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결국 사랑이라니.
(58/100)
58. 결국 사랑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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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결국 사랑이라니.
2022.12.19.
맑은 날이다.
오랜만에 햇살이 눈부셨고 바람은 상쾌하게 느껴졌다.
선글라스를 벗은 금발의 남자는 눈앞의 도로를 잠시 주시했다.
교통사고를 상상하기에는- 지나다니는 차도 별로 없고 사람도 특별히 많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근처 모퉁이만 돌면 명품 편집숍들과 유명 갤러리, 클럽과 특급호텔 등이 즐비한 번화가가 위치하지만.
현재 그가 서서 바라보는 장소는.
끔찍함과는 거리가 꽤 멀어 보이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한산한 거리였다.
큰 키의 남자는 검은색 정장을 걸치고 있었지만 눈부신 금발 덕분에 주위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푸르디푸른 눈동자는 보석처럼 빛이 났다.
브랜든 쿠퍼.
하버드에서 법을 공부한 그는 권재하와 절친한 사이다.
카일 알렉시스와 브랜든 쿠퍼가 한 장소에, 동시에 나타나기라도 하는 날이면 난리가 났다.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까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도 그럴 것이 키와 체격이 비슷한 두 사람이 한 프레임 안에 있으면 환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검푸른 벨벳같이 윤기가 흐르는 머릿결과 깊은 눈동자를 가진 재하와 금발의 브랜든이 같이 있는 것을 본 혹자는 말했다.
상반된 분위기가 절묘한 게, 천사와 악마가 같이 있는 것 같다고.
“…….”
브랜든 쿠퍼는 특별임무를 수행하는 미국 연방정부의 소속의 조사관이다.
보통 국가안보에 관한 범죄, 약취유괴죄, 연방 공무원이 관련된 뇌물수수 등 험하고 중차대한 일을 해왔다.
그런 그가 지금 휴가 중이고 개인적인 일을 보는 중이다.
알아낼 내용이 친구에게 기쁜 소식이 아닐 것이 확실하지만.
정보에 의하면 녀석은 현재 제 여자를 꼭꼭 숨기고 독차지하느라 열을 올리고 있었다.
“대체 어떤 여잔지 궁금하군.”
하버드 시절부터 매우 친하면서도 수컷답게 의미 없는 경쟁을 즐긴 둘이다.
브랜든은 내내 무심하고 시니컬한 태도로 일관하던 재하를 떠올리며 입술을 터트려 웃어버렸다.
지난번 통화에서 느낀 것은 그가 이미 평정심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결국 사랑이라니.
너도 어쩔 수 없구나, 카일. 멍청한 녀석.
평생 놀려줄 만한 꼬투리를 잡은 브랜든은 높다란 콧잔등에 다시 선글라스를 얹었다.
그리고 근처에 보이는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
.
[우노 카페!]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은 백발의 웨이터가 이탈리아식으로 말했다.
그가 두른 앞치마 왼쪽에 새겨진 이름을 바라보는 브랜든.
“감사합니다. 미스터, 마르토네.”
“마리오라고 불러요. 금발 씨.”
“쿠펍니다. 브랜든이라고 부르시죠.”
“뭐가 궁금하지?”
브랜든이 보기 좋게 입술을 휘었다. 꽤 노련한 이탈리아노다.
“이 카페가 여기에 얼마나 오래 있었죠?”
“20년 됐소. 내 가게지.”
“오, 이런. 내내 당신이 이 자리에 있었다는 말인가요?”
“물론이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심지어 크리스마스에도.”
성실함이 자랑스러운지 노인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이 근처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부 알겠군요. 기억나는 일도 많을 테고.”
“이봐, 금발. 당신 형사야? 그렇다면 신분증부터 보여줘.”
“중요한 사건을 조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분증은 보여드리죠.”
하지만 나이 든 이탈리아노는 막상 브랜든이 꺼내 보여 준 신분증에는 제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커피 맛은 어때? 이 시간에 혼자 즐기는 산책과 커피라니, 훌륭하군. Benissimo!”
