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 이 예쁜 걸 데려갈 수 없지 (49/100)


49. 이 예쁜 걸 데려갈 수 없지
2022.11.17.



 


“옷이…….”

톡-톡-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통밀빵 두 개가 토스터에서 차례로 튀어 올랐다.

그 바람에 재하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접시에 담은 빵을 그에게 가져다준 은조는 시선을 피하며 짐짓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옷 괜찮은데, 항상 그렇지만, 오늘도 보기 좋아.”

빵이 담긴 접시를 당기던 재하가 갑자기 눈썹을 치켜세운다.


“그래?”

“……음. 왜, 무슨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요 며칠 잠잠하니, 저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은조는 그를 칭찬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기 좋다는 그 한마디에 저렇게 놀라기는-

역시 천하의 권재하도 칭찬 앞에서는 약한가 보다.

사실 입에 발린 소리는 아니었다.

역시나 올 블랙으로 싹 빼어 입었지만 분명 어디 상갓집에라도 갈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다.

3피스 블랙 슈트에 노타이, 그리고 무엇보다 포인트를 준 커프스 링크는 절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골드 베젤에 다이아몬드 장식도 촘촘했다.

독특한 무브먼트 장식까지 더해져 재하의 작은 움직임에 따라 섬세한 빛이 쏟아졌다.


“중요한 약속이 있는 건 맞는데. 난 그런 것과 상관없이 항상 보기 좋고 근사한데.”

“……?”

귀를 의심하며 멈칫, 은조가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나 말고 너.”

네 옷- 그가 대놓고 손짓으로 은조의 차림새를 가리켰다.


“나? 내가 왜?”

평소와 다름없는 지극히 단정한 블라우스와 스커트였다.

다만 재킷을 걸치기 전이고, 고용주의 아침 식사 ‘수발’을 드느라 예의 그 프랑스 자수가 놓인, 예쁜 앞치마를 둘렀을 뿐인데.

뭐가 또 문제지. 슬슬 시작인가- 은조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옷이, 좀 타이트해 보여서. 살쪘니? 내가 너무 편하게 해줬나.”

더럽게, 미치게, 얄미운 소리를 하면서 어디가 고장 난 인간처럼 입꼬리를 한껏 말아 올리기까지 한다.


“내가 지금 되게 편안하고 여유롭게 보여? 이 일이 그렇게 꿀알바는 아냐. 일당이 꽤 세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인 면에서도 결코 녹록지 않거든.”

아차, 오늘 고용주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게 있는데!

찰나의 분노를 못 참고- 있는 대로 같잖은 바른말을 실컷 지껄이고 나서야 생각이 나다니.

망했다. 은조는 얼른 재하에게서 등을 돌려 냉장고로 향했다.

사실 재하는 주방에서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는 은조에게서 내내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잘록한 허리에 앞치마를 꼭 졸라매고 예쁜 냄새를 풍기며 요리조리 바쁘게도 움직인다.


“…….”

“왜, 그렇게 보는데?”

제가 마실 우유곽을 꺼내든 은조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음- 아냐. 커피 좀 더 따라줄래.”

“……응.”

오늘따라 유달리 자질구레한 것까지 시켜 먹는다.

식탁 위에 우유를 내려놓은 은조는 얼른 커피가 든 유리 포트를 들고 재하 옆으로 갔다.


“가득 줘- 가득.”

상체를 슬그머니 그녀 쪽으로 기울이는 재하,

리본 모양으로 매달린 앞치마 끈이 동그랗게 솟은 엉덩이 위에 편안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젠장, 앞치마 끈이 부럽기는 또 처음이네.


“Damn it, pretty body.”

“뭐?”

“아냐, 고맙다고.”

“벌써 세 잔짼데, 괜찮아?”

“세잔이 아니라, 30잔도 마실 수 있겠어…… 계속 이런 식이라면 말이지.”

잔에 가득한 커피를 내려다보는 재하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고개를 갸웃거린 은조는 이내 관심 없다는 듯 휭하니 곁을 떠난다.

