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숨겨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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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숨겨진 이야기
2022.12.26.
증조할머니라니.
은조가 여러 의미를 담은 눈빛을 보냈지만 재하가 대답할 리 없다.
게다가 몹시 놀란 그녀와 다르게 마치 언제든 일어날 일을 만난 사람처럼 손님들을 자연스럽게 리드했다.
부드러운 컬이 아름다운 은색 머리카락의 제니스가 먼저 제 집인 양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고급스러운 디자이너 브랜드의 트레이닝 복을 걸친 그녀는 꽤 밝고 활기찬 분위기를 풍겼다.
반면 그녀의 남편 카일은 핀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회색 정장을 격식까지 갖추어 차려입고 있었다.
정반대의 차림을 하고도 이상하게 제대로 어울리는 커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집이 아담하구나, 카일. 욕실은 어디야?]
[이쪽으로 오세요.]
은조는 제니스를 욕실로 안내하는 재하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담…….
“엄마, 강아지…… 만져 봐도 돼?”
다온이가 잡은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비로소 거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느라 분주한 흰 털 뭉치를 알아차렸다.
눈치 빠른 ‘증조부’가 재빨리 강아지를 다온이 앞으로 데려왔다.
[인사할래? 이름은 릴리란다.]
“이름이 릴리라고 하시네.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줘봐. 살살”
“릴리? 꽃 이름이야? 너무 귀여워.”
다온이가 작은 손을 내밀어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자아이야, 안아보렴. 릴리는 상냥한 강아지란다. 겁먹지 않아도 돼, 자!]
카일의 말대로 다온이의 품에 안긴 강아지는 저항도 없이 매우 얌전했다.
“와…….”
“여자아이라고 하셨어. 착하다, 그렇지?”
“응, 너무너무 예뻐.”
다온이가 릴리에게 뺨을 비볐다.
“네 마리를 전부 데리고 오실 줄 알았는데 천만다행이군요.”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은조는 흠칫했는데 어느새 바짝 붙어있던 재하는 빙긋 웃는다.
“동구리, 강아지를 좋아하는구나. 알았어, 접수.”
뭐가 또 접수야. 안 돼- 은조가 그를 향해 고개를 살며시 가로저었다.
못 알아들은 척 어깨를 들썩거린 재하는 카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비행은 힘들지 않으셨어요? 겉옷 주세요, 제 집에 오시면서 정장이라뇨. 누구를 의식하셨는지 뻔하지만 헛수고예요.]
[은조를 처음 만나는데 멋지게 보이고 싶은 게 왜 헛수고야? 너만 잘 보이고 싶다는 얘기 같구나.]
백발의 카일이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정확합니다, 이제 좀 앉으세요.]
.
.
정신을 차렸을 때 은조는 차를 준비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다.
그리고 다온이가 내는 행복이 가득 묻은 사랑스러운 웃음소리를 들었다.
“아아- 하하하- 간지러워! 릴리, 하지 마아아- 아하하-.”
아이는 강아지와 하나처럼 달라붙어 거실 바닥을 뒹굴며 놀고 있었다.
다온이는 어린이집에서 미국인 영어 교사와 자주 만난다.
그래서인지 제니스와 카일보다는 흰색 털 뭉치 릴리에게 더 큰 관심을 보였다.
릴리는 깜찍한 얼굴에 작고 까만 눈망울이 매력적인 흰색 포메라니안이다.
자연스럽게 내버려 둔 털이 공처럼 둥글고 풍성하게 부풀어 있었다.
훈련이 잘되었는지 짖지도 않는다.
밖에서 누군가의 강아지를 보면 항상 눈을 빛내던 다온이를 은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위해 선뜻 입양을 할 수 있는 처지는 못 되었다.
“……어!”
갑자기 한걸음에 다가온 재하가 아무렇지 않게 끓고 있던 전기 포트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은조의 뺨을 쓱 한번 쓰다듬었다.
