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 욕망하거나 멸시하거나 (48/100)


48. 욕망하거나 멸시하거나
2022.11.14.


헉!

집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나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잠옷 차림의 왕덕진과 이성자가 거실 중앙 소파에 앉아 있었다.


“…….”

“앉아.”

왕덕진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지만 어디를 가리키지는 않았다.

근처 소파에 앉아야 하나, 바닥에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왕나나는 인생에 처음 해보는 고민 앞에 갈등하며 엉거주춤 제자리에 서 있었다.


“아빠, 나 잠깐 요 앞에 친구…… 아니, 급하게 필요한 게 있어서…….”

“앉으라고.”

왕덕진의 목소리가 더욱 낮고 무겁게 갈라졌다.

최대한 멀리 소파 끝에 엉덩이를 가져다 붙인 순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사람.

별관에 살고 있는, 이 시간에 잠이나 자고 있어야 하는 게 맞는 아버지의 수행비서 김 실장이었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편안한 일상복 차림이었다.

더 이상 커질 수 없는 눈으로 김 실장을 위아래로 훑던 나나는 그제야 제가 뒤를 밟혔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귀싸대기라도 얻어맞는 건가. 역시 소파가 아니라 무릎을 꿇어야 했나 봐.


“말해보시게, 싹 다.”

“아가씨는 새벽 1시 7분에 집을 나서셨습니다.”

“아니, 시간이 늦었으니 짧게 하시게. 주어, 경어 전부 생략, 내용만.”

팔짱을 낀 왕덕진은 무표정이다.

나나는 그게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왕 전무님의 차를 이용, 상암동 A오피스텔까지 40분 소요.

-오피스텔 709호 차상윤 씨를 만남.

-약 30분가량 같은 곳에 머물다, 새벽 2시 25분 오피스텔 주차장을 벗어남.

-집 도착까지 25분 정도 걸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이 새벽 3시고.”

김 실장에게 나가보라는 손짓을 한 왕덕진이 소파 옆 테이블 위에 있던 자수정 장식품으로 손을 뻗친 것은 찰나였다.

퍽!


“악!!”

요란한 파열음과 모녀가 지른 비명이 동시에 거실 공기를 찢었다.

대리석 벽과 바닥을 차례로 때린 자줏빛 돌덩어리는 두 조각으로 쪼개져 있었다.

넓고 넓은 벽 가운데, 하필 이성자가 아끼는 그림이 걸려 있던 곳. 가운데가 움푹 팬 산수화는 처참한 몰골이다.

왕 회장의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신이. 알아서 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콧김을 내뿜은 왕덕진은 바로 자리를 떠나버렸다.

나나는 두 귀에 올려둔 손을 내리지도 못하고 제 어미의 눈치를 살핀다.

아비 못지않게 차갑고 냉랭하게 변한 눈빛의 이성자가 최후통첩을 내렸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해.”

“어, 엄마.”

나나가 입꼬리를 내려뜨리며 바로 울 것 같은 표정을 만들었지만 이성자의 반응은 전에 없이 싸늘했다.


“아빠가 아는 것 이상으로 엄마가 알아냈어.”

그녀도 제 선에서 남편이 알고 있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는 최악의 상황임을 스스로 인정했다.


“아빠가…… 뭘 아는데? 내가 뭘 얼마나 잘못…….”

“최대한 빠르게 그쪽 집에 연락을 넣을 거야. 거기야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겠지. 든든한 돈줄이 생기는 거나 다름없는데.”

“엄마, 제발…….”

뒤늦게 바닥에 꿇어앉은 나나가 손바닥을 열심히 비볐지만 보이는 것은 어미의 등이었다.

억지로 짜내려던 눈물이 바로 자취를 감추었다.

분을 삭이며 2층으로 올라가는 나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하란다고 그냥 하면 왕나나겠어, 꽝나나지. 흥!”

 

***


 
화창한 날씨다.

이렇게 좋은 날 외근이라니- 은조는 오랜만에 상쾌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점심을 먹고 급체한 주니어 디자이너를 대신해 외근을 나왔다.

광고 영상을 제작할 비주얼 아티스트 겸 아트디렉터 임태승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아름다운 영상미는 물론 은유적인 표현으로 유명한 그는 섭외하는데도 꽤 정성이 들어간 인물이다.

회사와 집 중간쯤에 위치한 스튜디오는 찾기 쉬웠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진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그는 은조를 환대했다.


“반갑습니다. JS Pharm 디자인 팀 윤은조라고 합니다.”

“커피 좀 내릴 건데 별건 없지만 구경 좀 하고 계실래요?”

“네!”

잘 모르는 영상 장비들을 잠시 기웃거리던 은조는 결국 햇볕이 가득한 창가 근처에 멈추어 섰다.

허브가 심어져 있는 화분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커피 향기가 코끝에 와 닿았다.

.
.



“당연히 국내는 물론 전 세계 네티즌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고 있으시겠죠.”

“감독님은 젊은 층의 콘텐츠 소비가 많은 사이트에 구독자가 13만 명에 달하는 자체 채널을 운영하고 계시잖아요, 솔직히 회사는 극적인 효과를 기대하고 있어요.”

따듯한 머그를 들고 있는 은조가 흐리게 웃었다.

이제까지 진통제 시장의 강자였던 JS Pharm의 ‘멜리즈’은 잇따른 경쟁사들의 신제품 출시로 치열한 주도권 싸움에서 간신히 체면만 유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회사가 매각되고 주인이 바뀐 마당이니 더욱 입지가 위태롭게 생겼다.


“너무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회사는 멜리즈를 메가브랜드로 육성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다양한 방면에서 브랜드 강화 전략을 펼치고 있다고 알고 있어요.”

