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 너를 벌주려고 나를 버릴 거야 (54/100)


54. 너를 벌주려고 나를 버릴 거야
2022.12.05.



 
결과적으로는 역시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후회’라는 단어를 징그러운 벌레보다 싫어하는 은조는 몸서리를 쳤다.

너 겨우 이거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어……?

이건 술 때문도 분위기 때문도 아니야.

……그냥 제정신이 아닌 거지.


“…….”

공개적인 장소에서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키스라니.

그것도 권재하와.

어떤 이유를 가져다 붙여도 정당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은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술기운을 좀 가시게 하고 싶은 마음에 주스를 단숨에 들이켰지만 여전히 멍했다.

사랑에 빠지면 쉽게 길을 잃는다고들 말한다.

눈이 멀고 귀가 안 들리니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심지어 지능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스스로 아주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사람도 한순간에 어리석게 만든다.

그게 사랑이라는 허상이다.

한마디로 바보가 된다는 소리다.

은조 자신 역시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안다.

직접 겪어 본 일이 아닌가.

엄청난 대가까지 치르고 얻은 결론 말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윤은조가 현재 사랑에 빠진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 멍청이가 된 기분에 휩싸였다.

처음도 아니지만 그때는 어렸다는 핑계라도 있었다.

게다가 비참하고 더없이 잔인한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뭐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해야 하나.

죄책감 또는 자책감, 혹은 수치심 때문에 온몸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지만.

잘못을 덮어버릴 그럴듯한 이유는…….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오히려, 남자의 말대로 욕망하면서 인정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알게 되었을 뿐이다.

권재하를 향한 육체적인 욕망을…….

인정한다.

현재의 윤은조는 그렇다.

남자를 가지고 싶다는, 단순한 육체적 욕망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마음이 없는 몸이라 해도 사로잡힌 것이 사실이다.

더 이상 그를 거부하고 뿌리칠 이유가 있을까.

왜……?

왜 그래야 하지.

입술을 나누며 느꼈던 그 강렬한 환희, 잊은 줄 알았던 육체적 갈망.

잊은 게 아니라 잊었다고 부정하고 있었다.

자존심으로 덮어버리면 그만이라고 착각했다.

이렇게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나약한 주제에.

숨 막힐 것 같은 짜릿한 전율을 되새기는 그녀는 다시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주 짧은 순간, 하찮은 욕망에 충실했는데.

순식간에 몸과 마음 전부를 저당 잡히고 만 것이다.

그를 다시 만난 순간부터 절대 흔들리지 않겠다고 끊임없이 되새기던 다짐.

결국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

얼핏 쓴웃음을 흘린 은조는 재하의 재킷을 어깨에서 내렸다.

깊은 패배감이 더해진 차가운 공기 덕분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더없이 무력해진 그녀가 치욕스러운 감정을 목구멍 안으로 삼키는 순간,

멀찍이 강 비서를 붙든 선우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시가가 있는 룸에서 나와 어딘가로 향하는 재하를 보았다.

설마…….

은조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책과 무력감, 패배감보다 더 나쁜.

최악의 경우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직감에 몸이 떨려왔다.

누구도 감히,

권재하라면 특히.

사라져버린 아이의 존재를 알아서는 안 된다!

.
.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었다.

이야기의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과연 둘이 나눌 대화가 무엇일까.

선우는 절대 경솔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실상 은조는 사라진 아이와 관련해서 누구에게 어떤 내용의 이야기도 한 적 없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윤은조 하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

권재하, 너는 철저하게, 끝까지 몰라야 해.

알아서 괴로운 것조차 허락하고 싶지 않아!

세게 말아 쥔 주먹 안에서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거대하고 단단한 둑이 한 번에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다 지웠다고 생각한 원망과 회한이 다시 해일처럼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뉴욕에 다 버리고 왔던 그 쓰레기 같은 원망과 저주.

억울함이든 분노든, 전부 부질없고 가치 없는 과거의 망령이라고 정리했었다.

다온이를 품에 안고는 더 이상 생각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그것들이.

왜.

이제 어떤 이유에서건 권재하의 곁에 머문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 되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떠나야 한다.

스스로를 던져야만 가능하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권재하에게서 벗어날 것이다.

죽어도 그의 눈을 마주 보며 잔인한 과거를 입에 올릴 일은 없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절대로.

차라리 짐승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욕망에 충실한 편이 쉽다.

백번 아니, 천 번 쉽다.


“…….”

내내 짓씹던 입술 안쪽으로 비릿한 피 맛이 번졌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어느새 무심한 표정이 된 은조는 돌처럼 바닥에 붙어 있던 발을 움직였다.

.
.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6년 전에 은조 씨와 제가 처음 만난 곳을 말씀드린 겁니다. 그 이상은 은조 씨를 통해 들으세요. 저는 더 이상 말씀드릴 권한이 없습니다.”

“여태 잘만 떠들다가 갑자기 권한이 없다니.”

“혹시 본인과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 되면.”

선우는 얼굴을 살짝 구겼다.

급한 마음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추측일 뿐 사실 어떤 것도 정확한 것은 없다.

반면 재하는 은조가 했던 말을 정확하게 기억해 냈다.


[의사야. 예전에 아팠을 때 큰 도움을 받았어.]

