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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컵케익, 내게 키스해 (50/100)


50. 컵케익, 내게 키스해
2022.11.21.



 
오, 드디어!


“잠시 실례할게요.”

남희는 입구에 막 모습을 드러낸 재하를 놓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그녀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내내 그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일찌감치 모습을 드러낸 자매들과 달리 그는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미 난다 긴다, 내로라하는 젊은이들이 은조를 에워싸고 있었으니까.


“권재하 씨!”

재하는 저를 불러 세운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안녕하세요, 김남희라고 합니다.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전해드릴 게 있어서요.”

“네, 안타깝지만 처음 뵙네요. 그럼 전 이만.”

분명 전해줄 게 있다고 했건만 마치 저는 받을 게 없다는 듯 오만하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건넨다.

그렇게 자리를 떠나려던 재하를 남희가 불러 세웠다,


“잠시만요, 이거 하셔야 해요.”

부토니에르(boutonnière)였다.


“이게 뭡니까…….”

거절한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남희가 재하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과하지 않은 모양으로 만들어진 꽃장식을, 그의 양복 플라워 홀에 단단히 꽂아주었다.

미처 피지 못한 연분홍색 미니장미와 귀여운 은방울꽃이 그의 가슴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쪽한테 꼭 필요한 거예요, 믿어보세요, 좀 두고 보면 알게 될 테니까, 절대 빼 버리지 마세요. 알아들었죠?”

밝게 웃는 얼굴과 낭랑한 목소리- 재하는 그녀를 기억해 냈다.


“전에 뵌 적이 있군요, 방금 기억났습니다. W호텔 엘리베이터.”

“맞아요, 반가워요. 그럼 그때 같이 있었던 제 남편도 기억하시겠네요, 최병현 씨예요. 이따 따로 인사할 기회가 있을 거예요.”

“아, 그렇군요.”

다소 나서고 싶지 않고, 대충 인사만 남기고 떠날 심산으로 올 블랙을 택했건만.

마치 화룡점정처럼,

작고 앙증맞기까지 한 꽃장식이 순식간에 그의 분위기를 바꾸어 버렸다.

이건 대놓고 튀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뭐겠는가.

내가 주인공도 아닌데.

재하의 마뜩잖은 시선이 제 왼쪽 가슴에 머물렀다.


“힌트를 드릴게요. 이곳에 같은 장식을 팔목에 두른 아름다운 분이 계세요.”

“이런, 그렇다면 저에겐 더욱 필요 없는…….”

참 빠르게도 부토니에로 손을 가져가는 냉미남의 동작을 남희가 부드럽게 제지했다.


“급하시긴. 버리는 건 좀 두고 보았다가 해도 늦지 않아요. 그 예쁜 장식에게 20분 정도는 할애할 수 있지 않겠어요.”

재하는 손을 내렸다.

일부러 당사자 앞에서 무례한 행동을 할 필요는 없었다.

빼서 어딘가로 던져버리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1초도 안 걸릴 일.


“어쨌든 감사합니다, 또 뵙죠.”

“행운을 빌어요.”

재하는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잔잔한 미소를 남긴 여자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
.



“헤이, 카일! 안 오는 줄 알았어!”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고 싶어서 검은 옷까지 입고 숨어들었지만, 부토니에를 달았다.

그리고 역시나 바로 달라붙는 인간도 나타났다.


“음, 좀 늦었네.”

“잘 왔어! 벨몽도가 뭘 준비했는지 알아? 사가모르! 사가모르가 산처럼 쌓였어!!”

‘사가모르’는 쿠바 산 최고급 시가를 말한다.

그리고 이미 반쯤 취해 있는 이 친구는 프란츠 시몬-

벨몽드처럼 프랑스인인데 한국을 꽤 좋아하는, 부자 아비를 둔 애널리스트다.


“훌륭하군.”

건조한 대답을 날린 재하는 시선을 멀리 던졌다.

시가나 몇 대 태우다 사라지면 되겠네.

