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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앞집 남자 (65/100)


65. 앞집 남자
2023.01.12.



 


“네. 반갑습니다.”

은조의 인사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극히 짧은 순간이나마 마주했던 눈길이 저를 외면하자, 재하는 회사 대표로서 말을 이었다.


“다들 앉으시죠, 얼굴이나 보고 인사하자는 뜻으로 만든 자립니다. 아, 다과는 좀 즐기셨나요.”

“네! 아주 훌륭합니다, 감사합니다!”

은조는 대표 권재하를 향해 밝은 목소리를 낸 직원을 힐끗 쳐다보았다.

뭐가 훌륭하다는 거지- 그래봤자 커피나 주스 쿠키와 마카롱- 과일 조각이 전부인데.

하지만 관심이 없는 건 그녀뿐.

다들 주스며 쿠키, 작고 예쁜 종이접시에 들어 있는 과일을 즐기고 있었다.


“…….”

일찌감치 회의실 한쪽에 준비된 세련되고 깔끔한 케이터링(Catering) 테이블이 신선하기는 할 것이다.

게다가 새로 부임한 대표의 저 반반한 외모와 지적인 분위기는 이성춘 전 회장과 몹시 비교되고도 남았다.


“윤은조, 이거 무슨 상황이야?”

장 팀장은 다른 직원들과 악수를 나누는 권재하를 힐끗거리며 포도알 하나를 입에 넣었다.


“……뭐가요?”

시치미를 떼는 은조를 바라보는 장 팀장이 입술을 뾰족하게 모았다.

그녀는 입사 초기 은조의 사수를 시작으로 내내 함께한 상사이자 가장 가까운 동료다.

‘윤은조 씨’에서 ‘씨’를 빼고 부를 때는 진심인 거다.

매우 개인적이고 솔직하길 원한다는 뜻으로.


“몰라서 묻냐? 지금 둘이 무슨 역할놀이라도 하니? 징그럽게?”

“그런 거 아니에요, 팀장님.”

“그런 거 아닌데 왜 둘 다 소 닭 보듯 그런 눈으로 이상하게 굴어? 연구개발팀 애들이야 본 게 없지만 우리 팀 애들은 다 이상하다 생각할걸.”

“그냥, 모른 척 해주세요.”

“그래, 뭐 궁금해 죽겠지만. 조만간 또 ‘은조야’ 이러면서 사무실 문을 벌컥 여시리라 기대할게. 그게 낫다, 좀 인간적이기도 하고. 무슨 가면 쓴 거 같잖아, 지금은. 내용은 회의라기보다는 작은 파티에 가까운데. 그런데 지난번보다 되게 수척해 보이시네. 설마-.”

장 팀장이 멈칫하더니 커진 눈으로 은조를 바라본다.


“……?”

“우리 회사에 뭐 문제 있는 거 아니지?”

“팀장님이 모르시는 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브리핑 자료는 빠짐없이 챙기셨어요?”

“얘 말 돌리네. 알았어, 여기까지.”

“…….”

직원들 중에는 신임 대표를 붙들고 긴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도 있었다.

특히 개발팀에 소속된 남자 직원들 중 일부는 미리 잘 보여 두려는 것인지 친분이라도 쌓으려는 것인지 꽤 적극적으로 굴었다.

겉으로는 사람 좋은, 더 이상 멋질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신임 대표.

은조는 가끔 차가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하지만 재하의 시선이 돌아오면 바로 고개를 돌려 외면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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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개발팀 팀장의 브리핑이 끝나고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10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재하는 따로 은조에게 말을 건다든가 이상한 눈빛을 보내지 않았다.

가끔은 정말 모르는 사람처럼, 담백한 시선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회사 대표로서 다른 직원들에게 보내는 그것과 다를 것 없는, 의미 없는 그런 눈빛.

그래, 뭐. 개인적으로 얽히는 게 아니라면야.

