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형태가 분명한 어떤 것
(59/100)
59. 형태가 분명한 어떤 것
(59/100)
59. 형태가 분명한 어떤 것
2022.12.22.
마치 커다란 고래가 깊은 바다의 흐름을 즐기는 것처럼.
보잉사의 초현대식 비행기는 2시간째 밤하늘을 유영하는 중이었다.
제니스 알렉시스는 무릎 위에서 잠이든 강아지 릴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남편 카일 알렉시스의 주름진 얼굴과 백발을 바라보며 새삼 자신들에게 남은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남편은 최근 무릎의 통증 호소했고 치료를 시작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세월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편한 옷에 캐시미어 카디건을 걸친 그는 부쩍 피곤해 보였다.
앞으로 부부가 나란히 긴 비행을 하는 일이 몇 번이나 더 있을까.
화사한 컬러의 명품 트레이닝 복을 걸친 제니스의 얼굴에 우울한 빛이 스쳤다.
옅은 한숨을 내쉰 그녀가 호출 벨을 누르려 몸을 움직이자 릴리가 고개를 들어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네가 더 오래 살겠다, 앞일을 누가 알겠어. 그렇지, 릴리?]
시선을 들어 올린 카일은 작은 털 뭉치를 껴안고 입을 맞추는 아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막 입술을 움직이려는 찰나 승무원이 다가왔다.
[네, 부르셨습니까.]
[와인 좀.]
[네.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블랙스톤 그룹 전용기는 회의실, 식당은 물론 주요 수행원을 위한 사무실까지 따로 있다.
기본적인 업무를 담당할 승무원은 물론 요리사와 의사도 대동한다.
날아다니는 집무실이라고 불릴 만큼 편리하고, 통신시스템 등 최신식 시설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웬만한 나라의 대통령이 탈 만한 수준이다.
하지만 여든이 된 제니스에게는 그저 하찮게 느껴지는 것들 중 하나일 뿐이다.
와인 잔을 받아든 그녀가 말했다.
[건배할까요, 넬슨 회장을 위해서?]
카일이 놀란 눈으로 제니스를 바라본다.
[당신은 그럼 처음부터 전부 알고 있었으면서 내게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소리군. 섭섭해요.]
[허니, 당신이 그걸 알아서 달라질 게 뭐예요. 그 애가 어쨌든 그럴듯한 약혼을 계획해서 여러 가지로 이득을 봤잖아요. 게다가 적당한 시점에 그만두게 된 것도 나는 대환영이에요. 세상에 그렇게 긴 약혼 기간이라니. 가엾은 카일, 내 보물.]
[그렇게 아끼는데 그동안은 어떻게 보고만 있었어요? 직접 나서지 않은 게 신기하군, 당신 성격에 말이죠.]
[내가 나서서 되는 일도 아니고 그 애가 결국 알아서 했잖아요. 나의 카일은, 당신 말고 내 보물 말이에요. 그 애는 가지고 싶은 것을 놓치지 않아요.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리긴 했지만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그나저나 넬슨을 어쩌면 좋아요. 꽉 막힌 노인네. 나탈리가 여자를 좋아하는 게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인가. 우리끼리 얘기지만 난 숀이 혼자 있는 것을 보면 차라리 남자라도 좋아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어쨌든 숀이 당신에게 보물을 안겨 주었잖아요. 당신이야말로 이제 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쉬는 제니스.
[숀 얘기는 됐어요. 사실 나는 은조를 알게 된 순간부터 내내 증손자 생각에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에요. 카일에게는 비밀로 해요.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지만- 이미 생겼다면 주식을 선물하고 싶어요.]
[누구? 은조? 아니면 은조가 가졌을지도 모르는 아기?]
[양쪽 다죠!]
[제니스…….]
[만약 아직 아기가 생긴 게 아니라면 공부를 더 시켜볼까 생각 중이에요. 성적이 꽤 좋았던데 바로 직업을 가졌더군요. 실무를 하다가 공부를 한다면 물론 더 큰 장점도 있지만요.]
[오, 제니스 제발. 아직 은조를 만나기도 전이에요.]
[내 꿈에 찬물 끼얹지 말아요. 그녀가 한 행동들이며 그 눈빛을 보면 뭐든 다 가능해요. 누가 알아요, 새로운 여왕의 등장이 될지. 적어도 나는 재하의 안목을 믿거든요.]
[남자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안목과는 좀 거리가 먼일이에요. 논리나 기준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운명이라고요. 그저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
[로맨틱하긴.]
제니스가 낮은 웃음소리를 낸 순간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남자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이 여행을 총괄 지휘하는 책임자였다.
[아, 로빈! 그래서 호텔은?]
[네, 말씀하신 대로 24층 전부를 비웠다고 합니다. 사용하실 룸은 따로 전문 업체를 통해서 청소를 마쳤고요.]
[음, 좋아요. 그쪽 간부들에게 알리진 않았죠? 조용히 머물다 돌아가고 싶으니 끝까지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네, 단속 철저히 했습니다.]
[그만 쉬어요, 옷도 좀 편한 걸로 갈아입고. 피곤해 보여요.]
[네. 그럼.]
기대에 부푼 얼굴로 자신의 약지에 있는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려다보는 제니스.
절로 생겨나는 미소를 어쩔 수 없었다.
아기라니. 생각만 해도 세상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다.
이제 악렉시스가(家)를 이을 또 다른 제왕을 맞을 생각에 다소 우울해졌던 감정이 감격으로 바뀌었다.
[얼마나 예쁘겠어. 여자아이면 더 좋을 것도 같아. 세상에, 아기 여왕이라니.]
