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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저질끼리 오랜만에 제대로 (56/100)


56. 저질끼리 오랜만에 제대로
2022.12.12.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재하의 시선은 은조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스물두 살 때랑 똑같아, 지금 네 모습.”

“…….”

“막 잠에서 깬 너, 부스스한 귀여운 머리.”

내가 아주 좋아했던 모습이지- 속삭인 남자가 성큼 다가섰다.

흡- 은조는 들이마신 큰 숨을 가슴에 가둔 채, 재하가 들고 있던 크리스털 잔을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놓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바로 코앞에 서 있는 그는 팬츠 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채, 지그시 내리깐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아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가 이겼어.”

“……?”

“내가 졌다고.”

“…….”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뭐든지-

낮고 그윽한 저음이 귓가를 스치는 순간, 날카로운 전율이 등허리를 찌르고 발가락 끝까지 치달았다.

이미 두뇌 회로가 정지되었는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없다.

누가 이기고 누가 졌다는 얘기인지 도저히……!

뒤늦게 뜻을 알아차린 은조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지자, 웃음을 참는 듯 재하의 입꼬리가 살며시 말려 올라갔다.


“그,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못 이기는 척…….”

“윤은조의 기분전환을 도와주겠다는 말이야.”

“……뭐?”

여유작작한 태도에 은조는 현기증까지 느꼈다.

깊은 눈으로 다정하게 바라보며, 맞잡은 손에 입술을 누르던 권재하는 사라지고 다시 본래의 권재하가 돌아와 있었다.

윤은조도 원래의 그녀로 돌아갈 타이밍인지도 모른다.


“왜, 막상 기분 좀 바꿔 보려니까 겁이 확 나? 무서워?”

“무섭긴!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겁먹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니야!”

큰소리를 치며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눈을 치켜뜨는 은조를 재하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럼, 나라는 얘긴가? 내가, 그런 하잘것없는 것을 주워 먹어야 한다고?”

“그래! 약혼녀를 배신하는 아주 막돼먹은 짓인데, 괜찮겠냐고 묻는 거야! 기, 기회를 주겠다고!”

반은 벗은 상태나 마찬가지면서, 마구 헝클어진 귀여운 머리를 하고는.

같잖게 목소리를 높이는 은조를, 재하는 그저 지그시 내려다볼 뿐이다.

곧 허공에 대고 삿대질을 하겠-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고 묻잖아! 내가!!”

-하고 있다.


“내 약혼녀 걱정을 해주는 거야, 지금? 이 판국에?”

“그, 그래! 나탈리는 좋은 여자야! 한번 만났지만 그 정도는 알아!”

“그래그래, 대단해. 광장해, 윤은조.”

핑크색 가운 밖으로 하얗게 드러난 피부를 훑던 재하는 뜨거워진 입술을 혀로 적셨다.

세상 다 산 것 같은 눈으로, 제 말을 못 알아듣겠냐고 잘도 지껄이더니.

역시 작은 머리통을 더 굴린 시간을 주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질!”

“저질? 내가? 자다 깨서 그런가, 우리 은조가 오해 많이 하네. 기분전환을 위해 날 이용하겠다고 한 건 넌데.”

“…….”

“그래, 저질끼리 오랜만에 제대로. 응?”

“나 나탈리한테 미, 미.”

“까분다, 자꾸 나탈리 들먹거리지? 너한테 중요한 건 여전히 나, 권재하의 기분이야. 좀 봐주는 것처럼 구니까 아주 입을.”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발그스름한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

이내 엄지로 통통한 아랫입술을 짓뭉개는 재하가 옅은 한숨을 내쉰다.


“쓸데없이 허투루 놀리네.”

“…….”

“마음이 변하셨나?”

“…….”

아니- 고개를 조금 숙여 시선을 피한 은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기분을 어떻게 바꾸고 싶어, 원하는 대로 해줄게. 나 알잖아. 설마 잊은 건 아니지.”

