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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약혼은 가짜였어. (61/100)


61. 약혼은 가짜였어.
2022.12.29.



 


[되게 반갑다는데 표정이 왜 그래요?]

[하나도 반갑지 않아요. 저리 비키세요.]

옆으로 지나가려는 은조의 앞을 조광중이 다시 막아섰다.

불량하게 번질거리는 눈알은 여전히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햐- 이렇게도 마주치네. 안 그래도 내가 연락 한번 하고 싶었는데 방법이 있어야 말이죠. 나 나쁜 짓 하려는 거 아니니까 너무 겁먹지 말고.]

[왜 이러죠? 겁나지 않아요, 귀찮고 관심이 없다고요! 비켜요, 당장!]

어디서 용기가 나왔는지 스스로도 처음 들어보는 앙칼진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막상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내가 생각을 해보니까, 그- 돈을 너무 적게 받았더라고, 요. 오빠분 아직 만나시나?]

여기- 아주 잘생긴- 조광중이 손으로 얼굴을 훑는 시늉을 하는 순간,


[뭐? 돈? 이 미친 인간아!! 다시 말해 봐!]

은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조용한 주차장의 공기를 찢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의외의 반응에 움찔한 조광중은 뒤로 한걸음 물러섰고 은조는 그런 그에게로 오히려 다가섰다.


[그러니까, 돈을 더 달라는 얘기야, 지금? 얼마? 응? 얼마!!!]

[아니, 왜 이러셔? 같은 사람 맞는데……?]

[헛소리하지 말고!! 대답해!! 얼마나 더 필요하냐고!]

[에이, 씨- 1억이 돈이야! 여기저기 틀어막고 보니까 금세 빈손이더라고! 2억은 받았어야 하는데.]

[뭐? 다, 다시 말해 봐요. 방금 뭐라고 했어요?]

[1억은 돈도 아니라고- 요! 그 건달 자식들은 둘이 합쳐 2억이니까 나도 2억을 받았어야 한다, 이 말이지!]

[……그러니까 1억이. 적다 이 말이죠. 1억이 적어요?]

[적지!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 봐요.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대리기사 양반이- 아니, 뭐 하는 거야?]

[보면 몰라요? 오빠한테 전화하려고요. 그쪽이 아직 우리 오빠를 잘 모르나 본데…….]

[아아~~ 잠시만요. 굳이 뭐 전화를~ 언니랑 나랑 해결 보자는 거지! 에이 씨.]

은조가 전화기에 대고 ‘오빠’ 소리를 하자마자 그 큰 덩치가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

 

.
.



“언니, 갑자기 입맛이 막 돌아? 천천히 먹어.”

고개를 끄덕인 은조는 포크에 크게 말려 있는 스파게티를 입에 넣었다.

잘 안 마시는 콜라도 쭉 빨아들이더니 다시 접시 안에서 포크를 돌린다.


“강아지 많이 먹어. 스테이크 더 시킬까?”

“아니, 배불러. 콜라 조금만 더 마셔도 돼?”

“그럼. 더 마셔.”

“…….”

“민아야, 너 3억이 생기면 제일 먼저 뭐 하고 싶어?”

“언니, 지금 되게 이상한 거 알아?”

“기분이 좋아서 그래, 큰돈이 생긴 것 같은 그런 기분이야. 3억이 생기면 뭐하고 싶어? 응?”

“글쎄, 우리 강아지한테 강아지 동생 안겨 줘야지. 그것 밖에 안 떠오르네.”

“그래. 강아지든 고양이든- 새도 좋고 생각해 보자.”

은조가 이번에는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래, 돈을 번 거나 마찬가지지. 6억 빚이 3억으로 줄었으니, 그게 그거지 뭐겠어.

권재하, 나쁜 인간.


“……기가 막힌다.”

“그래, 맛있긴 하다. 근데 언니, 갑자기 왜 마음이 변했어? 로또라도 된 것처럼 그러네. 책임감이니 냄새니 뭐 그런 거, 안 되는 이유 백 가지도 넘었잖아. 근데 갑자기? 강아지, 고양이, 새?”