“내가 할게. 가서 앉아, 두 분 다 나보다는 너랑 얘기하고 싶으실 거야.”
“으흥, 아니야. 내가 할게. 제발.”
은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소 애처로운 눈으로 사정했다.
“어, 애교야 뭐야.”
“이러면 나 당장 집에 갈 거야.”
“그렇지, 협박 쪽이 너한테는 더 잘 어울려. 뜨거운 물 조심해, 그럼.”
응- 은조는 재하를 몸으로 살짝 밀었다.
빨리 차를 내어주고 기회를 봐서 자연스럽게 빠질 생각이다.
하지만 재하가 자리로 돌아가자 오리지널 카일이 다가왔다.
[집에서도 차 준비는 주로 내가 해요. 도와줄게요.]
[괜찮아요! 이제 물만 부으면…….]
[좋아요, 그럼 같이해요. 내가 잔에 물을 따를 테니 은조는 지켜보면 돼요. 괜찮죠?]
시릴 정도로 파란 눈이 너무나 따듯한 빛으로 은조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쁜 미소를 짓고 있는 줄은 스스로도 몰랐다.
.
.
[그렇게까지 하시고 여기서 주무시겠다고 하신 거예요? 괜한 소리를 하신다는 걸 바로 알았지만요.]
[아냐, 그 순간 잠깐은 진심이었어.]
[지금은 물론 아니시고요. 제니스 알렉시스한테 이 집은 너무 아담하죠.]
재하는 장난스럽게 할머니 제니스를 놀리는 중이었다.
그녀가 뉴욕의 집을 떠나 호텔에 머문다면 어느 정도인지 익히 알고 있다.
아마 호텔 측은 현재 비상사태일 것이다.
[네 할머니를 잘 알잖니, 카일. 새삼스럽긴.]
[알죠. 어느 호텔이죠?]
[여기서 가까워 W.]
[노력한 직원들을 위해서라도 거기서 주무세요.]
“저…… 그냥 내 방을 내어 드리면 되지. 난 아이와 돌아갈 거니까.”
가만히 앉아만 있던 은조가 재하에게 다시 부탁의 의미를 담은 시선을 보냈다.
“그래, 거긴 네 방이야.”
그가 괜히 빙긋 웃는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좋아하는 거야 지금- 은조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그가 대놓고 저를 빤히 바라보는 덕분에 금세 바보같이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은조야, 이 두 분이 그곳에 머물면 아마 호텔 측은 이후 몇 년 동안 그 사실을 우려먹으며 이득 꽤나 볼 거야. 수백 수천에게 결국 좋은 거지. 그리고 내가 붙들어도 여기 묵지 않아.”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은 은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보기 좋구나.]
[동감이에요.]
냉큼 남편의 의견에 동조한 제니스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은조는 놀라울 정도로 예뻐요. 아마 당신 손자의 안목과 운명이 최고의 조합을 이룬 것 같아요. 축하해, 제니스.]
축하라뇨- 재하가 눈썹 끝을 치켜세웠다.
[그런 게 있어, 제니스의 원대한 꿈에 대한 것이란다.]
아무런 말 없이 차만 홀짝거리는 제니스는 놀고 있는 다온이와 릴리를 바라보았다.
[카일, 네 할머니가 무슨 소리를 했냐면- 여자아이가 생기면 아기 여왕을 만들겠다고 하더구나. 무시무시하지 않니?]
[너무 앞서가셨군요.]
찻잔을 들어 올린 재하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앞서간 정도가 아니지-
은조는 이제야 권재하가 제정신이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들이 본 현장이 단란하기 그지없는 한 가족의 오후였지만.
90% 정도 알아들은 바에 의하면 노부부는 은조와 재하의 관계를 심하게 오해하는 중이다.
무엇보다 나탈리를 생각하면 이건 정말 불편하다.
기사를 떠올린 은조는 자신이 모르는 미국식 사고방식이라도 있나 곰곰이 생각했다.