아니- 은조가 말귀를 겨우 알아듣는 어린아이같이 다시 도리질을 한다.

잊었다는 거야, 도저히 잊지 못했다는 거야-

낮게 속삭인 재하는 헝클어진 은조의 머리카락 속으로 커다란 손을 밀어 넣었다.

예전에 그랬듯이 긴 손가락을 살살 부드럽게 움직여 엉킨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끝끝내 잊지 못한 건 저 자신이라는 생각에 쓴 웃음을 입에 걸었다.

그리고 양해 따위 필요 없는, 제 것인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은조가 바로 슬금슬금 엉덩이를 빼며 좁아진 공간을 넓히려 애썼지만,

그의 손은 이미 핑크색 로브의 허리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다, 너도 나도.”

낮은 웃음소리를 흘린 재하를 향해 은조가 눈을 치켜떴다.


“장난치지 마. 그냥…… 할 거나 해.”

“이런, 그 태도 마음에 들어.”

이씨- 은조는 저도 모르게 얄밉게 빈정거리는 반반한 얼굴을 향해 손을 날렸다.

탁, 여지없이 가는 손목을 낚아챈 재하는 그녀를 달구는데 더 열을 올린다.


“예전에 두어 번 맞아 준 걸로 충분해. 내가 어설픈 대학생도 아니고.”

“…….”

“뭐, 사실 따지고 들자면 그때도 어설프지는 않았어, 그렇지?”

“…….”

“게다가 네가 날 한 대 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화르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지. 알면서.”

“미친X.”

“와우- 꽤 자극적인데.”

어느새 넓은 방의 공기가 뜨겁고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

“자, 날 이용해. 네 기분을 위해서, 어서.”

유혹과 욕망이 뒤섞인 남자의 숨이 꽤 나른했다.

당황해서 붉어진 얼굴, 망설이며 달싹거리는 귀여운 입술.

뚫어지게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동자 안에서 번쩍, 불꽃이 터졌다

연약한 피식자의 목을 물어뜯을 준비를 마친 것처럼.


“아, 그 전에.”

“…….”

“너, 다시 만나고 내 이름 한 번도 부르지 않았어.”

“…….”

“불러 봐.”

“…….”

“예전처럼, 몇 번씩 그렇게. 응?”

“……아니.”

“과연?”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속으로 다시 들어와 있던 손가락이 느릿하게 움직이더니 작은 턱을 들어 올렸다.

입안의 여린 살을 짓씹는 은조는 흔들리는 시선을 툭 떨어뜨렸다.


“…….”

“그만 망설이자.”

처음도 아닌데- 잇새로 잔인한 소리를 밀어낸 그가 허리끈을 확 잡아당겼다.

흣-

그 짧은 한 번의 동작으로 재하는 쉽게 달고 부드러운 입술을 집어삼켰다.

놀라 휘적거리는 양팔, 허락하지 않겠다고 앙다문 입술,

부질없고 여린 반항이 서서히 사그라질 무렵.

어떤 간격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가늘고 흰 목을 사납게 그러잡고 있던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은조야…….”

힘 빼야지- 잠시 떨어진 입술이 나긋하게 속삭였다.

너무 깊어 스스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악연일까.

아주 가끔은 운명이라고 믿고 싶었던 그것에게,

은조는 다시 입술을 열었다.

깊고, 진득한 키스가 길게 이어졌다.


“내 눈, 똑바로 봐.”

“…….”

“네가 갑자기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이유도 필요 없어. 알잖아, 난 배려 같은 거 할 줄 아는 새끼가 아니거든.”

경고를 마친 재하는 바로 거칠게, 깊숙이 은조를 파고들었다.

배려가 없는 밤.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미쳐 날뛰는 남자는,

여자에게 제가 허락한 것 말고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안타까운 숨을 토해내던 여자에게서,

끝내 제가 원하던 것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권재하.”

