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차상윤을 만나고 와야 했다.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엄마 이성자까지 녹록하게 굴지 않았다.
신용카드와 자동차 키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무슨 영문인지 두 시간 뒤쯤 휴대폰까지 가져가 버린 것이다.
“씨X! 어떤 병ㅅ-”
도둑처럼 소리도 없이 움직이던 나나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어내다가 바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왕덕진에게 정보를 흘린 게 분명한데, 정확히 누구인지 어디까지인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이유는 더더욱 모를 일이다.
최근에 어느 모임에서 같은 드레스를 입고 왔다는 이유로 심하게 모욕을 주고 왕따를 시킨 애가 문득 생각나기는 했지만.
이제까지 했던 짓들과 비교해 봤을 때 그 정도는 애교고 애들 장난 정도의 수준이다.
그 바보 같은 계집애가 이런 큰일을 벌일 배짱도 못 되고.
.
.
“아이- 샹.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상윤이 이사한 오피스텔을 찾아 한참이나 길을 헤맨 나나는 욕지거리부터 뱉었다.
겨우 빌딩을 찾았는데 주차장 입구를 찾느라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돌고 돌았다.
간신히 차를 세우고 올라가니 이번에는 상윤의 냉랭한 태도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냐, 물이라도 마시겠느냐- 뭐 그런 빈말도 하나 없이 바로 소파에 널브러진다.
마음이 다급한 나나는 상윤의 근처에 빠르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리고 숨넘어가게 제가 직면한 어이없는 상황을 길게 설명했다.
“뭐가?”
내내 먼 산을 바라보던 상윤이 돌이라도 씹은 것처럼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이제야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먹은 것인가- 다소 안심한 나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야, 시킨다고 하냐? 내가 너랑? 이제 내가 너랑 할 마음이 있는 건 맞담배질 정도다. 하…… 어떡하냐, 나 이제 너 여자로도 안 보여.”
잔뜩 구겨진 잠옷 차림에 씻지도 않은 몰골인 상윤이 손을 내저었다.
은조를 만나고, 그녀 곁에 붙어 온 잘난 놈을 겪은 그는 다시 병 걸린 닭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만사가 시들시들, 신이 나서 맡았던 일도 동료 변호사에게 넘겨버리고 이렇게 두문불출 집에 처박혀만 있다.
그렇다고 또 선뜻 나서기에는 상대가 너무 세게 느껴졌다.
“너, 그 자식이랑 은조랑 뭐 있는 거 알면서 날 끌어들인 거지? 너 혼자선 어떻게 못 하니까.”
“야!! 미쳤어!!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지금! 너랑. 나랑. 결혼을 하게 생겼다고, 어!!”
“아휴- 귀청이야. 너 그 거지발싸개 같은 말본새부터 고치지 않음 권재하는 커녕, 누구랑도 안 돼, 알어? 여자가 사분사분한 맛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원.”
“걱정도 팔자셔.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그리고 나 재하 오빠 앞에서는 절대 이러지 않거든.”
“연기도 하루 이틀이지. 그 자식 눈빛이 보통이 아니던데 여태 너 같은 거 속을 모를까. 그냥 두는 거지. 너~무 관심이 없는 나머지.”
“말 다 했냐! 여자 하나도 어쩌지 못하는 게 누군데!”
“전의 상실이야. 나 이런 상태 찾아오면 시간밖에 약이 없다는 거 알지? 그리고 걱정 붙들어 매. 내가 아무렴, 아무리.”
크하하하- 상윤이 미친 사람처럼 배를 쥐고 웃는다.
“내가? 이 차상윤이? 다른 여자도 아니고 너랑?”
우하하하- 하이고 배야-
“이 차상윤이 왕나나랑? 결혼을?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나나야!”
“이런 샹- 말을 해도 참 재수 없게 하네. 누군 아니냐? 그럼 알아서 처리 잘해. 우리 집에서 연락 가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게 단도리 제대로 하라고.”
“근데 너희 부모님은 왜 갑자기 나야? 내가 어디가 좋으시다고?”
“좋아서겠어!!! 아빠가 우리 사이를 아셨다고, 아까도 말했는데 정신 안 차리지!!”
“아, 그만 꺼져라, 떽떽거리는 거 아주 진상이야. 가, 나가라고!!”
“차상윤, 나 카드 좀 한 장만 빌려줘 봐.”
아휴, 꼴통- 상윤이 또 혀를 찼다.
***
캐릭터 분석- 윤은조- 29세, 디자이너, 매우 예쁘다.
신기하게도 눈빛에 무심함(차가움)과 뜨거움이 공존한다.
165 정도의 키에 가녀린 느낌의 외모.
맹수에게 물려 본 적이 있는 사슴?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으로부터 도망가려는(숨으려는) 것일까.
★★★미혼인데 동생의 아이를 키운다.
왜???
권재하- 30세, 블랙스톤 파트너스 한국지사 대표(그룹 후계자).
185 정도의 키, 늘씬하고 맵시 있는.
과하지 않은 정도의 근육을 소유했음, 품종이 훌륭한 종마 같은 느낌.
영앤리치 톨앤핸섬의 전형적인 예.
상반된 평가들- 외모만큼 마음도 따듯하다. 혹은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냉혈한, 재벌의 표본이다.
“크…… 멋져. 이거지, 뭔가 비밀스럽잖아. 확실한 게 없어. 그저 그럴 것이다- 대충 그렇다- 짐작이 전부잖아.”