“엄마 정말이야? 응? 강아지 정말이야?”

크게 고개를 끄덕인 은조는 다온이를 향해 웃어 보였다.


“대신 정말 신중하게 생각해보고, 누가 어떤 일을 맡을지 책임도 정할 거야.”

“내가 밥도 주고, 씻겨주고 재워도 줄게!”

“어, 그거 이모가 하는 거잖아. 윤다온, 너한테.”

“이잇!”

또 시작이다.

은조는 아이와 동생이 아옹다옹 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입안에 들어 있는 부드러운 안심을 한참이나 잘근잘근 씹었다.

***

데스크 램프만 켜져 있는 서재.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소리 없이 원을 그리는 동안 재하의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Rrrrrr-


“네.”

[기사 내일 아침에 나갑니다. 말씀하신 대로 합법적인 한도 내에서 아주 적당히 노출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최소한의 내용만 전달한 상대와 재하는 인사도 생략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작은 화면이 어두워지기도 전에 다시 휴대폰이 진동했다.

왕덕진이었다.


“네.”

[이봐요, 권 대표!]

“말씀하십시오.”

[이게 다 무슨 소린가? 왜 가만히 있는 우리 나나를.]

“가만히 있었다고 확신하십니까.”

[집에만 갇힌 지 꽤 되었단 말일세!]

“갇혀 있는 주제에 쓸데없는 짓을 했습니다. 왕 회장님, 제가 지금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아주 쓸쓸하거든요.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기분이랄까.”

[……?]

“무슨 짓을 어떻게 했는지는 직접 들으시고 숨겨둔 휴대폰도 회수하시죠.”

[…….]

“그리고 일을 서두르셔야겠습니다.”

[일이라면…….]

“지난번에 정중하게 말씀드렸더니 전달이 제대로 안 된 모양입니다.”

[권 대표, 내 결혼을 서두르지, 그러니 뉴스 보도는 좀…….]

“아침 뉴스 보시고 날을 잡으시면 알려주십시오.”

[……흐.]

땅이 꺼지게 내쉬는 한숨 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왕 회장님, 결정이 빠르면 빠를수록 잃는 게 적으실 겁니다. 아, 그리고. 이건 제 작은 성의 표시인데 그 결혼에 모든 비용을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전부 최고로 해드리고 싶군요. 플래너, 호텔은 물론이고.”

[…….]

“심지어 초대 손님 명단을 보시면 회장님이 더없이 기뻐하시게 조치하죠.”

[권 대표, 늙은이가 이렇게…….]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이만 끊습니다.]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알아들었어야지.

권재하는 상대방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통화를 끝내버렸다.

정말 그를 화나게 만든 건 사진을 가지고 장난질을 한 왕나나가 아니었다.

집에 안 들어오냐는 메시지에 [응]이라고 답을 보낸 윤은조였다.

***



“윤은조 씨.”

사무실로 낯선 남자가 찾아온 건 점심시간 직전이었다.


“네, 전데요.”

“블랙스톤 파트너스에서 왔습니다. 중요한 물건이라 직접 전해 드려야 해서요.”

회사 로고가 찍힌 서류봉투를 전한 남자는 은조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바로 사무실을 떠났다.

안 그래도 대단하신 ‘카일 알렉시스’의 등장 덕분에 어색해 죽겠는데.

또 뭐지.

잠시 동료들의 눈치를 살피던 은조는 서류봉투를 열었다.

서류가 들어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


“……!”

작고 검은 벨벳 상자였다.

은조는 얼른 손으로 작은 상자를 덮어 버리고 그것과 함께 들어 있던 편지 봉투를 열었다.

[Dear 은조.

아쉽게도 네가 이 메시지를 받았을 때쯤이면 우리 비행기는 이륙을 했을 거야.

공항으로 오기 전 카일과 나는 호텔 근처의 궁궐을 함께 걸었어.

