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네가 불러주는 진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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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네가 불러주는 진짜 나
2022.12.15.
같이 밤을 보낸 은조가 꿈처럼 사라져버린 아침.
재하는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쳤다.
차의 시동을 걸자마자 강 비서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더 이상 기사가 퍼지는 거 막고, 언론 개인을 막론하고 사실과 다른 내용을 유포하거나 신상정보 유출, 악의적인 기사의 재생산, 게시글, 댓글 할 거 없이 모든 억측과 명예훼손 등 2차 피해에 대해 강하게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혀.”
[네, 즉시 공문 돌리겠습니다.]
“그리고 사진 보낸 사람 잡아내.”
[네. 그런데 지금 오시는 중이십니까.]
“아니, JS로 가고 있어.”
[아…… 혹시?]
“그래. 만나러, 왜.”
[이 상황에서는 행동에 신중을 기하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물론 제 말은 듣지 않으시겠지 만요.]
“맞아, 끊어.”
가속페달을 밟은 재하는 알고 있는 모든 욕을 씹어 뱉어냈다.
제목만 다른 같은 내용의 기사가 빠른 속도로 업데이트 되고 있었다.
투데이 엔터테인먼트- 그들만의 미국식 연애방식?
[인기 스타들의 열애설을 발표하는 ‘다스패치’가 미국계 투자회사의 대표 A 씨의 사생활을 기사화했다.
다스패치는 짧은 글과 함께 지난 주말 모 호텔에서 찍힌 A 씨의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 속의 주인공은 미국계 한국인 실업가 A 씨와 모 대기업 소속의 디자이너 B 씨로 알려졌다.
다스패치는 두 사람이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듯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애정이 듬뿍 담긴 것으로 보였고, 당당하게 공개적인 키스를 즐겼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다만 A 씨에게는 미국인 약혼자가 있어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는 미국 유수의 재벌 기업 D사의 차세대 오너로 출중한 학력과 외모, 비밀스러운 사생활로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세간의 이목을 사로잡은 사실이 있다.
약혼녀를 둔 A 씨는 호텔에서 찍힌 사진이 공개되면서 다시 한번 세간의 이목을 끌었지만 상대방 여성은 신분이 노출되는 등 사생활 침해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레알 미쿡 스타일의 연애 방식이다.
-남자는 돈만 있으면 미인은 덤.
-위에 댓글 언제 적 썩은 사고냐? 여자가 물건이냐 ㅅ꺄
-그냥 부럽, 커플은 지옥가길
-모 제약회사 디자이너라고 함, 럽스타그램 링크합니다. ㄱ ㅐ예쁨 직접 확인하세요.
-약혼자 두고 양아치냐, 둘 다 ㅆㄺ
-화보 같다 누가 찍은 사진인지 제대로넹
가속페달을 더욱 세게 밟는 재하가 인상을 구겼다.
함께 극락을 맛보고, 더러운 선물을 안겨주었다.
당연히 전화는 안 받는다.
엉망진창이지만 얼굴을 보고 하…… 사과를 해야지, 뭐.
시X, 애걸을 하든가.
***
반면, 출근하면서 기사를 접한 은조는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몸과 마음에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온몸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었고 갈라지는 목소리 때문에 따듯한 차를 연거푸 세잔이나 마시기도 했다.
무엇보다 지난밤 A 씨와 저지른 낯 뜨거운 장면들이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술을 더 마실걸.
대단한 작심을 한다고 결연한 마음까지 먹었던 은조는 다소 황당했다.
그게.
너무 오래전이라 다 까먹었을 것 같았던 그게.
내심 약간 두려움마저 느꼈던 그게.
……나쁘지 않았다.
이제 와 생각하니 저도 사람인지라 인정하지 않는 욕구불만이 존재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짜증 나는, 너무 야하게 미친 것 같은, A 씨의 말이 전부 맞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인정하기는 싫지만 말이다.