“사실 제가 개인적으로 어떤 사건을 좀 알아보고 있습니다. 이곳이 현장인데 막상 보니 기분이 좀 이상하네요.”
여자가 차에 치였거든요- 브랜든이 손가락으로 바로 앞 도로를 가리켰다.
“여자?”
턱을 문지르며 가는 눈으로 가게 앞 도로를 바라보던 이탈리아노가 물었다.
“혹시 동양인 소녀?”
“맞아요! 그걸 어떻게 알았죠?”
“지난 20년 동안 여기서 누가 차에 치인 건 세 번도 안 돼. 게다가 한 번은 개였고. 너는 어떤 사인데? 네가 그 소녀의 남자였나?”
“정말 놀랍군요. 아, 나는 아니고 내 친구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이탈리아노는 딱 보면 알아. 그게 사랑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눈이 먼 게 아니라면 왜 차에 치이겠어!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얘기지. 게다가 연적이 저기- 저쪽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더군.”
“연적?”
“왜? 못 믿겠어? 내가 노망이라도 났을까 봐?”
“아뇨, 계속해 보세요. 몹시 궁금합니다.”
“그 애도 동양인이었어. 연적이 아니라면 내가 아니고 그 애가 신고를 했었어야 정상이지. 게다가 나는 신고를 하면서 그 애의 표정을 정확하게 봤거든.”
수다스러운 이탈리아노는 이야기를 길게 들려주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마지막에 그가 손가락을 튕기며 한 말이었다.
“그래! 가방! 그게 어디 있을 텐데. 버린 기억이 없거든!”
.
.
브랜든은 두잔 째 커피를 마시며 그를 기다렸다.
한참이나 지나서 돌아온 웨이터는 낡을 대로 낡은 작은 가방을 건넸다.
“그즈음 가게에 불이 난 적이 있었어. 경찰에 줬어야 하는데 내가 정신이 없었거든. 이걸 받을 사람이 이제야 나타난 건가.”
어차피 쓸모없어진 여권과 지갑이었다.
그리고…… 초음파사진.
“…….”
작은 꽃같이 어리고 여린 사진 속의 여자를 바라보는 브랜든은 아무 말이 없었다.
“윤, 은. 조!”
이탈리아노가 정확하게 발음했다.
“앰뷸런스에 실려 가긴 했지만 큰 사고는 아니었는데. 살아 있지?”
“물론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브랜든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로즈벨트 병원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았다.
***
간신히 출근 준비를 마친 은조는 1층으로 내려왔다.
“……!”
고소한 커피 향기가 가득한 거실에 권재하가 부는 휘파람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려있었다!
그는 지난주 내내 은조에게 밥이고 빨래고 통 손도 못 대게 했다.
그리고 아직도 몰랐냐며 집안일을 봐주시는 분이 있다고 말했다.
빤빤한 얼굴로 기가 막힌 소리를 잘도 하더니 이제 아침 식사 준비까지 알아서 척척 한다.
은조는 단정하게 차려진 아침 식탁과 주방 안에서 여유롭게 움직이는 재하를 번갈아 쳐다보며 작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결국 이러려고…… 날 집 안으로 끌어들인 거야.
몇 날 며칠을 시달린 그녀는 갑자기 분통이 치밀었다.
누구는 파김치를 만들어 놓고…….
재킷만 벗어 식탁 의자에 걸쳐두었지 빳빳하게 주름이 잡힌 팬츠며 셔츠, 넥타이까지 그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모습이다.
“왔어, 못 일어난다고 죽는 소리 하더니 예쁘기만 하네.”
“……짐승.”
“커피를 내리고 빵을 굽고 샐러드를 준비했는데? 칭찬 고마워, 앉아.”
“저질.”
“하, 계속 고맙다.”
“…….”
“아, 넌 쨈 있어야 하지. 잠시만.”
재하는 쨈을 가져다주며 고개를 숙여 은조의 이마 위에 쪽- 입을 맞추었다.
“많이 먹어. 넌 너무 저질 체력이야.”
“네가 이상한 거야! 넌…… 넌, 마치…….”