“말 끝났습니까? 들은 기억이 있지만 그쪽이 왜-.”

“……은조 씨!”

재하는 선우의 놀란 시선이 향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의 재킷을 팔에 건 은조가 다가오고 있었다.

잠자리 날개같이 얇고 가벼운 옷감이 사뿐사뿐 그녀의 걸음을 따라 춤을 추듯 물결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재하는 저절로 입안에 고이는 다디단 침을 삼켰다.

방금 전까지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같았던 신경이 힘없이 툭 끊어져 버렸다.

대신 참 단순하고 빠르게 다른 쪽으로 온 감각이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아름답게 드러난 쇄골과 가는 팔, 잘록한 허리로 그의 시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불과 몇 분 전 품에 안고 전부 녹여서 마셔버릴 것처럼 깊게 탐하던 입술의 느낌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 감미로운 허락이 얼마 만인지…….


“아무튼 충분히 잘 들었습니다.”

재하는 재빨리 최선우와 은조 사이를 차단하듯 몸으로 막아섰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예쁜 게 제멋대로 설치고 보드랍고 뜨거운 입술까지 내어주었으니.

감히 누가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겠는가.

설사 제 욕심에 눈이 먼 동물 같은 놈이라고 손가락질한대도 기꺼울 뿐이다.

재하는 다가오는 은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누가 뭐래도 넌 내 거야.

심지어 네가 인정하지 않아도.


“이제 그만 집에 가요.”

“그럴까.”

“선우 씨, 부모님과 민아에게 대신 인사 전해주세요.”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선우는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괜찮은 거 맞죠?”

“그럼요, 그 어느 때 보다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왠지 결연해 보이기까지 한 은조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까지 감돌았다.

***

재하는 사랑스러운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얌전하게 옆에 앉아 있는 은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얘기 했는지 안 궁금해.”

“별로. 내가 알아야 해?”

재하는 어쩌다 저 자식과 얽혔는지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최선우가 흘린 소리 덕분에 창자가 뒤틀렸지만.

지난 일을 들추는 것으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든지 내용을 알아보는 것이야 전화 한 통이면 얼마든지 간단한 일이다.

내가 알아야 할 일인지 몰라도 될 일인지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다 필요 없고.

눈앞에 있는 아름답고 황홀한 몸뚱이를 소유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재하는 은조의 무릎 위에 얌전하게 모아진 양손 위로 제 손을 가져갔다.

너무나 간절하게 안고 싶은 마음을 일단 손을 잡는 것으로 대신했다.

가녀린 손가락 사이로 제 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엇갈린 손가락을 부드러운 힘으로 바짝 맞추어 잡았다.

재하는 저에게 돌아온 은조의 눈빛을 지그시 응시했다.

운전자를 의식해서인가 예상했던 반항은 없었다.

오히려 어떤 의미도 표정도 담지 않은, 눈동자가 담담하고 엷은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은조야.”

“……응?”

“뉴욕에 언제 왔었어.”

“글쎄…… 오래전에.”

은조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고 재하는 깍지 낀 손을 들어 입술을 눌렀다.


“나한테 왜 연락하지 않았냐고 물어보면 우스운 질문이겠지.”

“응, 좀 우습네.”

“질문을 바꿀게. 최선우라는 작자를 처음 만난 게 언제야.”

“그게 언제냐면…… 뉴욕에 갔다가 넘어졌었어.”

“누구랑 왜 왔었는데.”

먼 곳으로 향해 있던 은조의 시선이 다시 돌아왔다.

느릿하게 깜박거리는 두 눈은 남의 얘기를 하는 듯 무심함이 가득하다.


“그런 게 왜 궁금해, 너무 오래되기도 했고 매우 하찮은 일이었나 봐. 기억도 나지 않는걸 보니까. 나 좀…… 피곤해.”

“그래.”

네 입으로 말하기 싫은 게 어떤 걸까.

아니면 정말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하찮은 일인 걸까.

그런데 말이야, 윤은조,

이제 나한테는 말이지-

너와 관계 된 일이라면 하찮은 건 없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말이야.


“너답지 않았어.”

“……?”

“화려하게 꾸미고 관심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거든, 오늘.”

“맞아, 나답지 않았어.”

“그 드레스 너무 예쁘지만 다시는 입지 마.”

“응.”

재하는 평소와 다른 은조의 반응에 눈썹 끝을 바짝 치켜세웠다.

웬 참견이냐며 펄쩍 뛰거나 당장이라도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 것 같은 표정을 기대했는데.

그녀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윤은조, 마치 내 말이라면 전부 순응할 것 같은 태도네.”

“좋을 대로 생각해.”

여전히 담담하게 대답한 그녀는 잡혀있을 손을 빼려들지도 않았다.

자유로운 한쪽 손을 들어 올린 재하는 동그랗게 솟아오른 이마에 손바닥을 올렸다.

열은 없는데.


“하…… 널 어떻게 할까, 응?”

짙고 깊은 욕망에 잠식당한 권재하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제멋대로 좋은 쪽으로만.

생각했다.

방전 된 인형처럼 공허한 은조의 눈동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권재하 너를 완전히 버릴래.

그러려면…… 나를 먼저 버려야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