노트북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W호텔 레스토랑 엘리베이터 앞에서 보았던 권재하를 떠올려보는 김남희의 눈이 가늘다.
실제로 본 것은 단 한 번이지만-
윤은조를 바라보던 그 눈길은…… 정말이지 그저 뜨겁다는 말로는 절대 부족하다.
표현할 만한 적당한 문장이 내내 떠오르지 않았다.
중견 소설가로서 자존심이 상할 정도다.
“반드시 비밀을 알아낼 거야. 궁금해서 미치겠네.”
[과거에 어떤 인연이 있었던 것은 맞는데 저도 확실한 것은 모르겠어요. 실은 물어보려고 적절한 타이밍을 재고 있거든요.]
민아도 정확하게 아는 게 없었다.
“미안. 우리 며느리, 이것은 작가로서의 순수한 호기심이야. 선은 넘지 않을게.”
어쨌든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다. 저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한 남희는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문제의.
나탈리 와이즈먼. 30세, 전형적인 백인 미녀- 하는 짓은 전혀 전형적이지 않음.
6년 전에 하버드 대학 친구였던 권재하와 갑자기 약혼.
이후에는 직업을 핑계로 세계를 떠돌아다님.
그녀의 사진에 항상(혹은 거의) 등장하는 갈색 머리 주근깨 ★★★‘로라 베일리’를 주목할 것.
같이 환경단체를 만들고 같은 목표를 위해 달림- 무엇을 뜻하는가?
“얘가 핵인데…….”
김남희는 화면을 바꾸고 검색창에 [Natalie Wiseman]을 입력했다.
이제부터는 영어기사 위주로 그녀의 행적을 따라가 볼 계획이다.
노트북을 펼치기 전 남희는 친분이 두터운 의상 디자이너와 긴 통화를 했다.
젊고 예쁜 여자들에게 선물할 드레스에 대해 디자이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새로우면서도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그녀들의 머리카락 색이나, 피부의 톤. 심지어 디자이너는 어떤 꽃이 떠오르냐는 질문까지 해서 남희를 웃게 만들었다.
외모에 대한 이야기, 아직 제대로 모르는 취향에 대한 어림짐작.
긴 통화를 이어나가는 내내 즐거웠다.
인연이네-라고 디자이너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을 때는 왠지 가슴이 먹먹했다.
선우는 똑똑하고 올곧은 아들이지만 키우는 재미는 없었다.
일찌감치 세운 제 목표만을 좇았다. 조부모가 있는 미국으로 가겠다던 어린 아들의 결정에 섭섭해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 예쁜 딸을 한꺼번에 둘씩이나 얻은 것이다.
문득 민아가 떨구던 닭똥 같은 눈물을 떠올린 남희는 뜨끈해진 눈가를 문질렀다.
가엾은 것들. 얼마나 힘들게 자랐을까.
***
재하의 집무실.
“전에 만나신 적이 있으시죠. 저도 같이 만났었는데- 재작년 크리스마스 파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난 그전에도 서너 번 본 적이 있어. 아주 성가신 노인네야.”
마지막 서류를 뒤적이는 재하가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알만하다는 표정의 강 비서가 소리 없이 웃었다.
‘루이 벨몽도’를 두고 나누는 대화였다.
이번에 GM투자증권 한국 지사의 새 회장으로 취임하는 파리지앵(parisiense)을 재하는 그렇게 불렀다.
‘아주 성가신 노인네.’
루이 벨몽도는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물론 한 번 겪어본 사람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파티 광이다.
60이 머지않은 나이에도 술과 여자를 찬양하며 밤새워 노는 것을 절대 부끄러워하지 않는 독신남이다.
“그래도 실력이 뒷받침해주잖아요. 욕을 먹는 만큼 그의 타고난 경영능력을 높게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여태 살아 있겠지.”
“턱시도를 입으실 건가요?”
“아니, 올 블랙. 별로 달갑지 않음의 표현이랄까.”
그런데 그건 왜- 재하가 서류에 있던 시선을 들어 강 비서를 쳐다본다.
“파트너와 드레스 코드를 맞추라고 초대장에 적혀 있던데요.”
망할 노인네- 가지가지 하는군.
“…….”
서류 안에 이미 다른 그림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래, 또 시작이군-
주의를 분산시키고, 전혀 다른 어떤 것에게로 생각을 돌리게 만들지.
멋대로 나를 흔들고, 쥐락펴락-
하…… 윤은조, 너.
그러고 보니 특별하고 예쁜 옷을 입혀본 적이 없다.
옷 선물이라면 그저 지나가는 말에도 한사코 거절한다고 고집을 피웠었다.
“…….”
방에 잔뜩 넣어둔 옷들에 손도 대지 않는 은조를 떠올린 재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고집쟁이.
고집불통…….
블랙 미니 드레스를 입히면 예쁘겠지.
피부가 더 투명해 보일 거야.
쇄골 정도만 보이게, 가슴은 가리고 가는 어깨와 팔이 드러나면 최고겠어.
부러질 것 같은 발목은 어쩐다.
“…….”
요사스러운 뇌가 구체적인 이미지를 빠르게도 만들어 내더니, 보드랍고 따듯한 살내음까지 느끼게 만든다.
“이런, 씨X.”
“어디 불편하십니까?”
“하…… 아무것도 아냐.”
그만 나가 봐. 미간을 좁힌 재하가 강 비서에게 손짓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