[제니스- 제발 적당히 해요. 대체 여왕이 몇이에요.]
잠이 오는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눈을 감는 카일이 손을 내저었다,
누구도 제니스 알렉시스를 말릴 수 없지만 솔직히 그도 속으로는 아기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여자아이면 당신 이름을 주는 건 어때요?]
갑자기 눈을 뜬 카일이 말하자 제니스가 웃는 낯으로 눈을 흘겼다.
[나는 숀 하나만 낳은 것을 정말이지 최악의 실수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카일과 은조는 적어도…….]
[그만, 충분해요. 제니스.]
역시 옅은 미소를 만든 백발의 카일은 다시 눈을 감았다.
잔에 든 붉은 액체를 들이켠 제니스는 새까만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꽤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
욕망으로 점철된 나날을 보내던 둘은 드디어 훼방꾼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안녕, 동구리.”
“아저씨!!”
내심 뜨끔해진 은조는 표정 관리에 애를 썼다.
재하에게 달려들며 반가움을 표시하는 아이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그래그래, 동구리. 요새도 일찍 일어나나?”
“네!! 저 방학도 했어요!”
흠, 그렇군- 재하가 입을 한일자로 만들었다.
“레고도 가지고 왔어요! 같이 만들어요! 아저씨가 사 준 거요!”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고 이름 부르라고 했지. 동구리?”
“카알?”
“카-일.”
“카일.”
“좋아, 그거야.”
“카일 아저씨! 그럼 지금 만들까요? 6가지 합체 변심 트랜스포머 공룡 로봇!!”
“변심이 아니라 변-신.”
“나는 티라노사우루스!!”
아랑곳하지 않는 다온이가 들고 온 상자를 흔들며 제자리에서 뛰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재하를 보며 은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기분이 매우 좋은 거야. 다시 한번 고마워. 선물.”
“별말씀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간식 만들어 줄게.”
“글쎄, 입맛이 별로 없네.”
“저기…… 부탁이 있는데.”
“그래, 말해. 뭐든지.”
은조가 바짝 다가오며 몸을 제게 기울이자 재하의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너무 빨리 잘 맞추면 안 돼. 아이를 위한 거잖아, 그렇지? 그냥 좀 도와주면서 공룡 소리만 낸다든가- 뭐, 그런 거- 알겠지?”
아- 얼빠진 표정의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
.
거실 바닥에 널린 작은 장난감 조각을 만지작거리는 재하는 착실하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냈다.
간혹 조립에 집중하던 다온이가 이상하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이내 제 일에 다시 집중한다.
“끼르륵, 끄륵- 끄륵-”
손은 하는 일이 별로 없고, 입은 근본도 없는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두 눈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과일을 깨끗이 씻고 조심스럽게 칼로 껍질을 벗기는 은조를.
예쁘고 먹기 좋게 담아온 그것을 포크로 찍어 내미는 은조를.
짙지 않은 색으로 설핏 웃음을 머금고 저를 바라보는 은조를.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작고 알록달록한 조각들을.
형태가 분명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가는 아이를.
“…….”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상상해 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윤은조를 소유하는 데만 열을 올렸지, 그녀를 안음으로써 재탄생 되는 새 세상.
그것에 너무.
무심했는데.
그건…… 아니, 이건.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생겨나는 권재하를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심장이 벌컥 피를 쏟아내는 느낌이 들었고 순식간에 입술이 말랐다.
“맛없어?”
멜론도 있던데 그걸 깎을까- 무릎을 접고 얌전하게 바닥에 앉아 저를 바라보는 은조는.
……예뻤다.
침대 위에서보다 더. 훨씬 더.
“아냐, 달다. 아주 달아.”
맛있어, 좋아- 재하는 팔을 뻗어 다온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이지.
딩동-
갑작스럽게 울린 벨 소리에 재하와 은조 다온이는 모두 놀라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
.
“안녕하세요!”
한국말로 인사한 제니스가 재하를 끌어안았다.
[할머니!]
[안녕, 카일- 써프라이즈!]
[할아버지!]
이미 껴안고 있는 둘을 백발의 카일이 더 크게 끌어안았다.
은조와 다온이는 동그란 눈으로 그런 세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리고 드디어, 은조와 다온이에게 다가온 제니스.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에 방금 전까지 여독으로 창백해졌던 얼굴에 핏기가 돌았다.
[오! 이런! 너도 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네. 다온! 반가워 귀염둥이.]
“엄마…….”
다온이가 자동으로 은조에게 달라붙었지만 벽 안의 이방인을 바라보는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다온아! 나는 너의 증-조 할머니야. 내 이름은 제니스라고 해.”
한국말을 한 제니스가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그 얼굴이 결국 은조에게 와 닿았다.
“안녕하세요. 윤은조 씨 맞죠? 반갑습니다.”
[제니스, 천천히 해요. 반가워요, 은조. 우리가 예고 없이 왔어요. 사과부터 할게요.]
백발의 노신사 역시 인자한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은조야, 미안해. 나 모르는 일이야.”
재하가 뒷머리를 쓸며 난처한 얼굴을 했다.
“아냐…… 괜찮아.”
[정말 놀라워! 맙소사. 카일 어쩜 좋아, 나 호텔 말고 여기에 머무르고 싶어!]
한껏 흥분된 귀부인의 목소리를 듣는 은조는 큰 눈을 연신 껌벅였다.
우리 다온이의 중조 할머니……?
그럼…… 우리가 무슨, 사이라는 거야.
“…….”
은조와 재하의 시선이 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