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 예전처럼 다정하게 안아줄 거야. (52/100)


52. 예전처럼 다정하게 안아줄 거야.
2022.11.28.


6년 전.

세진 병원, 산부인과 로비.

나가고 들어오고, 울기도 웃기도 하는 수많은 여자와 보호자들.

구석에 있는 의자에 홀로 앉아 있는 23살 윤은조.

그녀는 한참이나 오가는 사람들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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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조야, 어떻게 한 번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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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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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열심히? 야! 넌, 결석은커녕 지각도 한 번 안 하잖아! 아픈 날도 없냐? 난 지금도 배가 너무 아파서 집에 가서 눕고 싶어 죽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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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배도 아프고 힘들기도 하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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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너도 인간인데- 그것도 말라깽이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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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말아야 하는 건 안 해. 그리고 해야 하는 건 꼭 하고. 그게 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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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되게 쉽다. 그게 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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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진짠데.]

은조는 친구 소라를 향해 환하게 웃었었다.

세상을 적으로 둔 삶이라는 전쟁터.

반드시 해야 할 일과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는 것.

그것은 어찌 보면 윤은조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제시간에 알바를 나가고, 정해진 시간만큼 반드시 공부했다.

단 한 학기라도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그 뒤에 벌어질 일은 안 봐도 훤했다.

그만큼 벌어야 하니까 알바를 더 뛰어야 할 것이고, 그럼 또 공부할 시간이 줄어들 것이다.

당연히 성적은 떨어지겠지.

그러면 일을 더 늘려야 할 거고.

꼭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끔찍한 결과다.

든든한 부모를 둔 아이들 중에도 성적에 목숨을 걸고 덤비는 아이들이 허다했다.

9살 이후. 제 삶을 혼자 오롯이 짊어진 처량한 신세, 윤은조.

고삐를 틀어쥔 손에서 조금이라도 힘을 풀었다가는 바로 끝장이 날 게 뻔했다.

해야 하는 것, 하지 말아야 하는 것.

그 두 가지를 결정하는 일은 그녀 입장에서는 단순하고 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살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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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는 안 될 짓을 했지.”

은조는 손에 들린 산모 수첩을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웃었다.

어이없게도 헤어지네 마네 냉전 중일 때 생긴 아이였다.

서로의 입장만을 주장하며 차갑게 대치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갈급하게 서로를 탐했다.

사랑인지 모를 증오, 인정할 수 없는 미련.

이해할 수 없는 격렬한 감정들에 사로잡힌 두 사람은, 세상이 끝날 것처럼 서로를 무너뜨리고 또 무너뜨리기를 반복했었다.

하지만 그 지독한 몸짓들이 끝이 아닌 다른 시작을 만든 것이다.

해서는 안 되는 짓, 하지 말았어야 할 짓에 깊고도 길게 발을 담갔고,

그 결과 윤은조는 폭풍이 휘몰아치는 벼랑 끝에 혼자 서 있었다.

했어야 하는 일, 할 수밖에 없었던 일.

저를 따라 무작정 미국으로 가자는 권재하의 제안을 거절하는, 그 일을 어렵게 했건만.

이래저래 결과는 비참했다.

짧은 인생이, 고단했던 삶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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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며칠 동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그다음에는 의심.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서로를 갈구했지만 재하는 피임에 있어서는 꽤 철저했다.

한밤중에 자다 일어난 은조는 테스트기를 사러 편의점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결과는 역시 두 줄.

다른 병원을 찾는 헛짓은 하지 않았다.

이미 몸의 상태가 달랐다.

그리고 갈등.

스물셋 겨울, 졸업도 하지 않은 대학생의 몸으로 임신과 출산을 감당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지켜야 하나, 아니면…….

잠깐 끔찍한 마음도 먹었었다.

어두운 밤 빈 공간에서 문득 눈을 떴을 때, 몇 번 재하에게 전화를 걸 뻔도 했다.

하지만 역시 은조는 단순하고 쉬운, 조금은 어리석어도 되는 그런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윤은조에게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어려운 일이,

권재하에게는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만 봐도 그렇다.

인생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둘은 애초에 비슷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한국 생활을 모두 접고 당장 미국으로 떠날 게 아닌 이상.

그저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전화를 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고 우스운,

‘해서는 안 될 짓’이 분명했다.

그렇게 널뛰듯,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했지만,

어느 밤, 은조는 결국 그의 번호를 눌렀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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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니-.]

그가 없었다!

바로 보낸 메일도 읽지 않았다.

권재하가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저만 남겨두고 아니, 저와 아기를 남겨두고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어리석은 두려움이 결국 그녀로 하여금 짐을 싸게 만들었다.

무작정 비행기 티켓부터 끊었다.

그렇게 장장 22시간.

서울에 있는 집을 나온 지 거의 하루 만에 은조는 낯선 땅 뉴욕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눈이 돌아갈 것처럼 복잡하고 휘황찬란했지만 그런 것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택시에 올라타 기사에게 주소가 적힌 종이를 건네면서는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는 사람 하나 없어 두려움이 앞서는 상황이었지만 이겨낼 수 있었다.

든든한 동행이 있었으니까.

그녀의 손은 납작한 제 아랫배 위에 올려져 있었다.

기뻐하겠지.

