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당사자 vs 당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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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당사자 vs 당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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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당사자 vs 당사자
2022.12.01.
[어떻게 오셨습니까?]
[24층에 올라가려고요. 미스터 알렉시스를…….]
[아, 직원은 저쪽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세요. 이건 정식으로 초대를 받은 하객 전용입니다.]
[……하객?]
[24층, 미스터 알렉시스와 미스 와이즈먼의 약혼식에 일하러 오신 게 아닌가요?]
engagement- ceremony…….
[방금 약혼식이라고 했나요? 미스터 카일 J. 알렉시스- 그가 약혼을…… 한다고요?]
[네.]
엘리베이터 앞을 지키고 있던 남성들은 길을 잃은 동양인 웨이트리스(waitress)에게 다른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을 다시 한번 가리켜 보였다.
뒤로 몇 걸음 물러선 은조는 제 모습을 찬찬히 훑었다.
낡은 운동화 위로 눈물이 후두두 떨어졌다.
양손으로 얼른 눈가를 훔쳤지만 핏기를 잃어버린 차가워진 뺨 위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그녀는 제가 이미 울고 있는 줄도 몰랐다.
이제 겨우…… 두 달이 지났어!
겨우 두 달 만에 사람이…… 아니,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게 분명해.
“이게 누구야? 윤은조?? 헐!”
왕나나는 얼른 뺨을 훔치는 은조를 보고 대놓고 웃음부터 터뜨렸다.
“아니, 하하하- 꼴이 왜 이래? 여길 대체 어떻게 온 거야! 하하하- 아이고 배야.”
“재하를 만나려고 왔어요.”
“잉? 그 꼴로? 대박! 미쳤다!! 둘이 다 끝났잖아! 찬 건지 차인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쫑 났다고 알고 있는데. 재하 오빠 전화번호도 버리고 왔잖아. 어떻게 여기까지 왔대? 와- 대단하다!”
은조는 금방이라도 피가 터져 나올 것처럼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렇게 됐어요. 위에…… 올라갈 거예요? 같이 갈 수 있죠?”
눈을 가늘게 뜬 왕나나는 머리를 있는 대로 굴렸다.
이 거지 같은 게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아직도 싹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얘긴데.
그건 권재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홧김에 제가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순진하고 말간 얼굴을 보는 날에는.
약혼식이고 뭐고- 으으으-
상상만 해도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쐐기를 박자.
권재하, 그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서릿발 같은 태도.
그것은 다른 말로 아직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왕나나는 이번에야말로 쐐기를 단단히 박아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정말, 대단하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좋아, 일단 같이 올라가.”
그래, 윤은조를 오늘 여기서 제대로 잘라버리는 거야.
왕나나는 손에 들고 있던 초대장을 남자들에게 내밀었다.
[동행이에요.]
호화스러운 엘리베이터가 차림이 대조되는 두 여자를 빠르게 위로 실어 날랐다.
나탈리 저년이랑은 어차피 홧김에 만든 쑈니까 얼마 못 갈 거고,
윤은조는 얘는 오늘 제대로 밟아놓는 거지.
왕나나는 미친 것처럼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서울에서도 말 몇 마디로 두 사람을 좀 가지고 놀기는 했다.
‘사랑에 빠진 어리석은 두 영혼’
권재하와 윤은조.
그런데 권재하는 정말 맛이 간 것처럼 미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약혼을 발표했다.
그것도 사내처럼 뻣세고 멋대가리 없는 와이즈먼이랑.
윤은조가 아니면 다 소용없다는 얘기인 것이다.
약혼 소식을 들은 날 분을 이기지 못한 나나는 제 머리카락을 한 움큼이나 뽑아냈다.
죽 쒀서 개 준다더니.
그런데.
“꼴이 좀 개 같다. 길 잃은 개. 이걸 어째- 아무래도 뒤에 숨어서 봐야겠네.”
“……그래야죠.”
.
.
이미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고 들어섰지만.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웃고 있었다.
이제까지 본 적 없는 멋진 모습이었다.
벨벳 라펠의 블랙 턱시도는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의 그를 더 없이 근사해 보이게 만들었다.
금발의 미녀를 향하고 있는 환한 미소는-
윤은조의 것이었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분명히…… 그랬다.
“…….”
“저 여자 처음 봤지? 한국 뉴스에도 가끔 나왔을 텐데? 하긴- 워낙 딴 세상 사람이니까 알 리가 없겠다.”
“…….”
“나탈리 와이즈먼이라고 미국에서 알아주는 석유 재벌의 손녀. 그것도 유일한 상속녀.”
“…….”
“아는지 모르겠는데, 혹시 알고 헤어진 건가?”
“…….”
주인공보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왕나나가 뱀같이 간사한 혀를 날름거렸다.
“이 약혼은 사실 오빠랑 쟤가 하버드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예고됐던 거나 마찬가지야. 왜 있잖아, 부자들끼리 좋은 집안끼리 그런 거. 미국은 더 심해. 은근 갑갑하다니까.”
“…….”
“재하 오빠도 어떻게 보면 딱하지. 얼마나 답답해했었는데. 그래서 한국에 가서 잠깐 기분 전환한다고 학교를 알아본 거고.”
“……기분, 전환?”
“응, 기분전환. 뭔지 몰라? 불쾌하고 부정적인 감정의 해소! 그래서 잘 놀고 왔잖아! 알면서 내숭은.”
읍- 은조가 허리를 접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아까부터 역겨웠던 왕나나의 향수 냄새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화려한 장소가 낯설고 두렵게 느껴졌다.
[……잠시만요.]
실례합니다- 몇몇 사람과 부딪치고 그들이 들고 있는 술잔도 엎게 만들었지만 최대한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어깨에 메고 있던 작은 가방의 끈이 끊어져 몸에서 떨어져 나간 것도 몰랐다.
