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 “윤은조 씨, 반가워요.” (64/100)


64. “윤은조 씨, 반가워요.”
2023.01.09.


1673248560943.jpg

 

16732485609437.jpg

[브랜든, 이건 그를 위한 거야! 내가 알고 있어야 뭐라도 도와줄 수 있어!]

16732485609442.jpg

[에디, 안타깝지만 내가 알고 있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거야. 말해줄 수 없어. 그리고 지금 여긴 새벽 4시야.]

16732485609437.jpg

[너도 이미 알고 있는 걸 내가 알면 안 돼? 난 너처럼 개인적으로는 그의 친구고 공적으로는 지척에서 보좌하고 있어! 카일 알렉시스의 일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어도 개인적인 일이라고 볼 수 없다고! 블랙스톤 파트너스와 관계를 맺고 있고 투자를 한 모든 회사와 직원들, 그리고 개인적인 투자자들, 또는 직접적으로 관련은 없지만…….]

16732485609442.jpg

[아아, 에디 집어치워. 너는 왜 점점 카일을 닮아가지? 더럽게 집요하게 굴고 있잖아, 지금! 하- 메일을 보내줄게. 개인적인 의견이 전혀 첨가되어 있지 않은 공식적인 내용으로만. 됐지? 이제 제발 귀찮게 하지 마. 그런데, 카일은 어쩌고 있어? 너도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있다며?]

16732485609437.jpg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쁘다는 것만 알아 둬. 메일부터 당장 보내줘.]

강 비서의 입장에서는 최선이었다.

당연히 재하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얼마나 안 좋은지 알고는 있어야 최소한의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서로서가 아니라,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친구로서, 동생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통화가 끝나고 몇 분 후, 브랜든의 메일을 읽어 본 강 비서는 다소 회의적인 심정이 되었다.

천하의 권재하라고 해도 이런 실수를 쉽게 만회할 방법이 있을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와줄 방법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16732485609437.jpg

“…….”

그동안 보고 들었던 작은 조각들을 머릿속에서 이어붙이니 얼추 그림이 완성되었다.

하…… 남자들의 자존심이란.

이해가 가면서도 또 이해가 가지 않는다.

권재하는 놀라울 정도로 분석적이고 냉정하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필요한 것과 가차 없이 쳐내버려야 할 것을 정확하게 구분 짓는다.

그런데 그런 걸 사랑에도 적용했단 말인가…….

아니.

그냥 어찌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되었었겠지.

가차 없이 쳐내버려야 하는 게, 제 자존심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깊게 사랑에 빠져 있었던 거다.

16732485609437.jpg

“쉽지 않겠어.”

뭐, 그를 변하게 할 능력은 없지만.

술 대신 다른 것을 좀 먹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대표가 봐야 할 서류를 챙긴 강 비서는 사무실을 나섰다.

***


16732485609478.jpg

“아빠, 그게 말이 돼? 2주 뒤라니? 말도 안 돼!! 장난해??”

믿기지가 않는지 나나는 실없는 웃음까지 흘렸다.

16732485609442.jpg

“네 행실은 말이 되고? 그냥 입 꾹 다물고 시키는 대로 해. 너 뉴스 나간 거 뒤처리하느라고 내가 얼마나 개망신을 당했는지 알기나 해? 회사가 본 손해는 두 번 말하고 싶지도 않아! 당신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서둘러서 준비하고.”

일방적인 통보를 마친 왕덕진은 자리를 떴고 이성자는 제 딸을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16732485609478.jpg

“엄마, 어떻게 좀 해봐. 나 이 결혼 못 해. 그쪽에서도…… 차상윤도 못 한다고 할걸, 정말이야! 지가 직접 싫다고 했어! 세상에 여자가 나 하나여도 못한다고 했단 말이야!”

16732485609442.jpg

“아니, 이미 그쪽하고 얘기 끝냈어.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는 눈치더라. 지저분하게 돌던 얘기를 결혼이라는 그럴듯한 단어로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잖니. 나도 여러 가지로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 이게 최선이야. 게다가 네 아버지가 이미 호텔이니 뭐니 네 마음에 들고도 남을 정도로 준비를 했더구나. 그냥 해, 이 결혼.”

이제 딸을 포기라도 한 것 같은 어미의 태도에 나나는 발끈했다.