기뻐할 거야.

우리를 안아 줄 거야, 조금만 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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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왔어요? 나는 카푸르예요, 반가워요.]

피부가 까무잡잡한 남성 기사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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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윤이에요. 한국에서 왔어요,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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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서울! 가본 적은 없지만 멋진 곳이라고 들었어요. 음, 어려 보이는데 학생? 관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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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도 아니에요. 저…… 그 주소지까지 오래 걸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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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지만 뉴욕의 도로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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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겠어요. 그런데- 창문을 조금 내려도 될까요?]

스르륵 창문이 내려가자 은조는 답답했던 숨을 토해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실은 운전기사가 씹고 있는 껌 냄새 때문에 또 위장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몇 번 심호흡을 한 그녀는 창밖을 구경하는 대신 무거워진 다리를 주물렀다.

좁고 답답한 공간에 갇혀 긴 비행을 하느라 지쳐서인지 온몸이 퉁퉁 부은 상태였다.

어지럽고,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몹시 답답했다.

비행기에서도 내내 그랬다.

다른 사람들이 기내식으로 나온 음식을 맛있게 먹는 동안 그녀는 좁은 화장실에 갇혀 구역질만 해댔다.

윤은조 인생에, 그것도 스물세 살에 겪게 되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입덧이었다.

너무 길고 힘든 시간이었다.

하지만 문득문득 힘에 부쳐 정신을 놓을 것 같다고 느낄 때마다 의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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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심장이 규칙적으로 잘 뛰고 있어요. 우렁차네요.]

초음파 영상 안에서, 살아 있다고 씩씩하게 제 존재를 알리던 작고 소중한 생명.

은조는 아직도 신기하기만 한, 작은 생명이 들어 있는 제 배를 가만히 쓸어보았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한때는 세상 누구보다 다정한 남자였지만, 마지막으로 제게서 등을 돌릴 때,

그 서늘했던 눈빛을 떠올리면 솔직히 생겨나던 믿음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어쨌든, 우리가 이렇게 왔잖아. 조금 늦었지만 변한 것은 없어.

없을 거야. 예전처럼 다정하게 안아줄 거야.

허름한 숙소에 짐을 풀고 무작정 블랙스톤 파트너스(Black Stone Partners) 빌딩으로 향했다.

뉴욕에 도착한 지 3시간 만이었다.

권재하의 연락처나 위치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리라는 희망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화려한 빌딩의 로비, 프론트 데스크 직원의 입장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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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 우리는 함부로 미스터 알렉시스의 연락처나 위치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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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제 이름은 ‘윤은조’예요. 여기에 있다고만 전해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나는 그의…… 그의 아주 친한 친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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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친구 맞아요? 그가 얼마 전까지 한국에 있었다는 것은 알아요.]

흑인 여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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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맞아요. 나에게는 그를 꼭 만나야 할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어요.]

은조는 제 눈에 눈물이 차오른 줄도 몰랐다.

고개를 가로젓는 여성이 메모지에 뭔가를 적는 모습이 뿌옇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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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라면서 모르고 온 건가. 이곳에 그가 있지만 만날 수 있다고 장담 못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자, 받아요. 정문에서 왼쪽으로 쭉 가세요. 교차로가 보이면 호텔도 보일 거예요.]

부아지에(Boissier) 호텔.

현대적이고 우아한 프랑스풍의 건물, 1층 로비.

망연자실한 은조는 초대장 없이 절대 탈 수 없다는 VIP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오도 가도 못 하고, 차갑게 식은 뺨 위로 다시 눈물이 흘러내린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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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누구야? 윤은조?? 헐!”

왕나나, 그녀가 나타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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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세인트 로즈벨트병원(St. Rosevelt Hospital) 응급실.

응급의학과 레지던트인 최선우는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실려 들어온 남자아이의 상태를 점검 중이었다.

그는 빠진 어깨 관절을 끼울 수 있는 유일한 레지던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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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아플 거야. 하나, 둘,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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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소년은 짧은 비명을 질렀지만 이내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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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괜찮았지?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앞으로는 조심해야 할 거야.]

상태가 심각하지 않은 소년을 막 간호사에게 인계했을 때 들것에 실린 여자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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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환자예요! 체온 36.6, 맥박 110회, 혈압 82, 빈호흡(Tachypnea) 상태로 쇼크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응급 요원은 여자가 입고 있는 스커트를 적시고 시트까지 붉게 물들인 상황을 직접 보여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혈을 시작했어요- 충격에 빠진 환자의 상태를 생각해서인지 낮은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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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지갑도 휴대폰도 없고요.]

선우는 재빠르게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동공반사(pupil reflex)는 정상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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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괜찮아요, 겁먹을 필요 없어요. 이름이 뭐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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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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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코너를 돌던 차량이라 속도가 거의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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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다른 출혈은 안 보이네요, 타박 부위 골절 가능성 봐야 하니까 X-RAY부터 찍죠.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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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버려 둬요. 죽게…… 내버려 둬요.”

한국어였다!

너무 작고 연약한 그 소리를 선우가 알아들은 것이다.

천장을 향한 눈은 멍했고, 여린 그 소리는 죽음을 바라는 것이 분명했지만.

죽기를 바라기에 여자는 너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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