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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달콤 살벌한 나의 동거인 (51/100)


51. 달콤 살벌한 나의 동거인
2022.11.24.



“……은조야.”

“…….”

벌을 주겠다며 그 눈빛은 왜 달달한데.

달라고, 달콤하고 부드러운 입술을 제게 달라고 애처롭게 속삭이고 있잖아.

은조는 자유로워진 두 손을 재하의 너른 가슴 위에 올렸다.

얇은 천 아래로 맹렬하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제 것처럼 거세면서 불규칙하다.

크고 따듯한 손이 훤하게 드러난 매끄러운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검고 깊은 눈동자가 그녀의 옅은 갈색 눈동자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만 애를 태우고 어서 결정을 하라고.

난생 처음 입어본 아름다운 드레스가 문제였던 걸까.

아니면 그 옷을 선물한, 이제껏 가져보지 못한 든든한 지원군을 얻어서였을까.


“나…… 잘못한 건 없어.”

그것도 아니면 그 두 가지의 힘을 빌려, 친절한 눈빛들이 건네는 술잔을 내키는 대로 받아 마셔서일까.

수많은 핑곗거리가 머릿속을 휘저었지만.

은조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그리웠다.


“벌 받을 일은 더욱 없고.”

이미 뿌리까지 말라 죽어 버린 아픈 기억이지만.

단 한 방울의 물이라도 떨어뜨리면, 살아날 것이다.

언제 죽었었냐며 살아 일어나 수백, 수천 개의 가시를 새로 키울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때처럼,

다정하고 뜨거웠던 남자의 입술을 그저 단순하게 갖고 싶었다.

살면서 단 한 번만이라도 스스로에게 너그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이제껏 윤은조는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엄한 부모고 동시에 순응하는 딸이었다.


“단순한 키스야. 그것뿐이야.”

작게 중얼거리는 붉고 통통한 입술을 재하의 엄지손가락이 부드럽게 쓸었다.

이 순간을 즐기며 그녀가 허락하기만을 기다린다.


“그저…… 단순한.”

은조의 손이 재하의 뺨에 닿은 순간, 입술이 거세게 부딪쳐왔다.

어깨 위의 재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재하는 단단한 양팔로 가는허리를 세게 옥죄며 입술을 최대한 밀착시킬 수 있게 얼굴의 각도를 틀었다.

은조의 등이 활처럼 휘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흐트러짐 없이 빗어 넘겨진 재하의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세상을 뒤집어버릴 것 같이 흔들리고 몰아치는 풍랑 위에서,

둘은 그들만의 느리고 달콤한 춤을,

길게 추었다.


 

.
.



[미스터 벨몽도!!]

먼저 입술을 떼어낸 사람은 재하였다.

누군가 크게 소리를 질렀고, 무엇인가 바닥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소리를 지른 사람은 강 비서였고, 대리석 바닥에 뒹구는 물체는 휴대폰이었다.

그리고 꽤 여러 명의 사람이 멀거니 은조와 재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런! 내 전화기가 엉망이 됐잖아!]

바닥을 구른 전화기를 집느라 허리를 숙였던 벨몽도가 흘러내린 긴 은발을 쓸어 넘기며 불만을 토해냈다.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머리카락이며 차림이 흐트러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상대방 동의 없는 촬영은 불법입니다.]

말은 벨몽도에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강 비서의 무거운 표정은 재하에게 있었다.

그의 말에 여러 개의 휴대폰이 은근슬쩍 자취를 감추었다.


[이봐요! 사랑하는 연인들의 아름다운 행위를 찍은 게 무슨 큰 잘못이라고! 당신이 망가뜨린 이 전화기에는 나에게 완전 소중하고, 엄청나게 많은, 아름다운 영상들이 있단 말이에요! 이거 어쩔 거죠? 이런, 전원이 들어오지 않아! 누가 좀 도와줘요!! 중요한 곳에서 전화가 오기로 했는데 어쩌면 좋아요!!]

벨몽도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섞어가며 호들갑을 떨었다.

망할 노인네.

재하는 바닥에 떨어진 제 겉옷을 집어 은조에게 다시 팔을 뻗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촉촉하고 뜨겁게 일렁이던 동그란 눈동자는 평소의 그것처럼 잔잔하고 차갑게 식어 있었다.


[미스터 알렉시스! 사랑에 빠진 건 죄가 아니에요! 난 매일 매 순간 사랑에 빠지거든!]

하늘이 내린 지독한 사랑의 예찬론자, 그 분야에서만은 절대 부끄러움을 모르는 파리지앵이 높은 목소리로 모두의 주의를 끌었다.


[Avec modération, monsieur Belmondo.]

재하가 유려한 프랑스어로 주의를 줬지만 벨몽도는 개의치 않는다.


[아, 맞다! 물론 당신에게는 약혼녀가 있다는 게 조금 꺼림칙하지만 뭐, 사랑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니까! 안 그래요? 여러분?]

강 비서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발 나오지 않았으면 했던 단어를, 결국 주책맞은 벨몽도가 뱉고 말았다.

무슨 축하할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는 친구 사이에요.]

침착함을 찾은 은조가 똑 부러지는 영어로 응수했다.


“네가 상대할 필요 없어.”

어느새 재하는 사람들과 은조의 사이에 벽처럼 서 있었다.


[아름다운 숙녀분, 어떤 남자도 친구와 그렇게 키스하지 않는답니다. 성함이?]

[오, 루이! 당신은 친구는 물론 키우는 개와도 그렇게 키스한다고 들었어요! 아닌가요?]