16732485609478.jpg

“그냥? 엄마, 결혼을 그냥 하라고? 내가? 구두를 사는 것도 아닌데 그냥 이라니? 무슨 말이 그래? 남도 아니고 내 엄마가.”

16732485609442.jpg

“남이 아니라서 이 정도로 좋게 말하는 거 너도 알잖아. 뉴스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16732485609478.jpg

“…….”

이미 세상에는 파다하게 소문이 퍼졌다. 그것도 아주 이상하게.

DL의 공주 왕나나가 차상윤이라는 남자와 열애 중이라고.

아슬아슬하게 최악의 스토리는 비껴갔지만 약혼자가 있는 남자를 빼앗을 정도로 사랑에 빠져버린 여자가 된 것이다.

울상이 된 나나에게 이성자가 숍 예약시간을 알려줬다.

16732485609442.jpg

“너 그렇게 좋아하는 아를 마네로 드레스 입어. 네 아버지도 말은 저렇게 하시지만 결혼 준비를 이렇게 꼼꼼하게 하실 수가 없다. 내가 할 일이 아예 없어. 자, 이건 플래너 전화번호. 잡기도 힘든 톱클래스를 잡아 오셨더구나. 나 원 참.”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는 태도와 표정의 어미 때문에 왕나나는 더욱 울상이 되었다.

권재하가 뉴욕에서의 일을 다 알고 있다.

만약 이 결혼에도 그가 개입했다면 그냥 단순한 결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16732485609478.jpg

“엄마…… 나 어떡해?”

 

***


16732485626885.jpg

“그래서 시킨 건 제대로 처리했고?”

16732485609437.jpg

“네. 시키신 것 처리했는지 궁금하신 분이 이러고 계십니까. 이틀쨉니다.”

16732485626885.jpg

“시끄러워.”

소파에 누워 있는 재하는 큼직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불을 켜고 커튼을 연 강 비서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양주병이 몇 개인지, 찌그러진 맥주 캔이 몇 개인지 셀 수도 없었다.

16732485609437.jpg

“그러니까, 밥 대신 술로 사셨군요. 뭐 술도 반은 물이니까, 살아는 계시고요.”

16732485626885.jpg

“…….”

16732485609437.jpg

“급한 결재가 몇 건 있는데 앉으실 수 있겠어요?”

16732485626885.jpg

“내가 X신이 됐냐? 앉을 수 있냐니.”

몸을 일으켜 앉은 재하가 강 비서를 쏘아본다.

16732485609437.jpg

“그런 것 같은데요…… 겉으로 봐서는, 좋게 표현하면 음…… 매우 내추럴, 하십니다. 더티, 하고요.”

트레이닝 복 차림의 재하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고 수염이 자란 턱을 문질렀다.

16732485626885.jpg

“더티했지. 졸렬했고. X신 맞아. 시X.”

16732485609437.jpg

“예? 정말 왜 이러십니까?”

16732485626885.jpg

“차상윤은 뭐래?”

16732485609437.jpg

“뭐라고 했을까요? 뭐라고 입이라도 뗄 수 있게 선택지를 주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일절 아무 말 없습니다. 충분히 알아들은 거죠.”

16732485626885.jpg

“그래도 헛생각하지 못하게 끝까지 잘 지켜봐.”

꽃거지- 아니, 얼짱 거지가 된 줄 알았더니…….

역시 아니었다.

16732485609437.jpg

“멀쩡하신 것 같으니까 서류부터 좀 보시죠. TF-팀에서 아주 날립니다. 박 팀장이 대표님이 연락 안 된 이틀 동안 날린 돈이 얼만 줄 아냐면서 어찌나 저를 잡아먹을 것처럼 구는지- 아휴…… 저, 머리 꽤나 아팠습니다.”

16732485626885.jpg

“제대로 잘하고 있네. 나 없어도 되겠어.”

16732485609437.jpg

“네? 없어도 되겠다뇨?”

별생각 없이 던진 말에 강 비서가 화들짝 놀란다.

그 반응에 재하는 오히려 눈썹 끝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래…… 미국도 아니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두 회사.

16732485626885.jpg

“줘. 우선 급한 것만 보고 나머지는 내일 회사에서 볼게.”

16732485609437.jpg

“정말이십니까?”