은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튜디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무의적으로 일단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은조 씨?”

“안녕하세요!”

이연경이었다.


“와, 이런 우연이! 안 그래도 나 은조 씨 너무 궁금했는데.”

눈치 빠른 임태승은 연경을 위한 커피를 내리겠다며 바로 자리를 떴고, 남은 두 여자는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저를 왜요- 걱정이라도 하셨어요?”

그날의 일이 생각난 듯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걱정도 했고, 뭐 그 이후에 제가 또-.”

“……?”

“이거 말해도 되겠죠, 어차피 이미 그 방을 쓰고 있다고 들었는데.”

“……네? 방, 이라면?”

“권재하 집 2층, 그 화려한 기둥 달린 침대, 제가 준비한 거예요! 놀랍죠?”

은조는 사실 네 귀퉁이에 엔틱한 모양의 기둥이 있는 그 침대를 보자마자 매우 놀랐었다.

어느 나라 공주를 위한 것인가 해서.

그러나 바로 나탈리 와이즈먼은 공주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냥 바닥에서 잘까-하는 생각도 했었다.


“…….”

“헤드와 후드의 곡선미가 정말 대단하죠? 원래는 제가 갖고 싶어서 찍어두었던 건데 은조 씨한테 양보했어요.”

“……아.”

“사실은 너무 비싸서 못 산 걸 권재하 카드로 긁은 걸로 만족한 거죠. 하하- 어쨌든 ‘이거 주세요!’는 제가 했잖아요.”

하하- 그녀가 또 웃었다.


“……네.”

어수선한 은조의 마음도 모르고.


“그냥 로맨틱하고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에요. 마호가니 원목이라서 견고해요,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침대라는 거죠.”

그녀가 또 맑은 웃음소리를 낸다.


“다른 것들은요?”

“네? 다른 것들이라면…….”

“커튼이니 조명이니 기타 등등 나이트 웨어랑 속옷은요? 쓸 만하죠? 나름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 방에 있는 물건들이, 아니, 그 방이 그럼…….”

“네! 은조 씨 건데, 몰랐어요? 전부 은조 씨 거예요!”

권재하와 마찬가지로요-

연경은 그 소리를 덧붙이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런데 왜 사색이지.


“혹시- 마음에 안 들거나 불편한 게 있어요? 서쪽 방인 것을 감안하면 커튼이 좀 무겁기는 한데.”

“아니요!”

아니에요- 은조가 손사래를 친 찰나 연경에게 커피 잔이 건네졌다.

***

이 방을 써- 그는 분명히 그렇게만 말했었다.

하긴, 노예로 들인 마당에 널 위해 준비했어-도 웃기긴 하지.

그의 입에서 나왔던 ‘거적때기’란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그냥 좋은 집에 어울리는 것들을 준비했겠지- 하…….

아니면 뭣도 없는 주제에 여전히 자존심만 내세우는 게 비위에 거슬렸던가.

욕망하거나 멸시하거나.

권재하는 그 두 개의 시선을 번갈아 가며 윤은조를 옭아매고 있다.

그저 당해주는 게 최선인데- 왜 자꾸 어디선가 6억이 뚝 떨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조금만 참으면- 곧 답답한 새장을 벗어날 것 같은 느낌.

하…….

너무 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망상에 빠진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순간 집에 도착했다.

.
.



“너무 잘 됐다! 어쩐지 네 눈빛이 심상치 않더라니!”

은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쁘면서도 동시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커다란 눈에 드리운 그늘을 발견한 민아가 은조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이야. 오빠를 보면 알잖아, 너무 좋으신 분들이셔. 그리고 언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셔. 그래서 이거-.”

“뭐야, 이게?”

“직접 봐.”

“레이디 페리? 의상 디자이너잖아. 숍 초대장……?”

“내일이라도 가야 돼. 오빠 엄마가 한복 대신이라고 하셨어. 예물을 준비할 필요는 없는데 우리는 받아야 한다고 그러시네. 언니 생각은 어때?”

“너를 되게 마음에 들어 하셨나 보다. 근데 상견례에 이런 걸 입어야 하나.”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자리라고 하셨어. 그냥 가족끼리 모이는 자리보다 조금 더 큰 모임? 그냥 받자, 언니. 주시는 걸 거절하는 것보다 받아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응?”

“……그래, 알았어.”

“고마워, 언니.”

“내가 결혼 안 하면 너도 절대 생각 없다더니? 아주 며칠 사이에 얼굴이-.”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선우 오빠랑 당장 결혼한대? 전혀- 이제 막 마음을 서로 털어놓았을 뿐이야. 나, 이번에는…… 좀 신중하려고.”

“뭘 신중해. 선우 씨는 의심할 필요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말인데, 내가 모르는 얘기가 더 있지? 이참에 다 알려 줘, 응?”

“그런 거 없어. 이제까지 겪어보니 그렇다는 거야.”

“선우 오빠랑 권재하 그 사람이랑 전부 연관 있는 어떤 게 있잖아!”

“없는데, 혹시 나중에 뭐라도 기억나면 말해줄게. 그런 의미에서 저녁은 네가 좀 차려 봐.”

은조는 만화에 빠져 있는 다온이에게 몸을 기댔다.


“민아야, 근데 가족 말고 다른 사람 누구한테 인사를 해야 하는 건데? 큰 모임이라는 건 또 무슨 소리야?”

“몰라- 그냥 언니는 예쁜 옷 입고, 더 예쁘게 웃으면 돼.”

오나가나 공주 아니, 인형 취급이네-

고용주한테는 뭐라고 말한담.

아무 말 안 하는 게 낫지-

막무가내로 따라온다고 하면 누가 말려.

으으- 괜히 몸서리가 쳐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