죽 둘러보니 이미 거나하게 취한 얼굴이 꽤 보였다. 피하고 싶은 벨몽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뭐, 누구라도 권재하가 왔다 갔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되니까.

아주 의례적이고 골치 아픈, 내용이라고는 없는 이런 행사에 슬슬 신물이 난다.

재하는 지나가는 서버의 쟁반에서 샴페인 잔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래서, 사가모르는 어디에 있지.”

프란츠는 듣지 못했는지 어딘가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재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을 향했다.

멀찍이 여러 명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여자의 등이 보였다.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들처럼, 품위 없게 시리- 쯧.

차가운 술로 입술을 적신 재하는 잠시 그 모습을 응시했다.

가냘프게 라인이 훅 들어간 허리며- 거의 드러난 등이 왠지 권재하의 시선을 잡아끈다.

무엇보다 눈이 가는 곳은 풍성한 치맛단 아래 부러질 것처럼 드러난 발목이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처음 본 여자야. 난리도 아니라고.”

“그래?”

“처음엔 벨몽도의 여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그는 어디에 숨어서 무슨 짓을 하는지 보이지도 않아.”

프란츠는 새롭게 나타난 하이에나가 가려버린 여자의 모습을 다시 찾으려 목을 길게 빼고 발끝으로 섰다.


“차라리 너도 저 그룹에 합류하는 건 어때. 여기서 나랑 이럴 게 아니라.”

“카일, 너 철벽녀라고 알지? 내 느낌에 저 여자가 그런 것 같아, 쟤들은 헛된 희망을 품고 저러는데 나는 아쉽지만 포기야. 저 여자랑 같이 온 여자도 되게 예쁜데 그 여자는 약혼자가 있어. 제길.”

그러거나 말거나- 재하는 안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왜, 누구 기다리는 여자 있어?”

“기다리는 건 아니고, 잘 있나 궁금해서.”

“어떤 여잔데? 한국 여자야?”

드르르르-

[에디]


“내 비서가 잘 있나 궁금했는데 마침 전화가 오네.”

여보세요- 재하는 프란츠를 향해 어깨를 한번 들썩여 보였다.


“음, 아냐, 내가 갈게.”

멀지 않은 곳에서 손을 흔드는 강 비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재하는 또 다른 프란츠가 나타나기 전에 얼른 홀의 중앙을 벗어나려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철벽녀를 둘러싼 하이에나의 무리를 지나치는 순간,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아름다운 눈동자와 마주쳤다.


“……!”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원래도 동그랗고 예뻤던 눈이 더욱 커져 있었다.

안 그래도 긴 속눈썹은 인형의 그것처럼 팔랑팔랑 여린 떨림의 날갯짓을 보여주고 있다.


“……!”

저보다 몇 배는 더 놀랐는지 은조의 가냘픈 어깨가 부르르 떨린다.


“……윤은조.”

여자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오는 검고 사나운 최상위 포식자.

그 맹수가 카일 J. 알렉시스라는 사실을 알든 모르든 하이에나들은 자동으로 뒷걸음을 했다.


“여, 여기서 뭐해……? 설마, 나를 미행했어? 또??”

“또오? 그러는 넌 여기서 뭐하십니까.”

재하는 같잖게 말아 쥔 은조의 작은 두 주먹을 보고 코웃음을 웃었다.


“나는 상견례 중이야! 말했잖아. 민아가 저기-.”

어딘가를 가리키려 들어 올린 은조의 손목에는 예쁜 미니 장미와 은방울꽃으로 만든 코르사지가 묶여 있었다.


“어, 방금 전까지 저기 있었는데…… 어디 갔지?”

“은조야, 술 마셨니. 여기 좋은 술 꽤 많을 텐데. 응?”

“그래! 마셨다! 내 질문에나 대답해! 왜 날 미행했냐고! 이 나쁜…….”

“이 나쁜 새X가 미행했다 치고, 옷은 누가 벗으래. 응?”

