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나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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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나쁜 꿈
2023.01.02.
재하는 들고 있던 빈 잔을 근처 아무 데나 내려놓았다.
그리고 눈 아래 펼쳐진 장면을 마음껏 감상하며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어른이 되어 처음 만났던 대학 캠퍼스.
그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는 다갈색 눈동자는 무심하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간혹 사진으로만 보았던 것보다 더욱 예뻤지만, 웃지 않았다.
고단한 삶에서 일찌감치 그녀를 끄집어내었어야 했다고 스스로를 원망도 했지만.
카일 알렉시스로 살아온 권재하의 시간도 그리 녹록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물 더 마실래?”
아니- 침대 위에 엎어져 있는 은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권재하가 너무나 사랑해 마지않는 윤은조의 상태.
의지와 원칙, 이성마저 모두 놓아버리고 마치 저 자신을 버린 것 같은 저 모습.
매달리고, 조르다, 결국 단순하고 본능적인 환희에 온통 저를 던졌다.
자신이 얼마나 뜨거운 인간인지 끝끝내 인정하기 싫은 것처럼 몸부림치면서.
헝클어진 머리카락, 땀에 젖은 하얗고 여린 몸.
분명 초점을 잃고 나른하게 풀렸을 눈동자.
여전히 불규칙하게 몰아쉬는 거친 숨.
전부 완벽하다.
재하는 다시 그녀 곁에 몸을 뉘었다.
“은조야, 나 좀 봐.”
“내버려 둬, ……죽을 것 같아.”
낮은 웃음을 흘린 재하는 동그랗고 가녀린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 남아 있던 냉기가 전해졌는지 그녀가 가늘게 몸을 떤다.
더 괴롭힐 생각은 없지만 그 모양이 또 자극적이다.
뜨거운 숨을 삼킨 재하는 언제나처럼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은조는 흐릿한 시선으로 새카만 창문을 멍하니 응시했다.
……질리면 놓아준다는 말은 정말일까.
대체 언제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질릴까.
권재하가 윤은조라면 진저리가 쳐지게 할 방법이 없을까.
은조는 손가락에 걸려 있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다이아몬드는 방 안에 있는 작은 빛들을 끌어모아 영롱하게 빛났다.
“……제니스가 아팠던 적이 있어?”
“어떻게 알았어? 게다가 예상과 전혀 다른 질문인데.”
“어떤 질문을 예상했는데.”
“아냐, 굳이 내 입으로 들먹이고 싶지 않아.”
“……약혼에 대한 얘기라면 나도 별로야.”
약혼이건 3억이건 6억이건 다 관심 없다.
짐승 같은 스스로가 너무 끔찍해서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약혼식 전에 제니스는 유방암 재발 판정을 받았어.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이라고 했지.”
“…….”
“그래서 약혼을 했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 당시에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전혀 영향이 없었나 싶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 요즘 바보가 된 기분이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조가 갑자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왜? 씻게? 뭐 하러, 다시 누워 얼른.”
“씻고 싶기도 하고 잠은 내 방에서 자고 싶어. 나, 더 있어야 돼?”
“윤은조, 무슨 말이 그래? 피곤하면 자, 여기서.”
희미한 조명 안에서 재하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이 보였지만, 은조는 침대 아래에 있던 나이트가운을 집어 들었다.
“누가 옆에 있는 거 사실 너무 불편해. 혼자 자 버릇한 지 오래돼서 그런지 깊게 잠들지 못해.”
은조는 손가락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내려다보았다.
제니스의 마음은 고맙지만, 이건 권재하랑 똑같아.
사람 혼을 쏙 빼놓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옥죌 뿐이다.
참 대단한 거지만 역시 가질 게 못 된다.
은조는 다시 한번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보려 했지만.
“짜증 나! 왜 이래, 정말!”
“그냥 둬, 없다 생각해.”
“이렇게 눈부시게 제 존재를 뽐내는데 어떻게 그래? 같은 얘기야! 이것도 해보던 게 아니라 너무 불편하다고. 걸리적거려. 나한테는 별로 값어치가 없어.”
“…….”
“갈게.”
잠시 당황한 재하의 얼굴을 바라보던 은조는 바로 등을 돌렸다.
우려와 다르게 그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
그런 날들이 또 얼마간 흘렀다.
남의 일인 양 모르는 척 이성을 놓아버리고 본능에만 충실한 그런.
마치 아무 기억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바보처럼 눈앞의 달콤함만 좇는 윤은조로.
어둠 속을 헤매는 것 같은 답답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손가락에서 걸려 필요 이상 반짝이는 반지가 아무렇지 않아질 무렵 연락을 받았다.
수녀님은 이미 3일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뒤늦게 연락을 받은 은조는 조퇴를 했고 제 집으로 돌아가 침착하게 검은 정장을 찾아 입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슬픔, 죄책감, 부끄러움, 그리움…….
수녀님에게 연락을 자주 하지 못한- 아니, 연락을 안 한 이유는 당연히 동거였다.
더구나 권재하와 침대를 같이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도저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빤빤한 얼굴로 전화를 드리기도 꺼려졌다.
재하가 몇 번 통화를 하는 것을 모르는 척 지켜본 적은 있었다.
수녀님의 믿음과 신뢰를 저버린, 죄를 짓는 기분.
권재하는 끝까지 둘은 성인임을 강조하며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은조는 그러지 못했다.