하지만 의자에 앉아 우유 잔에 입술을 대기 무섭게.


“저쪽에 버터 좀.”

며칠 모른 척 내버려 둔다 했더니 오늘은 제대로 부려 먹기로 다시 마음을 먹은 게 분명하다.

아예 수족 부리듯 한다.

은조는 아일랜드 조리대에 있던 포션 버터가 들어 있는 접시를 그의 앞으로 옮겼다.


“여기…… 어!!”

막 자리를 뜨려고 하는 찰나, 재하가 그녀의 손목을 그러잡았다.


“왜? 뭐…… 더 필요해?”

놀란 은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넌 가염이 좋아, 무염이 좋아?”

“난 버터 자체가 별로야. 그냥 쨈이 좋아!”

갑작스럽게 이상한 질문을 한 재하의 시선은 은조의 가슴과 허리 근처를 방황하고 있었다.


“지금 어딜 보는 거야? 어?”

“난 이제까지 이런 극강(極強)의 테스트를 받아본 적이 없어. 인내심의 최대치를 보여 달라는 거잖아, 이건.”

“……뭐?”

“임계점이라고 들어봤지? 정류점, 정상점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응- 달콤한 복숭아 잼을 바른 빵을 베어 문 은조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함수의 극값을 구하기 위해서 몇 가지 극점 후보, 즉 변곡점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 대부분은 임계점으로 구할 수 있어.”

아아- 은조는 우유를 마시며 다시 건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주의해야 할 것은 임계점이 극점 후보라는 것이지, 극값을 반드시 가진다는 뜻이 아니야. 따라서 임계점을 구한 후에도 극값의 정의에 맞는지를 더 생각해 봐야 한다는 소리야.”

대박- 역시 잘났어.


“마지노선은 들어봤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내가, 이 권재하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혹은 갈 데까지 갔다는 얘기야.”

“그러니까. 대체 어느 부분에서!”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커피 더 줄까?”

“됐어. 넌 이미 날 충분히 망치고 있어.”

“내, 내가?”

“분노, 주의 집중 곤란, 식욕 저하, 심박 수 증가, 불쾌와 두통은 물론…….”

재하가 넓게 벌린 엄지와 중지로 관자놀이를 누른다.


“……일이 많은가 봐.”

어쨌든 내가 도와줄 부분은 없어. 절대.

시치미를 뚝 뗀 은조가 괜스레 앞치마 가슴 쪽에 수놓아진 꽃무늬를 손끝으로 문질러 본다.

찻잔을 내려놓은 재하가 은조를 바라보았다.


“저녁에 중요한 일이 있는데 네가 좀 도와줘야겠어.”

“중요한 일? 뭔데…….”

은조의 얼굴이 바로 난감한 빛으로 물들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선약이라도 있나.”

“응, 맞아. 그게…… 사실은 민아가 좋은 사람을 만났어.”

“…….”

“오늘 저녁에 그 사람의 부모님과 만나기로 했거든. 일종의, 상견례 같은 거.”

그 정신이 나간 이규호라는 놈 말고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건가- 결국 그 미친놈의 말이 정확했군.


“잘됐네, 알았어.”

어차피 얼굴만 살짝 비추고 올 생각이었다.

벨몽도가 주인공이라면 분명 사람이 넘쳐나고, 술도 넘치고, 결과적으로 술에 취한 인간들이 넘치게 되는 피곤한 파티다.

술에 취한 밸몽도에게 잡혀 최근에 잠자리를 한 모델 누구누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경험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기억이다.

아마 젊고 여자 꽤나 꼬일 것 같은 카일 알렉시스 정도면 그 비슷한 경험이 풍부하리라 짐작하고 건드려본 거겠지.

너도 있어? 나 같은 경험? 노인네의 뿌연 회색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돌은 노인네.


“미안해. 근데 중요한 일이라는 건 뭐야,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이면…….”