16732485626885.jpg

“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이렇게 들락거리는데, 더 이러고 있는 게 의미가 있겠어?”

권재하는 텅 빈 결재란에 시원하게 제 이름을 갈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강 비서의 입꼬리가 높게 올라갔다.

16732485626885.jpg

“내일부터라고 했다. 자, 가 봐. 혼자 있고 싶어.”

권재하에게 후회와 절망은 이틀이면 충분하다.

아니, 과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게 윤은조와 상관 있는 것이라면 넋을 놓고 있을 게 아니고 빨리 움직이는 게 맞다.

되돌리기 위해.

다시 찾기 위해.

그것도 아니면…… 모르겠다. 무슨 짓이라도 불사할 각오가 되었다.

혼자 남은 재하는 다시 누웠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은조야…… 나도 내가 끔찍했어.

너를 미워하고, 잊지 못하고,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절망하고.

또 절망하던 내가…… 끔찍했다고.

16732485660839.jpg

 

***

은조는 이제까지의 어떤 시간보다 담담하고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6732485660844.jpg

“막상 하고 싶은 걸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어. 결국 가지고 싶은 거? 그래서 예쁜 정장 한 벌, 구두 하나…… 그 정도? 언니 되게 후지지?”

아니~~~ 운전대를 잡은 민아가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1673248566085.jpg

“절대 아냐! 이제야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안심이 돼. 다들 별거 아닌 거, 조금은 후진 거, 아니면…… 이상한 거?? 크크- 그런 거에서 행복을 느끼고 찾고 그래. 뭐 대단한 거 있는 줄 아셨어?”

16732485660844.jpg

“그래…… 네 말이 맞아.”

1673248566085.jpg

“참, 이상한 거라니까 생각났는데- 아, 웃겨. 그 아띠제리 커피 회사 있지. DL? 아니 그 회사는 딸 때문에 망신 톡톡히 당했잖아. 불륜을 저지르는 모습을 세상에 대놓고 방송을 했으니, 개망신이 딱 그런 거지. 왜 임자 있는 남자를 사랑해서는 쯔쯔쯔- 우리 재욱 오빠가 모델까지 해줘서 브랜드 이미지 참 깔끔했는데 말이야.”

왕나나 얘기라는 것을 알았지만 은조는 내색하지 않았다.

16732485660844.jpg

“우리 재욱 오빠?”

1673248566085.jpg

“한재욱 몰라? 모델 겸 배우, 볼륨 레이블- 한재욱을? 그래- 언니야 뭐.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이거지? 칫.”

16732485660844.jpg

“뭐야, 그 반응은?”

1673248566085.jpg

“이름에 ‘재’ 자가 들어가면 다 생겼나? 우리 오빠도 그럼 재우라고 지었어야 하는데 엄마가 영 작명에 실패네.”

16732485660844.jpg

“최재우? 아무튼 웃겨- 이민아.”

1673248566085.jpg

“맞지 뭐! 잘생겼잖아! 키도 적당하고 점잖고 서글서글하니.”

16732485660844.jpg

“어련하시겠어요!”

그날, 민아의 꼬임에 넘어간 은조는 정장에 구두, 예쁜 원피스까지 샀다.

***

며칠째 JS PHARM.에는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성춘 회장이 갑자기 자리에서 물러났고 신임 대표가 조용히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경영권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던 초반 약속과 다른 최대주주의 행보에 회사 전체가 크게 술렁였다.

그 신임 대표가 취임식 대신 부서별로 간단한 회의 겸 인사를 나누기로 했다는 소식에 은조는 입술을 깨물었다.

권재하.

또 무슨 꿍꿍이야.

제발 날 좀 내버려 둬!

.
.

하지만 그날은 결국 오고야 말았다.

디자인 팀과 같은 층을 사용하는 연구개발팀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16732485626885.jpg

“안녕하십니까.”

회의실 문이 열리고 귀에 익은 그 목소리가 들린 순간 은조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베이지색 터틀넥 니트에 청바지, 짙은 브라운 컬러의 캐주얼한 재킷을 걸친 그는 다른 날과 같으면서도 묘하게.

……달라 보였다.

직원들과 차례대로 악수를 나누더니,

결국 은조에게까지 다가온 그가 손을 내밀었다.

16732485626885.jpg

“윤은조 씨, 반가워요.”

잘 부탁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