손을 잡고 걸었는데 오랜만에 아주 로맨틱한 느낌을 받아서 행복했어. 오래도록 간직하게 될 기억을 또 하나 만들었지.

은조, 나는 이 작은 선물에 고마움과 아쉬움을 담았어.

정말 맛있는 요리를 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

이 작은 돌멩이가 어떤 식으로든 너에게 위안이 되길 바라.

그 빛이 정말 찬란하거든.

함께 있을 때의 너희 둘처럼 말이야.

추신:

미래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특히 의사들의 말은 믿을 게 못 돼. 그들은 신처럼 선고를 내렸지만, 믿지 않은 나는 이렇게 살아 있지.

재하와 너에게도 기적이 일어날 거야.

사랑을 담아- 제니스.]

……벌써 떠나셨구나.

왠지 마음 한구석으로 스미는 안타까운 감정을 느끼며 작은 상자를 연 은조는 바로 탁 닫아버렸다.


“……!”

그리고 잠시 후, 아무도 저를 주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군더더기 없는 심플한 밴드는 작은 돌멩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디자인이다.

알이 굵은 핑크 다이아몬드는 정신을 쏙 빠지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게 대체 얼마짜릴까.

……6억.

아니지! 3억! 3억은 더 되고도 남겠지.

바보 같은 생각을 하던 은조는 저도 모르게 그것을 손가락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퇴근 전까지 내내 손을 숨기느라 진땀을 뺐다.

***



“너,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 아냐?”

진득한 다크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은 재하가 다 안다는 듯, 어림없다는 듯 씽긋 웃었다.


‘거짓말쟁이…… 사기꾼.’

“왜 그렇게 쳐다봐? 뭘 숨기는 거냐고 묻잖아.”

굳이 또 아이스크림 후식을 챙겨 먹자고 우겨서 자리에는 앉아 있지만.

은조는 고집스럽게 입술을 열지 않았다.


“…….”

“아예 한마디도 안 하시겠다, 그러니까 왜. 휴가까지 잘 다녀와 놓고.”

“…….”

“난 잠도 안 오더라.”

“할 얘기 뭐야, 그거나 빨리해. 나 피곤해.”

“뭘 했다고 피곤해. 진짜 안 먹어?”

“안 먹어.”

“먹여줄까?”

“됐어.”

하…… 스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재하가 은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 내.”

“……응?”

“손.”

“…….”

“어허, 내가 해? 깜찍하게 언제까지 숨기려고.”

급하게 쳐지는 눈꼬리를 숨기지도 못한 은조가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

“아, 난 또 뭐라고.”

예쁘네- 건성으로 한마디 던진 재하는 반지에는 관심도 없는지 손에 입술을 눌렀다.


 


“이게…… 안 빠져.”

“잘됐네.”

“뭐가 잘 돼! 비누칠을 했는데도 안 빠진다고!”

“너, 그딴 거 믿고 이상한 생각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물론 제니스가 네게 준거니까 네 거는 맞지만 그거 함부로 팔수도 없는 물건이라는 거는 알아 둬.”

“권재하!”

“응?”

“도와줘. 빼야 돼…….”

“나탈리는 여자를 좋아해.”

툭 뱉은 그가 다시 스푼을 들어 아이스크림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것을 은조의 입술 앞에 들이밀었다.


“약혼은 가짜였어. 그게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이야. 아- 해.”

“그게 무슨- 읍.”

차가운 덩어리가 입안에 들어왔고 이내 쌉쌀하고 단맛이 깊게 퍼졌다.


“일종의 비즈니스. 그리고…….”

제 입에 아이스크림을 넣은 재하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됐어…… 설명할 필요 없어.”

“중요한 거 아니었어? 그럼, 이리 줘.”

“……?”

“손.”

말릴 틈도 없었다.

짧은 말 한마디로 걸리적거리던 약혼녀를 날려버린 권재하는.

은조의 약지를 제 입안으로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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