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그날, 그 시간 속에서 우리.
(6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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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그날, 그 시간 속에서 우리.
2023.01.05.
[오빠! 재하 오빠!! 잘 지냈어? 너무 좋다~ 오빠가 전화를 주고…… 오빠?]
애교 섞인 콧소리가 들려오자 재하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답답해진 넥타이에 검지를 걸어 세게 잡아당기고 이를 악물었다.
“닥치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너, 내 약혼식에 왔었어. 맞지?”
나나는 당황했다. 딱딱 끊어 하는 말이 이제껏 들어본 적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그건 갑자기 왜.]
“대답이라고 했어. 질문이 아니라. 똑바로 대답이나 해.”
감정을 한껏 억누른, 꽉 다물린 잇새로 밀려나온 음성은 분명 끓어오르는 분노를 담고 있었다.
[갔었잖아…… 오빠 무섭게 왜 그러는데? 응?]
“은조를 데리고, 맞아?”
[……!]
“뒈지고 싶지 않으면 대답 똑바로 해,”
[무슨 그런…… 만났어! 그래, 호텔에 와 있었는데 같이 올라가자고 해서 내가…….]
“시X, X같은 소리를 잘도 하네. 넌 혼자였어. 질문이라고 하니까 모르고 묻는 줄 알지.”
[……!]
“왕나나, 잘 들어. 넌 앞으로 세상에 없는 거야. 알아들어? 숨만 간신히 쉬고 살아야 할 거야. 더 이상 말 안 한다.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 하직하고 싶지 않으면- 아, 아니지. 누구든 더 이상 내 신경 건드리면- X같은 DL이고 나발이고 싹 다 밀어버릴 테니까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재하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휴대폰을 내팽개쳤다.
이후 얼마간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과 거친 욕설, 누군가를 향한 저주의 말들을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그리고 또 한동안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동물의 흐느낌 같은 소리를 내기도했다.
운전 중인 강 비서는 내내 묵묵히 운전에만 집중했다. 은조와 통화를 시도했지만 전화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
방법이 없었다. 작정하고 마 실장까지 따돌린 그녀다.
“멀었어?”
정신을 가다듬었는지 바닥을 뒹굴던 휴대폰을 찾아든 재하가 물었다.
“다 와갑니다, 6분 후 도착 입니다.”
룸미러에 비추는 권재하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시뻘겋게 핏발이 선 눈을 하고 연신 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상사의 낮은 중얼거림에 집중하던 강 비서의 눈에 성당의 입구가 들어왔다.
.
.
성당 안에서는 마지막 예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찌감치 고별의 인사를 마친 이진영은 은조가 그랬듯이 멀찍이서 사람들의 작별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더없이 엄숙하고 진지한 순간, 모두의 고개가 한꺼번에 그녀를 향해 돌아왔다.
“……!”
진영이 서 있던 바로 옆, 출입문이 벌컥 열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검은 양복의 남자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거친 숨을 다스리느라 애를 쓰는 남자는- 분명-!
“혹시 카일 알렉시스? 권재하 씨 맞죠?”
“나를 알아요?”
관심 없다는 듯 진영을 스친 재하의 두 눈이 빠르게 성당을 훑는다.
없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이마를 짚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재하는 다시 그녀의 모습을 찾아보았지만 역시 헛일이었다.
혹시나 싶어 저를 알아본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오셨다 가셨어요. 은조 언니, 맞죠. 찾으시는 분.”
윤은조의 행방을 듣자마자 등을 돌린 권재하에게 이진영이 소리쳤다.
“감사해요! 모두가 감사하고 있어요! 행운을 빌어요!”
.
.
자동차의 운전석으로 향하는 재하가 손으로 조수석을 가리켰다.
“내가 운전할게, 너 너무 느려. 속 터지게.”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강 비서의 태도와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잠시 미간을 찌푸렸던 재하는 이내 뒷좌석으로 올라탔다.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뜨겁고 날카로운 유리파편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모든 숨에 섞여 있다.
온몸이 찢기고 갈라지다 못해 생 살점이 뼈에서 저며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숨을 쉬는 것 자체가 이제껏 경험해본 적 없는 아픔으로 그를 휘감았다.
생수병을 집으려 손을 뻗었지만 제 몸이 아닌 것처럼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속도 좀, 더 내.”
재하는 타들어 가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
***
은조는 아파트 입구에서 한참이나 망설였다.
원래도 좋은 아파트였지만 단지 안으로 새롭게 꾸며진 산책로가 아주 훌륭해보였다.
“…….”
아니, 새롭고 훌륭해 보여야 하는데.
그녀의 눈에는 이상하리만큼 6년 전 그 모습 그대로다.
오로지 민아와 아이만 생각하면서.
아무렇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돌아섰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말아 쥔 주먹 안으로 차가운 땀이 축축하게 들어찼다.
굳이 올라갈 필요가 있을까.
그는 떠나기 전 집을 주겠다고 말했고 은조는 당연히 거절했다.
[그럼 누굴 줘버리든가. 아무튼 네가 알아서 해.]
재하는 아주 담담했고, 그래서 은조는 더욱 참담했다.
마치 어떤 대가를 치르고, 받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
.
집은 썰렁할 정도로 깨끗했다.
워낙 고급 제품인 권재하의 가구들은 약간 낡았지만 원래의 모습 유지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지도 않고 한참이나 거실 중앙에 서 있던 은조는 내내 쥐고 있던 편지를 열었다.
하지만 어느새 뿌옇게 변한 시야 때문에 글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죄송해요, 수녀님.”