아니면 저 혼자 잘못 이해하고 이러나 싶기도 했다.
게다가 의도치 않게 다온이까지 끌어들였다.
마음이 편할 리 없다.
한참이나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 은조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재하의 시선과 마주쳤다.
“오늘 너한테 꼭 할 얘기가 있어.”
“아, 그래…… 그런데, 있잖아- 내가 불고기를 하려고 준비해 뒀거든. 삼사 인분 정도 돼.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같이하면 어떨까? 나는 준비하고 집에 가고 싶어. 아마 잘은 모르겠지만 입맛에 맞으실 거야. 서양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걸로 알거든.”
빠르게 제 할 말을 한 은조를 바라보는 재하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은조야, 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 오늘 꼭, 할 얘기가 있다고 했잖아.”
“목소리 높이지 마. 어른들 놀라셔.”
“대단한 배려군.”
[카일, 뭐가 문제야?]
그냥 지나칠 제니스가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은조가 두 분을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겠다고 했어요.]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저녁은 호텔에서 먹을 거야.]
[실은 제니스가 진짜 불고기를 몹시 기대하고 있단다. 우린 뉴욕에서도 꽤 즐겨 먹었잖니. 알지? 아니, 이러면 어떨까. 우리 다 같이 호텔로 가면 말이야.]
카일이 분위기를 바꿔보려 나름 쾌활한 어조로 얘기했다.
하지만.
[제가 불고기를 준비할 수 있어요! 싫지 않으시면 대접하고 싶어요. 한국인들이 즐기는 그대로, 진짜 가정식이라고 할 수 있죠.]
잘도 알아들은 은조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아요.]
은조는 눈살을 찌푸린 재하를 무시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은조, 너.”
그리고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빠르게 움직였다.
.
.
머릿속을 비우고 언제나처럼 맛있게 먹어줄 가족들을 생각하며 요리에 집중했다.
이미 갖은 양념과 배까지 갈아 넣어 재워둔 소불고기는 다온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야채를 넣지 않은 오리지널 불고기.
이내 집 안에는 침샘을 자극하는 달콤 짭조름한 냄새가 가득 들어찼다.
.
.
“안녕히 계세요. 안녕 릴리…….”
강아지와 헤어지는 다온이는 못내 아쉬운지 울 것 같은 얼굴이다.
재하는 내내 무표정이었고 알렉시스 부부 역시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은조는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바보 같은 연극을 오래 할 수 있는 그녀가 아니었다.
***
다온이는 다음 날까지 릴리, 릴리 노래를 부르며 아쉽고 그리운 마음을 어쩔 줄 몰라 했다.
“언니, 마트 옆에 애견카페 있잖아. 거기 가자. 날씨도 좋은데.”
“릴리가 좋아! 이모는 알지도 못하면서!”
“아니, 넌 뭐 처음 본 강아지한테 마음을 주고 난리야. 그렇게 예쁘냐?”
“릴리도 나 좋아해! 흐응…….”
“그럼, 릴리를 보러 가든가.”
내내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한 민아가 은조의 눈치를 살폈다.
“나가서 맛있는 거 먹고 애견카페도 가자.”
마음이 약해진 은조는 울음을 터트리기 일보 직전인 아이를 달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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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대형마트 주차장은 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음식점에 먼저 가 있으라고 아이와 동생을 미리 내리게 한 은조는 주차장을 몇 바퀴 돌고 나서야 자리를 잡았다.
막 차에서 내려 입구를 향하는데 앞에서 다가오던 누군가 그녀 앞을 가로막아 섰다.
“이게 누구야!”
“……!”
“예쁜 대리기사 양반의 더 예쁜 언니시잖아! 이런 우연이!”
여전히 구김이 많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는 은조를 보고 기분 나쁘게 웃었다.
“되게 반갑네.”
조광중.
꿈에도 보기 싫은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