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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달콤한 굴복 (55/100)


55. 달콤한 굴복
2022.12.08.



 


“기다려.”

재빨리 차에서 내린 재하는 은조가 내릴 수 있게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잡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갔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시선을 내려뜨리고 있는 은조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슴 깊은 곳이 간질거리는 게.

마치 첫 데이트를 마친 기분 같기도 했다.

이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지 약 12시간.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대체 뭐가 달라졌지.

여전히 윤은조는 내 곁에 있다.

꼭 붙들린 손을 뿌리치지는 않지만 시선을 마주하려는 생각은 없어 보인다.

권재하는 오랜만에 혼란스럽고 불안한 감정을 느꼈다.

정확하게는 시간을 거꾸로 돌린 듯 딱 8년 전 그때처럼.

뒤죽박죽, 형태도 질서도 없는 감정들이 그를 흔들고 있었다.

.
.

같이 들어선 집도 왠지 휑하니 온기라고는 느껴지지가 않았다.

재하는 은조의 손에 살짝 입술을 누르고 놓아주었다.


“따듯한 차 한 잔 마실까?”

아니- 여전히 눈을 내리깐 그녀가 고개를 살며시 가로저었다.

그 모습 또한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사랑스럽게 보였다.

게다가 저처럼 어색한 숨을 쉬는지 가슴이 두어 차례 크게 올라왔다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래, 피곤하다고 했지. 그럼 쉬어. 난 봐야 할 서류가…….”

뒷머리를 쓸며 막 돌아서려던 재하의 소매가 붙들렸다.


“같이, 있고 싶어.”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녀를 수없이 안았었고, 깊고도 아득한 절정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함께 맛보았다.

그 모든 장면 장면들을 선명하게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데.

지금 아이처럼 제 옷소매를 붙들고 어두운 창 밖에 시선을 둔 그녀는 마치.

또 다른 모습의 윤은조 같았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구분이 되지도 않는다.

은조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린 재하는 동그랗고 말간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은조야. 그런 말은 내 눈을 보고 해야지.”

뜨겁지는 않아도 최소한…….


“싫으면 관둬.”

시큰둥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가, 이 천하의 권재하가 내내 생떼를 쓰며 달라고,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기는 했지만.


“윤은조, 너 지금 나한테…….”

“같이 있고 싶다고, 못 알아들어? 함께 자고 싶다고.”

재하는 결국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도 간절히 원하던 바를, 그것도 직접 눈앞의 예쁜 입술이 말하는데.

이 유쾌하지 않은 감정은 뭐란 말인가.


“진심이야?”

“전에 말했잖아, 진심이 왜 필요하냐고. 그 말이 이제야 이해가 돼. 나, 기분 좋아지고 싶어, 잘못됐어? 원하던 거 아냐?”

“원하던 거 맞아.”

“그런데?”

“글쎄,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어서.”

“잘못된 거 없어. 우리 호텔에서 키스했잖아. 내가 원했어.”

“…….”

“지금도 그렇고…… 제대로 하고 싶어.”

“제대로?”

“응, 제대로 기분전환.”

“기분, 전환? 네가 바꾸고 싶은 감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나랑 뒹굴면서 바꾸겠다, 그렇게 이해해도 돼?”

한참이나 뚫어지게 은조의 눈을 들여다보는 재하는 생각했다.

최소한 뭐 대신에 제가 필요한지는 알아야겠다고.

그녀가 말하는 것은 대안(代案)임이 분명했다.

어떤 것을 대신해 그것을 해야겠다는, 혹은 하고 싶다는 얘긴데.


“아니면 우리가 서로를 원하는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해? 싫으면 관둬. 계속 질문에 대답하기 지쳐.”

“왜 기분이 별로인지를 먼저 말해 줘.”

“…….”

“하…… 윤은조, 한 번만 더 이러면. 너, 정말 혼나는 수가 있어.”

은조를 끌어당긴 재하는 조금은 뾰로통해 보이는 입술 위에 짧고 부드럽게 키스했다.


“…….”

그리고 여전히 새치름하게 내리깐 눈 아래, 자그마하니 오뚝한 코끝을 톡톡 두드렸다.

시선은 여전히 촉촉한 입술 위에 둔 채로.


“오빠가 이번만 특별히 봐주는 거야.”

내가 얼마나 참는지도 모르면서.

이런 섣부른 도발을 불사하는 이유가 기분전환이라니.

환호라도 지르고 넙죽 받아먹어야 하는데 괜히 속이 쓰린 건 무슨 이율까.

재하는 은조의 뺨을 부드럽게 쓸며 아이 달래듯 말했다.


“피곤하다며. 내가 욕조에 물 받아 줄게.”

“아니, 간단하게 씻고 잘래.”

은조가 쌩하니 몸을 돌리자 일순간 치맛자락이 꽃봉오리처럼 예쁘게 펼쳐졌다 오므라들었다.

그리고 여지없이 드러나는 매끈한 등허리 곡선.

난감한 표정을 짓던 재하는 맨손으로 얼굴을 한 번 문질렀다.

저를 들었다 놓았다, 그녀의 속셈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경계선.

윤은조, 그녀는 제가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곳과 아닌 곳을 확실하게 구분 짓는다.

물론 남에게도 마찬가지다.

세상과 저 사이에 확실한 경계를 그어 놓는다는 얘기다.

그 선 밖에 권재하를 내버려 두었던 것이 결국 그를 견디지 못하게 만든 이유였다.

그녀는 자기만의 일정한 방식이나 절차를 절대적으로 지킨다.

자존심, 고집, 혹은 삶의 방식일 것이다.