마치 미루고 미루던 진저리 나는 숙제를 해치운 것 같기도 하고.
막상 하고 보니 지각 결근이랑 다를 것도 없어, 오히려 후련하기까지 했다.
“…….”
어린 시절에 관계 손상을 겪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방어적 인간관계를 갖는다.
즉,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질수록 친밀감과 더불어 위협감도 갖게 된다는 뜻이다.
애정 결핍과, 지나치게 독립적인 성향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은조의 보호막은 자신을 지킬 만큼 충분히 단단하지만, 유연하지 못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자기표현과 상호교류에 서툴렀다.
그런 자신을 알게 되었고 변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서툴다.
재하에게서 줄기차게 전화가 오고 있었지만 받을 용기가 없었다.
별거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실상 별거 아니었지만.
누구도 알아서 안 되는 그 밤의 세세한 조각들. 그것을 감당하기에 그녀의 낯짝은 여전히 얇다.
두껍게 만들려면 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어울리지도 않는 용기를, 동료들을 상대로 나름 빤빤하게 부려보았는데.
비웃음이나 사고 말았다.
역시 사람은 하던 대로 하고 살아야 해- 뻘쭘해서 찻잔에 코를 박은 순간,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
하……망할 A 씨가 왜. 왜 여길 왔냐고!
이걸 어째, 지금이라도- 도망가?
“카일, 알렉시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최장미가 중얼거렸지만 은조의 동료들은 모두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은조야.”
그윽한 목소리에 동료 중 누군가 어머- 탄식 소리를 냈다.
“대박. 선배님…… 지, 진짜였어요?”
응- 고개를 끄덕인 은조는 빠르게 재하의 소매를 붙들었다.
“나가, 나가서 얘기해.”
.
.
재하는 꾸며진 지 얼마 안 되는 제 집무실로 은조를 데리고 갔다.
“은조야, 그게- 내 약혼은 말이야. 아니, 기사는 말이지.”
“상관없어.”
“뭐?”
“기사 같은 거 상관없다고.”
“…….”
“다 알고도 내가 결정한 거야. 나쁜 짓.”
“윤은조.”
“정말이야 그러니까- 괜찮다고, 진심이야.”
“내가 말하지 못한 게 있어. 나탈리와 나는-.”
“됐어, 상관없어. 이제 와서 그게 왜 중요해.”
“뭔 줄 알고.”
됐대- 재하가 미간을 구겼다.
딴 여자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소린가.
“뭐가 되었든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우리가 한 짓이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
“세상이 널 두고 함부로 말할 거야, 난 그런 꼴은 못 봐. 정식으로 내가-.”
“세상이 뭐? 내연녀? 상간녀? 나를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다고.”
재하는 옅게 웃어 버리는 은조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
“어제 나한테 그랬지 스물두 살 때랑 똑같다고. 글쎄, 외모를 두고 한 말이면 고맙지만. 난 그때랑 많이 달라. 달라진 것 같아.”
“…….”
“8년 전 그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 관계를 알았으면 뭐라고 했을까. 보고 배운 것 없이 자라서 그렇다? 뭐 생각나는 대로 나쁜 말 마구 했겠지. 내가 두려워한 것도 그거고, 손가락질. 부모도 돈도 아무것도 없는데 자존심마저 쓰레기가 돼봐. 내가 어떻게 견뎠겠어. 결과적으로는…….”
말을 잇지 못하는 은조가 입술을 감쳐문다.
결과적으로는 남들의 손가락질 보다 수천 배 아픈 상처를 가슴 깊은 곳에 묻었지만.
“퇴근하고 봐.”
“…….”
“음…… 너만 괜찮다면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어. 지난밤처럼, 굴 거라면 말이야. 나- 되게 힘들어.”
“지금, 내가 들은 게- 빨리 시작하고 빨리 끝내자, 이 소리야?”