세상이 전부 뿌옇게 보여서 제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 줄도 몰랐다.
그저 달렸다.
권재하가 없는 곳으로.
.
.
“야! 윤은조!!”
끼이이익---
끈이 떨어진 작은 가방을 쥐고 뒤를 따르던 왕나나는 그 소리에 놀라 몸을 웅크리며 벽으로 바짝 붙었다.
모퉁이를 돌던 차량은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 바람에 가로로 서 있었다.
윤은조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저런 병신, 뒤지고 싶어서 아주-
신고할 생각도 안 하고 구경만 하는 사이, 근처 카페에 있던 나이 지긋한 웨이터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고, 멀리서 앰뷸런스 소리가 들려왔다.
왕나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를 떠났다.
거지 같은 작은 가방은 쓰레기통에 집어 던져버렸다.
***
“내가 도와줄 거예요.”
천장을 향해있던 눈동자가 천천히 그에게 와 닿았다.
크고 예뻤는데 슬픈 물방울을 가득 안고 있었다.
“나중에 고맙다고 하지나 말아요.”
다시 한번 부드럽게 한국말을 흘린 선우는 누군가를 향해 빠르게 손짓을 보냈다.
[ob-gyn. 닥터 페얼리 호출해 주세요!]
***
이제 그 눈에 행복이 가득한 걸 분명히 봤는데.
아까 내가 본 것은 뭐지.
선우는 불안하게 흔들리던 은조의 눈빛을 떠올렸다.
여전히 그녀가 그 고통에 손가락 하나라도 담그고 있다면-
상대방도 알아야 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가 얼마나 아팠는지.
“…….”
.
.
재하의 눈에 복도 끝 비상구 근처에 서 있는 남자가 들어왔다.
이유 없이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다스리려 커다란 손으로 목덜미를 가볍게 주무르며 다가갔다.
아, 이유가 없는 건 아니지-
윤은조와 서로 술잔을 채워주며 환하게 마주 웃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결혼을 누구와 하든 말든, 그 기분 나쁜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낮게 혀를 찬 순간 그의 존재를 감지한 선우가 몸을 돌렸다.
단정한 자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한 그는 신사의 표본,
아니, 부르주아(bourgeois)의 표본인가- 아무튼 마음에 안 든다.
상대에게 먼저 입을 열 기회를 양보한 재하도 가벼운 눈인사만 보냈다.
최선우가 천천히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저는 최선우라고 합니다.”
“압니다. 이민아 씨 약혼자.”
필요 이상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운 재하는 제 소개를 하는 대신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섰다.
당연히 표정도 좋을 리 없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남의 일에 함부로 간섭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이미 간섭하고 있는 거 같은데.”
“은조 씨는 이제 남이 아니거든요.”
“언제는 남이었고.”
제가 생각해도 과도하게 날 선 반응이었지만 상대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게 더욱 권재하의 배알을 꼴리게 만들었다.
여전히 이성적인 상대방과 다르게 저만 속을 있는 그대로 홀랑 뒤집어서 보여주는 기분이랄까.
그의 미간에 깊은 선이 잡혔다.
잠시 펼친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선우가 천천히 말을 꺼내며 눈을 정면으로 맞추었다.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수습할 만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부적절한 행동.”
재하는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던 몸을 곧게 세우고 양손을 팬츠 주머니에 꽂았다.
오만하게 내리 깐 눈으로 더 해보라는 뜻을 전했다.
“그쪽도 그렇지만 저도 미국에 있다가 온 지 얼마 안 됩니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예의를 중요시 여기는 나라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이봐요, 최선우 씨.”
“말씀하시죠, 권재하 씨.”
“사람 가지고 장난칩니까.”
“제가 보기에 사람을 가지고 장난치신 분은 권재하 씨 같습니다.”
“내가?”
“정말 모르는 겁니까, 모르는 척하는 겁니까.”
재하는 끓어오르는 성질을 삭이려 달구어진 숨을 뱉어냈다.
생각 같아서는 프란츠에게 그랬듯이 주먹부터 그 점잖은 얼굴 앞에 들이밀고 싶었지만.
“계속해 보시죠.”
“진중하지 못한 행동으로 윤은조 씨가 피해를 보게 될까 염려되어서 하는 소립니다.”
“그렇게 진중하셔서 처형 될 여자의 사생활까지 간섭합니까.”
“간섭과 염려는 다릅니다.”
재하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최선우 이 작자가 내게 예절 교육이라고 시키시겠다는 건가.
“이봐요, 최선우 씨. 난 미국인이지만 누구보다 보수적인 면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내 기준에는 성인인 여성의 개인사에 이래라저래라 끼어드는 게 오히려, 아주 도를 넘은 행동으로 보입니다.”
“약혼자까지 있는 평범하지 않은 분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부적절한 행동을 한다면 그게 도를 넘은 것이지요. 게다가 그 상대가 제 가족이라면 얘기가 다릅니다.”
“아, 가족!”
“그리고.”
술술 말만 잘하던 최선우가 갑자기 망설인다.
재하는 한일자로 입을 꾹 다문 채 기다렸다.
“…….”
“……제가 느낀 것이 정확하다면.”
“의사라고 하던데 주로 느낌으로 행동합니까.”
“완전히 배제된다고는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그쪽이 느낀 것 중에 내가 알아야 할 게 과연 어떤 걸까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우리?”
“그러니까 은조 씨와 내가 처음 만난 시기와 장소뿐입니다.”
“계속해 봐요, 기다리고 있으니까.”
“6년 전 뉴욕, 로즈벨트 하스피틀 응급실입니다.”
“……?”
재하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