편지를 핸드백에 집어넣은 그녀는 양손으로 눈물을 문지르고 큰 방 앞으로 다가갔다.
“…….”
젖은 얼굴로 헛웃음이 터트릴 것 같았다.
두 사람이 함께 사용했던 방이, 모든 게, 그대로였다.
마치 그가 떠났던 그날, 그 시간 속으로 다시 들어온 것 같았다.
쩍쩍 갈라진 심장이 차가운 피를 마구 토해내기 시작했다. 추웠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은 이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제 몸을 꽉 끌어안은 은조는 침대 위에 있는 빛바랜 종이 상자를 발견했다.
그건 그녀의 것이었다.
“……왜.”
전부 버리거나 이사 갈 때 가져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윤은조.]
상자의 겉면에 붙어 있는 작은 메모지에 분명 그녀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자의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던 은조는 바로 얼어붙어 버렸다.
전공 서적 몇 권과 노트들, 낡은 티셔츠 두어 장과 청바지 하나.
그리고 그것들과 상자 사이에 끼어 있는…….
산모 수첩과 초음파 사진.
“내가…… 내가 분명히! 다 버렸어!”
은조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누군가를 향해 화가 난 듯 외쳤다.
어느새 맑은 눈물이 하염없이 창백한 뺨을 적시고 또 적시는데.
아무런 소리도 없다.
“…….”
제 통곡 소리를 듣는 것만큼 끔찍한 것이 없다는 것을 뉴욕에서 알았다.
입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제일 가까이서, 제일 크게 듣는 것은 바로 본인이다.
……왜? 왜 울어? 뭐 때문에!
마음은 그랬지만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
.
급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재하는 이를 갈았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이곳은 정말 최악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둘이 처음 서로를 안았던 곳.
홀로 남겨진 그녀를 버려두고 권재하가 떠나버렸던 곳.
이별의 선물로, 치기 어린 심정으로 그녀에게 남겨주고 떠났던 아파트.
우리의…… 아이가 생겼던 곳이다.
.
.
“……은조야.”
재하는 바닥에 산산조각 나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지금 윤은조가 잘게 찢어버리려고 기를 쓰는 회색빛 사진이 무엇인지도 단번에 알았다.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그를 힐끗 보았을 뿐 놀라지도 않았다.
이미 작아진 조각을 더욱 잘게 조각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재하는 그저 손만 뻗었다.
“은조야, 그만해. 제발…….”
“왜…… 왜 그래야 하는데?”
이제야 겨우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 본다.
새하얗게 질린 뺨을 온통 적신 눈물이 턱 아래에 매달렸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구겨지지도 않은 얼굴, 들리지 않는 흐느낌에 오히려 재하의 심장이 조각났다.
“이게 뭔지…… 아는구나. 하긴, 어떻게 숨기겠어. 그것도 역시 바보 같은 생각이지. 안 그래?”
“진정해…… 내가…… 다가가도 돼?”
“진정, 하라고? 나, 평생 진정하면서 살았어. 작은 고통이나 아픔 따위 무시하고…… 흥분하지 않으면서 소란스럽지 않게 쥐죽은 듯 그렇게.”
“……그래, 알아.”
“딱 한 번…… 욕심을 부렸던 대가가 참 지독해. 끝까지…… 이 꼴을 좀 봐.”
“내가, 내가 전부 잘못했어. 내가 바보 같았어.”
“너는 다시 만났던 그 순간부터 내내 눈으로 말하고 있었어. 증오한다고.”
“아냐, 그렇지 않아!”
“네게 진 감정적 빚을 갚으라고.”
“그거 아닌 거 알잖아. 은조야, 제발…….”
“권재하의 대단한 자존심. 그 손상된 자존심에 대해…… 몸으로…… 마음으로 용서를 빌어보라고. 아냐?”
“은조야…….”
“애초에 6억은 의미가 없다는 거, 알아. 아마…… 알고 있었던 거 같아. 그냥! 거기 있어!”
다가서려는 재하가 단 한 걸음을 떼어 놓기 무섭게 은조가 소리를 질렀다.
“그래. 알았어.”
“가까이 오지 마. 끔찍해…… 싫어.”
“…….”
“너를 보고 있으면…… 내가, 내 자신이 너무 싫고 끔찍해…… 너를 안았던 나를…… 죽이고도 싶어.”
흣- 옅은 웃음을 터트린 그녀 때문에 재하는 더욱 파랗게 질렸다.
“차라리…… 울어. 나를 때려.”
“걱정 마. 죽지 않아. 내가 왜? 이제 와서?”
“…….”
“케케묵고 쓸모없는 감정놀음에 내가 필요했잖아. 괜찮아…… 그럴 만한 자격 충분했어, 아직도 고마워. 민아 일, 도와준 거.”
“…….”
“정말이야. 그런데 이제…… 끝낼 수 있겠다. 좋은 생각이 방금 떠올랐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선 은조가 휘청거렸지만 바로 손을 들어 다가오려는 재하를 말렸다.
그리고 손등으로 턱 아래 맺힌 눈물방울을 쓱 훔쳤다.
“……아니, 이렇게는 아니야. 제발 네게 다가가게 해줘.”
“이 집…… 네가 나한테 준 이 집. 너한테 줄게. 버린 그 반지보다도 훨씬 비싸잖아! 이 정도 아파트면 6억- 아니, 3억은 우습지.”
“…….”
“네가 말했잖아, 갖기 싫으면 누구 줘버리라고. 되게 웃긴다, 그치? 그게 너야!”
작게 웃음을 터트린 은조를 바라보는 재하는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방금, 그녀가.
윤은조가.
권재하를 버렸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