그야말로 배려가 없는.

잔인하고 달콤한 밤은 지독하리만큼 길고도 길었다.

***

눈을 뜬 재하는 바로 상체를 일으켰다.

없다!

윤은조가 어디에도 없었다.

엉망으로 구겨진 시트가 지남 밤이 꿈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녀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설마- 말도 안 되는 상상으로 심장이 불규칙하게 꿈틀거리려는 찰나,

드르르르- 휴대폰의 진동을 느꼈다.


[아직, 집이십니까?]

“응, 방금 깼어.”

[대박- 늦잠을 주무셨다느- 아니, 아직 모르시는군요.]

“뭘?”

재하는 은조의 온기를 찾아 시트 위를 손으로 쓱 훑었다. 그리고 바로 얼굴을 구겼다.

차가운 시트가 말했다- 너 상대방에게 버려졌다고.

하!


[일단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을 취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미-.]

“에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 말 못 들었어? 나. 방금. 잠에서 깼다고.”

그것도 혼자- 재하는 애꿎은 침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기사가 났습니다. 별로 안 좋아요. 윤은조 씨 신상정보가…….]

어느새 재하의 손가락은 은조를 찾아 급하게 움직였지만 돌아온 것은 기계가 보낸 메시지였다.


[지금은 회의 중입니다. 끝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시X, 벨몽도 X 같은 새끼!”

 

***



“누군데 자꾸 거절을 해?”

눈치 빠른 장 팀장이 커피를 홀짝이며 눈짓으로 은조의 휴대폰을 가리켰다.


“스팸 전화요.”

은조가 밝게 웃어 보였다.


“선배님, 그런데 오늘 얼굴이 좋아 보이는 것도 같고 피곤해 보이는 것도 같고. 무슨 일 있죠?”

정말 순진한 얼굴로 질문을 한 후배 앞에서 오히려 은조가 얼굴을 붉혔다.


“티나? 음…… 남자랑 같이 있었거든.”

담담하게 말한 은조와 다르게 함께 차를 마시던 동료들은 얼어붙었다.


“왜 그래 윤은조, 사람이 갑자기 변하고 그러는 거 아냐.”

큼- 장 팀장이 어울리지 않게 헛기침을 한다.


“이런 말 이상한 거 아니잖아요, 다들 어른인데.”

“선배님- 아- 캐릭터가 그런 게 아니었는데…….”

“내 캐릭터가 어떤데?”

“어- 얌전한-.”

“이제 앙큼한 고양이 해보려고. 늘 같은 캐릭터 좀 지겨워서. 매일 같은 옷만 입는 것 같고.”

“누구나 자기가 편안하게 생각하는 옷이 있으니까.”

팀장이 뭔가 아는 것 같은 한소리를 했다.


“그래서 오래 같은 옷만 입었는데 좀 다른 것도 입어보고 싶어졌어요. 디자이너답게?”

“기분전환 제대로 하겠다는 소리네.”

팀장의 단어 선택에 은조는 또 귀 끝까지 붉게 물들이고 말았다.


“어어- 선배님 이러면 정말 궁금해진다고요! 남자는 아니고 대체 뭐예요?”

“남자 맞는데, 나…… 기사에도 나왔어.”

“에이- 아무튼 우리 선배님…….”

후배 디자이너 최장미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진짠데.”

은조의 말을 재미없는 농담으로 치부해 버린 동료들은 이내 그렇듯 연예인 얘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누군가 어떤 기사를 들먹이며, 여자가 입은 드레스를 칭찬했다.


“선배님, 기분전환 하려면 이 정도는 입어 줘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입었었어…… 벗었고.”

또또, 재미없는 농담이나 던진 윤은조가 다시 얼굴을 붉혔다.

에에이- 너무 하시네- 재미없어요- 여기저기서 원성이 터진 순간,

사무실의 유리문이 벌컥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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