잠시 다른 세상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해도,

언제든 다시 저만의 영역 안으로 되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고…….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 경계선을 훌쩍, 쉽게 뛰어넘게 만든 것인가.

재하는 지난 12시간을 거꾸로 찬찬히 되짚어보았다.

***

욕실을 나온 은조는 한동안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서 있었다.

그리고 작심한 듯 목표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권재하가 저를 위해 준비한, 여러 개의 나이트 웨어 중 사랑스러운 핑크색 테리 가운을 몸에 걸쳤다.

막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얼굴이 거울에 비춰졌다.

투명할 정도로 맑은 피부와 대비되는 발그스름한 뺨.

충분했다.


“…….”

침대로 가기 전 방문 앞으로 다가간 은조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두 뼘 정도,

문을 열어 두었다.

***

서류는 핑계였다.

윤은조에게 그녀만의 행동 패턴이 있듯 권재하도 마찬가지다.

냉정한 사업가가 된 그는 쉽게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욕정에 눈이 멀었다 한들 치밀한 사업가의 면모를 버리지 못한다는 말이다.

선과 후,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것은 몸에 밴, 고정된 태도였다.

그래서.

발정 난 개XX마냥 은조의 뒤를 쫓는 대신 1층에 머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래, 그 시기를 기준으로 앞뒤로 1년 정도 넉넉하게. 번호도 이름도 같은 사람이 없을 테니 어렵지 않을 거야.]

[오케이. 그래도 예민한 부분이라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어.]

[그런 소리를 들으려고 네게 연락을 한 게 아닌데. 로즈벨트 하스피틀은 딱 하나야. 그것도 응급실.]

[그래, 그래! 알겠어! 아무튼 성질 하고는. 최선을 다할게! 그건 그렇고, 나탈리와의 일은 어떻게 된 거야?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너도 알겠지만 이미 한참 전부터 눈치챈 사람들도 많아. 넬슨 회장도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지 이미 알고 있을걸. 어떻게 모를 수 있냐고.]

[나탈리에 대해서는 내가 먼저 어떤 의견을 내놓을 생각이 없어. 남자들 간의 의리랄까.]

[남자들 간의 의리라니! 카일, 비유가 이제 아주 노골적이구나. 도저히 너희 둘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런 걸 바라지도 않아. 그럼, 알아보고 연락 줘.]

[잠깐, 너 한국에 간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다 말았잖아! 여자 때문이 맞지?]

[그래, 그 여자가 지금 갑자기 딴 사람처럼 굴어서 날 또 미치게 만드는 중이다. 됐어? 만족해?]

호들갑을 떠는 친구에게 일방적으로 작별인사를 건넨 재하는 통화를 마쳤다.

이미 시간이 꽤 흐른 상태였다.

자리에서 일어서던 그는 서재 입구에 놓여 있는 검은색 종이 가방을 발견했다.

최고급 브랜드의 블랙 미니 드레스.

그 핑크 드레스는 이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정도 수준이다.

망할. 어쩌자고 이걸 샀는지.

……집에서만 입으라고 해야겠군.

.
.

분명히 방문 앞에 두고 돌아설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이 열려 있다.


“하…….”

지나치게 유혹적인 작태가 아닐 수 없다.

놀란 듯 순진한 표정을 짓다가도 이내 앙큼한 고양이로 변하는 윤은조.

그 눈빛을 누구보다 잘 아는 권재하는 들고 있던 가방을 툭 내려놓았다.

정말 작정이라도 했다면 더 이상 이겨낼 방법이 없다고.

패배를.

아니, 달콤한 굴복을 인정했다.

재하는 방 안으로 들어서기 직전 손에 들린 유리잔 안의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솔직하고 단순한 몸이 이미 뜨겁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
.

그렇게 열에 달뜬 몸으로, 눈으로.

한참이나- 잠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

사랑을 나누면, 재하는 작고 지친 몸을 닦아주고,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주고, 빗질을 해주었었다.

품에 안겨 받기만 하면서도 힘들다, 너무 한다,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때, 그 윤은조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는데.

지금은.

더 자랐고.

여전히 말을 안 듣고.

미치게 야하다.

제멋대로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고개와, 긴 그림자를 만든 풍성한 속눈썹이.

살풋 열린 듯, 도톰한 입술이.


“…….”

느슨하게 벌어진 가운 사이로 보이는 하얗고 날씬한 다리를 훑던 재하는 탄식을 뱉었다.

허기질 대로 허기진 짐승을 초대해 놓고.

잠을 자다니.

달그락- 잔 안의 얼음이 움직였다.


“……음.”

언제 잠들었지…….

은조는 몸을 뒤척거리며 허리 아래에 뭉쳐져 있는 바스가운을 잡아당겼다.

작정하고 입기는 했는데 도톰한 천이 아주 답답하고 불편하다.

벗어버릴래.

잠결에 상체를 일으킨 은조는 작은 불만을 입안에서 굴리며 허리를 조이고 있던 가운의 끈을 느슨하게 당겼다.

옷깃이 벌어지며 동그랗고 하얀 어깨와 도도록하게 솟아오른 부분이 얼핏 드러난 순간,


“악!”

짧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파르스름한 어둠의 한가운데, 침대 발치에 서 있던 남자가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간 떨어지겠다.”

달그락, 커다란 손에 들린 위스키 잔 안의 얼음이 움직였지만 은조는 얼어붙은 것처럼 그대로다.


“어, 언제…… 아니, 왜 여기 있어?”

“은조야…….”

미끈하게 드러난 여자의 다리 위에 머물러 있는 남자의 눈이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빛났다.

여긴 내 집이야.

네가 문을 열어줬고.

조심성 없게.

입가에 느긋한 미소를 건 권재하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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