“옷? 아…… 이거는.”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이 손짓한다. 더 가까이 오라고-

저를 어디로든 데려가 달라고.

하…… 한숨을 뱉은 재하는 재킷의 단추를 풀었다.

울상이 된 은조가 빠르게 눈을 깜박인다.

……정말 신데렐라라도 된 것 같았는데.

쓸데없는 왕자님이 아니라 굉장히 멋진 엄마 아빠를 얻은 신데렐라.

그러니까 지금 권재하의 출현은 나쁜 새엄마의 등장과 다를 게 없었다.

근데 옷은 왜, 벗지?

이내 가슴팍이 팽팽하게 당겨진 검은 드레스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래 늘씬한 허리…… 불룩 솟은 탄탄한 허벅지…….

앙큼한 시선이 제멋대로 슬금슬금 흘러내려 간다.


“안, 보이네…… 민아가- 어디로 갔…….”

“당연히 안 보이겠지, 네가 보고 있는 건 나니까. 자.”

재하가 제 겉옷을 은조의 어깨에 둘렀다.

마음 같아서는 부러질 것 같은 발목부터 안 보이게 하고 싶은데-.


“어……?”

“뭐가 어- 야? 꼭 컵케익 같은 모양을 하고 나 좀 먹어 달라고 하고 있었어, 너.”

컵케익? 내가? 웅얼거리는 은조는 이미 재하에게 손목을 붙들려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어디…… 가는 거야.”

“아무도 없는데.”

“……왜?”

“왜겠어, 잘 생각해 봐. 잘못한 거 있잖아, 너.”

“……내가? 그런 거 없는데…….”

거의 끌려가다시피 총총거리며 큰 보폭을 따라가는데 갑자기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툭- 돌 같은 몸에 부딪친 순간, 은조의 눈에 민아와 선우가 들어 왔다.


“어ㅂ-.”

재하의 큰 손이 그녀의 입을 막으며 동시에 끌어당겨 제 품 안에 가두었다.

은조는 뒤에서 저를 끌어안고 있는 재하에게 온몸을 맡긴 채 멀리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둘은 이마를 맞댄 채 속삭이고 있었다.

진작 복잡한 파티에서 빠져나와 오붓하게 둘만의 사랑을 서로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아아- 감동적인 장면에 낮은 신음 소리를 낸 은조와 다르게 재하의 입꼬리는 천장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그러니까- 윤은조가 아니라 이민아가 목적이었단 말이지.

큽-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린 순간 컵케익을 뒤집어쓴 고양이가 앙칼진 눈을 그에게 돌렸다.


“어허, 뭘 잘했다고.”

“내가- 읏.”

“저 대단한, 플라토닉 러브를 방해할 생각이 아니라면 조용히 따라와.”

이 호텔에 방에 몇 갠데- 비아냥거린 재하는 가는 손목을 움켜쥔 손아귀에 더욱 힘을 실었다.

.
.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파티가 열리고 있는 곳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1층 로비로 연결된 크고 아름다운 나선 모양의 계단 주위는 한적했다.

마치 신데렐라가 유리 구두를 잃어버린 곳처럼 보였다.

남자들이 건네는 술을 마음껏 받아 마신 게 이유인가- 얼굴이 점점 뜨거워진다.

단단히 틀어 잡힌 손목은 더 뜨겁다.


“너, 뭘 알고 이런 데 온 거야?”

“이런 데……?”

“여기 미친 새X들이 넘쳐나는데, 그거 알고 이런 차림으로 왔냐고.”

“다들 점잖았어.”

“점잖게 기회를 노렸겠지. 분홍색 컵케익을, 달짝지근한 크림을 핥고 맛볼 기회 말이야.”

“그거…… 예쁘다는 소리지?”

“…….”

“컵케익은…… 예쁘잖아.”

눈도 제대로 못 맞추면서 발칙한 소리를 잘도 해 댄다.

앙큼한 고양이 같으니라고.


“하…… 예뻐도 벌은 받아야지? 안 그래?”

컵케익- 내게 키스해.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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