“아침부터 참 알차고 야한 대화다. 그렇지?”
“그, 그게 무슨…… 철없는, 애 같은 소리야!”
“아, 난 우리가 십 댄 줄 알았어. 미안.”
“마음에도 없는 가짜 사과 좀 하지 마! 꼴 보기 싫어.”
“너 밤에는 나 되게 예뻐라 하면서 꼭 해만 뜨면 이러더라. 아무튼 내숭 덩어리 새침데기.”
“……뭐? 말 잘했어! 날이 밝잖아! 떳떳하지 못한 짓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꼭 일일이 짚어가며…….”
“아, 일일이 짚는다니까 생각이 났는데, 우리 어두운 데서 하지 않잖아.”
변태- 재하가 소리 없이 입 모양을 만들며 윙크를 날렸다.
얼른 입을 다문 은조는 고개를 숙이고 잘 구워진 빵에 잼을 발랐다.
조심해야 한다.
엊그제도 멋모르고 그의 수작질에 놀아나다 결국 간신히 지각을 면했다.
스물 둘에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권재하는 정상이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살이 쭉쭉 빠지는 저와 다르게 그는 어디서 좋은 약이라도 챙겨 먹는 것 같았다.
늦게 자고 새벽에 깨우고, 분명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데 얄미울 정도로 기운이 넘쳤다.
이러다가는 골병이 들 것 같다.
은조는 지그시 저를 바라보는 눈길을 애써 외면하며 바삭한 빵을 크게 베어 물었다.
그리고 우유까지 한 모금 넘긴 후, 준비한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민아가 일이 좀 있어서 저녁에 다온이가 올 거야. 괜찮지?”
빵에 버터를 바르던 재하가 멈칫하며 눈을 끔벅거렸다.
“그럼, 물론이지.”
“흥.”
“흥? 무슨 의미지. 동구리가 널 구해줄 것 같아서?”
어림도 없다는 얘기다.
“수, 순수한 애까지 가지고 그런 소리 하지 마. 듣기 불편해.”
“은조야, 아무리 순수해도 사내새끼들은 열두 살만 되면, 아니, 요즘은 열 살만 돼도."
“됐어! 우리 동- 아니, 다온이는 아직 애기야!”
가당치 않다는 듯 재하가 코웃음을 웃었다.
“그래, 그래, 전부 애기 해. 동구리도 애기고 너도 애기고. 아주 앙큼한…….”
먼저 갈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은조를 재하가 얼른 붙잡았다.
“알았어! 안 할게. 앉아. 더 먹어야지.”
은조는 제 엉덩이 위에 올라와 있는 커다란 손을 탁 때렸다.
아주 틈만 나면, 핑계만 생기면 이러지-
“애 앞에서도 이래 봐.”
“그럼? 벌주게? 또? 어떻게?”
“…….”
말려들면 안 돼. 이건 다 계산된- 음흉한 속셈이야-
은조는 동그랗게 치켜뜬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하는 다시 그녀의 뺨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밤에는 같이 잘만 놀다가 아침만 되면 괜히 열불을 내며 얼굴을 붉히는 꼴이 꽤 귀여웠다.
“이번에는 뭘 선물할까, 동구리 말이야.”
“안 해도 돼. 지난번에 너무 과했어.”
“그래도 귀한 손님인데. 치킨 말고 동구리가 또 뭐 좋아해.”
다정하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동구리- 동구리- 하는 게 왠지 귀에 착착 감겼지만 은조는 제 뺨을 쓸던 재하의 손을 피했다.
“내가 밥해줄게. 너 먹고 싶은 거 말해.”
“내가- 먹고 싶은 거, 지금 말하면? 바로 주나?”
“정말…… 꼴 보기 싫어.”
“그래그래, 훤할 때는 너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지껄여. 밤엔 못 그러잖아.”
봐 줬다- 재하가 눈으로 웃으며 빵을 베어 물었다.
***
한편,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등록번호 BS8068- 보잉 737 AXJ.
블랙스톤 파트너스의 전용기가 막 이륙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