“아마.”
“하! 누가 그래, 일찍 시작한다고 일찍 끝난다고. 그리고 이 상황에 그런 발언은 유혹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너 제정신이 아니라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 재하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집무실 안을 서성거렸다.
사실 은조를 보자마자 제정신을 잃은 것은 저였다.
당장 그 나쁜 짓이라는 것이 하고 싶어서 애가 바짝바짝 타는 느낌이었다.
봇물이 터진 것이다. 둑이 무너진 것이다.
이제 막을 방법도 없다.
“유혹? 그렇게 들렸다면…… 그런 거겠지.”
“당분간 마 실장님하고 떨어지지 말고 조심해서 나쁠 것 없잖아.”
“알았어.”
“이리 와 봐.”
“여기 회사야.”
“그래, 내 회사! 이까짓 구멍가게!! 내 거라고!”
“왜…… 이래?”
“아직도 목말라서 그런다! 넌 전부를 준 것 같지? 아니! 난 원하는 것의 아주 일부를 가졌을 뿐이야!”
젠장- 재하가 발을 굴렀다.
정말이지 딱 간식을 더 달라고 떼를 쓰는 다온이와 다를 게 없다.
어떻게 더 줘.
그렇게 물고 빨고. 한숨도 재우지 않아 놓고…….
“……요 며칠 운동 쉬었어?”
“아니!!”
“제발- 밖에서 듣겠어!”
“뭘 했다고 밖의 귀에 신경 써! 나나 신경 쓰라고, 나. 권재하!”
“나- 걱정돼서 온 거 아니야?”
“맞아.”
“충분히 고마워. 덕분에- 하…….”
“누구든 입을 함부로 놀리면 전부 소송을 준비해야 할 거야!”
“아- 미국 스타일.”
“…….”
“우리는 사소한 걸로 소송 같은 거 잘 안 해. 무섭잖아. 그래서 나도 너랑…….”
“이제 와서 소송이 무서워서 나랑 잤다는 얘기야?”
“제발! 권재하!”
“……응?”
“목소리 좀.”
“다시, 불러 봐.”
“……?”
“제정신으로 내 이름 불러 보라고.”
“변태같이 왜 자꾸 그거에 집착해!”
카일 알렉시스가 아닌 권재하. 그게 나라는 거.
네가 불러주는 진짜 나.
그걸 느끼고 싶어서.
“집에서 봐, 변태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이미 등을 돌린 재하는 금세 은조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
정말 시간을 되돌린 듯했다.
퇴근을 한 은조를 바로 잡아챈 재하는 진짜 변태가 뭔지 보여주겠다고 작정한 것처럼 굴었다.
그녀가 걸치고 있던 옷들이 현관부터 침대까지 길게 차례로 바닥에 떨어졌다.
뜨겁고 달콤한 키스를 나누고,
지난밤과는 또 다른 제대로 된 사랑을 나누었다.
천천히 느긋하게 눈을 맞추다가도, 언제 그랬나 싶게 휘몰아치기를 반복했다.
.
.
그리고, 아름다운 기쁨- 부주아(BEAU JOIE)가 있었다.
“너 피임약 같은 거 먹어?”
“……갑자기 왜.”
은조는 여전히 묵직하게 뒤에서 저를 감싸 누르고 있는 재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제도 그렇고- 피임.”
“……안전한 시기였어.”
“안전한 시기 따위 없다는 게 윤은조의 철칙이잖아.”
“나, 부쥬아 더 줘.”
“이미 많이 마셨어, 그만 마셔.”
“겨우 샴페인이야. 더 줘, 목말라.”
재하가 몸을 움직이자 피부에 차가운 공기가 닿았다.
소름이 돋았고, 몸이 떨렸다.
.
.
같은 시간, 뉴욕.
정오의 햇살 아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은조가 차에 치였던 그곳, 사고가 일어났던 그 거리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