파리지앵의 지나친 호기심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은 남희였다.

그런 그녀의 말에 여러 명이 킥킥거리며 웃었고 이유 없이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은조는 사람들을 제치고 급하게 다가오는 민아와 선우를 발견했다.


“언니, 무슨 일이야?”

“괜찮아요, 은조 씨?”

“너희 둘이 은조 씨를 안으로 좀 데려가 줄래. 여기는 내가 정리할게. 어서.”

남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주위를 향해 환하게 웃는 표정을 보여준다.


[벨몽도, 우리는 당신을 한참이나 찾았어요! 대체 파티의 주인이 어디 숨어서 뭘 했는지, 알아야겠어요!]

[울랄라- 친구랑 잠시 룸에 있었는데요. 남희! 나는 친구랑 더 진한 것도 하는 게 맞아요, 사랑이라면 영혼도 팔 수 있는 파리지앵이니까요!]

관심을 받는데도 아주 쉽게 영혼을 팔 게 뻔한 파리지앵을 향해 남희가 호들갑스럽게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계속 그러다가는 한국에서 꽤나 유명해지겠어요!!]

숨은 뜻을 알아들은 사람들이 다시 큭큭 거리며 웃었지만 벨몽도는 그마저도 신이 나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라는 바예요!! 그전에, 남희, 전화기 좀 빌려줄래요?]

재하의 눈길은 멀어지는 은조의 뒷모습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엄지로 제 입술에 남은 그녀의 향기를 문지르며 낮은 욕설을 씹어 삼켰다.


“결국 여자였군. 게다가 그녀라니, 젠장.”

언제부터 있었는지 강 비서 옆에 서 있던 프란츠가 한 소리다.

재하가 갑자기 주먹을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흠집 난 거 보이지? 내가 요새 안 하던 짓을 하고 다니거든. 사람을 때린다든지 뭐, 그런.”

“대. 표. 님.”

강 비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와우- 내가 아는 카일 알렉시스 맞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프란츠, 입 닫고 시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대표님, 그냥 돌아가시는…….”

“됐어, 내 거를 여기다 두고 돌아가라고? 너나 돌아가.”

재하가 먹이를 빼앗긴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었는데- 상사의 뒤를 따르는 강 비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다시 돌아왔지만 웬일인지 친절하게 굴던 남자들이 저를 멀리하는 눈치였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한 순간 바로 이유를 알아버렸다.

반짝이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검은 표범이 제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민아와 선우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것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나를 따라온 게 아니라면 그냥 하려던 일을 해.”

“너 따라온 거 맞아.”

“후회할 짓 더 이상 하지 마.”

“이미 후회하고 있어. 숨어서 할 짓이 아니었는데.”

“내가…… 실수한 것 같아.”

“그런 거 없으니까, 이만 집으로 돌아가자.”

“아뇨, 제가 모셔다 드릴 겁니다.”

선우의 목소리에 재하가 눈썹 끝을 치켜세웠다.

마치 너희도 있었냐는 식이다.

한마디로 권재하는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다는 얘기다.


“제가 안전하게, 두 숙녀분을, 댁으로, 모셔다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선우가 이제껏 본 적 없는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윤은조 씨는 방향이 달라서요.”

권재하는 강한 집착을 드러내 보이는 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귀 끝까지 발개진 은조가 얼른 재하의 소매를 붙들었다.


“그만해.”

“…….”

단번에 입을 꾹 다문 재하,

내리깐 그의 눈길은 은조의 입술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성마른 표정을 지으며 셔츠의 단추를 두 개, 세 개 잇따라 풀어버렸다.


“그리고 저기-.”

은조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프란츠가 어쩌겠냐는 몸짓을 보여준다.


“아무튼, 같이 집에 갈 거야, 자.”

재하는 한쪽 손에 쥐고 있던 재킷을 다시 은조의 어깨에 단단히 둘러주었다.

하…….

크고 검은 덫에 갇힌 작은 고양이 마냥, 은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은근한 눈빛, 관능적인 체취에 홀려 크고, 덫에 발을 담근 건 저였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아찔했던 일탈을 되새긴 은조는 손가락 끝을 입술 위로 가져갔다.

몸을 부르르 떤 순간, 멀어지던 재하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

사내들이 시가를 피우는 것은 긴장을 풀거나 특별한 날을 축하하기 위해서거나 그냥 비슷한 수컷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다.

하지만 지금 권재하는 최고급 쿠바산 시가의 연기를 빨아들이고 뱉어내기를 반복하면서도 그 놀라운 향과 맛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주위의 누군가와 어울릴 생각은 더더구나 없었다.

가끔 부러움을 가득 담은 시선이 저에게 와 닿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일절 관심 없다.

뿌연 연기 너머로 살벌한 눈빛을 쏘아대면서.

‘원래 내 것이었다’고 한 번씩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아 넘겼을 뿐이다.

후- 입안에서 굴리던 연기를 길게 내뱉은 순간 연회장과 붙어있는 시가 룸으로 들어서는 강 비서의 모습이 보였다.

들고 있던 시가를 트레이에 던져버린 재하가 다급하게 손짓을 보냈다.


“그래서.”

“그래서-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계십니다. 만족하십니까.”

“다행이군.”

“그런데 누가 좀 뵙자고 하는데 어쩔까요.”

“또 어떤 새낀데.”

“헉- 어떻게 아셨습니까?”

공간을 가득 메운 연기를 손으로 흐트러뜨리는 강 비서가 작게 말했다.


“최선우 씨가 따로 좀 뵙자는데요.”

누구? 재하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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