“아냐, 됐어.”

온갖 종류의 늑대와 하이에나들이 넘쳐나는 그런 곳에, 이 예쁜 걸 데려갈 수 없지.


“신경 쓰지 마.”

“참, 저 상자가 어제 저녁에 배달되었는데 르로아 백화점 어디라고- 가져온 사람이 그랬는데, 가방 안에 카드가 있을 거야.”

“일단, 그냥 둬. 동생이 만나는 남자, 어떤 사람이야.”

“훌륭한 사람이야.”

짧고 건조한 은조의 대답은 마치 너는 알 필요 없다는 듯이 들렸다.

그래, 아무렴 이규호보다는 낫겠지, 동구리의 존재는 아는 놈일까.


“뭐든 솔직한 게 좋은 건데.”

“무슨 소리야?”

“결혼이라도 하려면 그렇다는 얘기야.”

“그렇게 잘 알아서 약혼만 6년째구나- 정말 대단해.”

“네가 그렇게! 그런 목소리 그런 눈빛으로 도발하니까 내 상태가 임계점, 마지노선, 금단 현상 비슷하게 된다고. 알아? 아침부터 곤란하게 만들지 말자, 윤은조.”

“…….”

숨도 쉬지 말라고 하지, 왜.

은조는 접시 위에 있는 작은 토마토를 포크로 쿡- 세게 찔렀다.

***

{Salon de Lady Perry}
 


“살롱 드 레이디 페리- 멋지다. 그치 언니? 어떡해!”

디자이너 브랜드 의상숍의 입구는 마치 중세 유럽의 성당처럼 고풍스럽고 우아했다.

안으로 들어서면 호박 마차라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동생의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는 은조는 고개를 끄떡이며 웃어 보였다.

다시 호박으로 변할 때 변하더라도 한 번쯤은 화려하고 예쁜 마차를 타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

오늘을 위해 조퇴까지 한 은조는 정말 생전 안 해보던 일들을 한꺼번에 다 겪는다고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
.

 

 


“……이걸요?”

내가 결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은조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난감한 빛이 역력했다.


“디자인을 바꾸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일단 최 회장님 사모님께서 두 분에게 어울릴 만한 것을 골라서 결제까지 마치신 상황입니다. 정 마음에 안…….”

“아뇨! 일단 입어 볼게요.”

“민아야, 이건…… 내가 이걸 어떻게, 왜 입어!”

실크를 망사처럼 아니, 잠자리 날개처럼 짠 천- 튤(tulle)

숍 직원이 은조 앞에 보여준 옷은 은은한 핑크빛 튤 드레스였다.

발목에서 똑 떨어진 풍성한 라인, 벨벳 소재의 벨트 디테일로 포인트를 준 모양이 아주 사랑스러우면서 몹시 로맨틱했다.

한마디로 여성스러움의 극대화.

게다가 등이…… 전부 드러나는 디자인이다.

그냥. 입을 수 없다는, 입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더구나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은 민아의 드레스였다.

같은 디자이너의 작품이었는데 동생의 것은 오히려 단아하고 우아하다.

깔끔한 라인에 잔잔하고 섬세한 플라워 패턴의 살굿빛 드레스.


“저…… 아무래도 옷이 바뀐 것 같아요!”

내가 언니고, 나이도 많고, 무엇보다 나는 10살짜리 공주가 아니라고요!


“윤은조 씨, 이거. 이민아 씨, 이거.”

울 것 같은 은조의 표정을 본 직원이 실수는 없다는 듯 똑 부러지게 다시 확인시켜준다.

얄미운 민아는 입을 꼭 붙이고 절대 도와주지 않았다.


“구두랑 코르사주? 그것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오히려 한술 더 떴다.

***

저녁 7시.

하버-뷰(Harbor-View) 호텔 그랜드볼룸.

대 연회장이라니. 역시 제정신이 아니군.

파티 장소에 느지막하게 나타난 재하가 입구로 들어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