이후 민아를 만났고, 아이가 생겼다.
미혼모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를 달고 나서는 아예 연락을 끊다시피 했다.
그저 건강하게 회사생활 잘하며 살고 있다는 안부를 아주 가끔 전했을 뿐이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어찌 하늘을 가리겠는가.
은조는 알고 있었다.
수녀님도 모든 상황을 알고 계셨으리라는 것을.
재하와의 동거까지야 워낙 철저하게 숨겼다 하더라도 동생과 아이 문제는 달랐다.
아시면서도 모른 척 별말씀 안 하셨겠지.
“…….”
***
오후 2시.
은조는 어린 시절 저를 보살펴주신 마르타 수녀님의 장례미사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
수수하고 차분한 행사에 참석인원은 많지 않았다.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몇 분, 봉사 해주시는 분들과 신자들이 함께였다.
아마 당신이 원한 일일 것이다.
조용하게 애도하는 사람들 중에는 은조와 서로를 알아보고 인사를 나눌법한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홀로 있기를 결정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니, 어떤 것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자신을 자조하며, 한참이나 그렇게 오가다 들린 사람처럼 서 있었다.
“윤- 은조 씨?”
“……네?”
부르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니 웬 여자가 서 있었다.
키가 아담하고 단발머리를 한 여자는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옅고 부드러운 미소를 만들었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려 보이는 여자의 눈가가 붉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진영이라고 합니다. 아…… 저는 H그룹 회계과 소속입니다. 그…….”
“그래요, 반가워요. 그런데 나를 어떻게 알아요?”
“언니- 아,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저 해바라기 언덕에서 살았어요.”
아…… 고개를 끄덕인 은조는 그녀처럼 옅고 부드러운, 조금은 어색한 미소를 만들었다.
오늘 처음 그 단어를 들었다.
해바라기 언덕.
코끝이 찡하고 눈가가 따끔거렸지만 예상대로 눈물 따위는 흐르지 않았다.
“이거, 수녀님이 언니한테 전해주라고 하셨어요.”
“……이게 뭐예요.”
“그 집이요. 비밀번호랑- 언니한테 수녀님이…… 쓰신 편지로 알고 있어요.”
“……그 집?”
“언니 아파트요, 수녀님께 빌려주신 집이요. 언니 덕분에 여러 명이 자립하기 전에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냈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얼굴이…… 저 언니 사진 본 적 있거든요. 수녀님이 보여주셨어요. 그대로세요. 십대 시절 사진이었는데. 그래서 알아봤어요.”
“아…….”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집!
권재하의 아파트를 잊고 있었다!
“제가 꽤 오랫동안 관리를 했어요. 이이들도 함부로 쓰지 않았고요. 처음 같지는 않지만 아직도 깨끗해요. 큰방은 아예 아무도 안 썼고요. 짐도 있고 해서요.”
“그 집…… 아예 수녀님 드린 건데.”
“네, 그런데 작년 초에 어느 독지가께서 해바라기 건물 옆에 새 빌라를 크게 지어주셨거든요. 그래서 아마…… 아무튼 이건 수녀님이 언제든 언니한테 다시 돌려드린다고. 어서 받으세요.”
“…….”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다른 친구들 감사도 대신 전하고요.”
어린 친구의 눈가가 다시 붉어지는 것을 본 은조는 급하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얼어붙어 있던 심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
권재하가 마르타 수녀님이 소식을 접한 것은 임원 회의가 끝나고 나서였다.
“가보셔야죠.”
“응, 혹시 은조 갔는지 좀 알아봐.”
“네.”
집무실에 준비 되어 있던 검은색 슈트로 갈아입은 재하는 지난 밤 꾼 꿈을 떠올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뉴욕의 아파트에 혼자 있었다.
창밖으로 비가 쏟아지고 번개가 치는데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은조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영문인지 열리지 않는 방문을, 부술 것처럼 주먹으로 치고 발길질을 하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다 깨어났다.
그리고 마치 꿈의 연장선처럼.
주인이 새벽같이 출근해버려 텅 비어버린 방에 혼자 한참을 서 있었다.
“꿈자리가 사납더니.”
하- 이런 말을 내가 하게 될 줄이야.
사람이 태어나는 것, 그리고 죽는 것.
그것만큼 인간이 제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게 또 있을까.
꿈자리 운운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했다.
성당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메일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
여러 개의 발신자 이름 중 ‘브랜든 쿠퍼’를 발견한 재하는 그것을 제일 먼저 열었다.
하지만 두 번을 되읽어도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세 번 읽고 나서야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했지만.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
뉴욕의 시간 따위를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전화기를 쥔 재하의 손이 떨렸다.
신호가 미처 두 번도 떨어지기 전에 전화를 받은 상대방은 조용했다.
마치 예견한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
[이봐, 브랜든…… 너, 이게 무슨 개 소리야.]
[카일, 안타깝지만 전부 사실이야.]
어떤 죽음에는.
[최선우야! 의사 이름이 최선우라고! 로스펠트 병원! 응급실!]
아주 허망한 어떤 죽음에는.
[카일, 내가 직접 정확하게 확인했어. 미안하지만 네가 본, 그 기록들은 전부 사실이야.]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그것도 권재하가 감히 가져다 붙일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아이를 잃었다고?]
특히 그것이 제 아이의 죽음이라면 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