각자 자기 자리에서 제 할 일만 하면 되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결국 이직을 염두에 두고 기본적인 준비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실 디자이너는 이직률이 높은 직업 중 하나다.

첫 직장인 JS에서 꾸준히 5년 일했으면 충분해도 너무 충분하다.

이제까지 성실하게 쌓아온 커리어 정도면 더 조건이 좋은 곳으로 이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추전서도 써주겠다고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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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팀장의 브리핑을 들은 권재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저는 JS 디자인팀을 무한 신뢰합니다. 이제까지의 성과를 보면 소비자가 원하는 가치를 충분히 담아내셨고, 최근 새롭게 출시된 제품의 디자인이나 기타 통계 자료를 보았을 때 전적으로 믿고 신뢰해도 되겠다는 결론 내렸습니다. 최고 경영진의 의사결정이 디자인팀의 작업 영역까지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개인적으로 하시고 싶은 이야기나 제안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당장도 좋고, 추후에도 상관없습니다.”

“대표님! 개인적인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역시나 초반부터 넘치게 굴던 개발팀 직원이 손을 들고 나섰지만 권재하는 회사 대표다운 대답을 내놓았다.


“안타깝지만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죠. 또 다른 회의가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냉정한 결론이지만 그 뒤를 따르는 환하고 멋진 미소.

시작부터 끝까지, 이성춘 회장이 주최하던 회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모양새다.


“……무슨 팬 미팅도 아니고.”

“네? 선배님, 그런데요…….”

최장미의 눈이 반짝인다. 분명 장 팀장이 한 질문과 별반 다를 것 없을 것이다.

은조는 급하게 테이블 위에 흩어져 있던 종이들을 모았다.


“시안 다 작성했어? 지난번 목업(mockup) 작업은 너무 초보 같았어. 알고 있지?”

“……네, 수정 거의 끝나갑니다. 오늘 안으로 보여드릴게요.”

“그래. 우리 먼저 나가자.”

개발팀 남자들에게 붙들린 재하는 그들이 늘어놓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직원들의 묵례에는 그저 의례적인, 가벼운 끄덕임을 보여준다.

은조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종종걸음으로 숨 막히는 공간에서 벗어나던 은조는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

처음 한 번이겠지.

디자인팀을 무한 신뢰 한다며. 흥.

반지가 걸린 손가락을 비틀던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

금요일.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일주일을 보낸 은조는 일찌감치 집으로 들어왔다.

현관문을 열기 무섭게 웃음소리가 들렸고 식욕을 자극하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엄마!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득달같이 달려온 다온이의 손에는 만두가 들려 있었다.


“와, 할머니 만두네! 뭐 하러 힘들게 이걸 만드셨어요?”

“그럼 그거나 먹자고?”

앞집, 602호의 주인 최영자 할머니는 은조의 손에 들려 있는 케이크 상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생크림 케이크 좋아하시잖아요. 후식으로 먹으려고 사 왔죠.”

“축하할 일도 아닌데, 뭘. 그거 보니까 괜히 또 기분이 울적해지네.”

“또 이러신다. 이미 눈물 바람 한번 하셨어. 아무튼 할머니는 땡잡았다고 웃으시다, 우시다. 아이고, 내 허리가 나가겠어요. 그만 만듭시다, 누가 다 먹어 이걸.”

민아가 손으로 빚고 있던 만두를 내려놓으며 다온이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언니는 옷 갈아입고 씻고 올래? 만두 쪄줄게. 되게 맛있어.”

“방금 전에는 누가 다 먹냐더니. 두고두고 생각날 때 꺼내 먹으면 되지. 냉동실에 두면 봄까지 먹어.”

“김장이에요, 하하- 그만하셔요.”

은조는 민아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침실로 향했다.

일가친척이 없는 은조네 식구에게 할머니는 꽤 오랜 시간 다정한 이웃이었다.

마침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 소중한 인연으로 맺어지고, 서로에게 큰 의지가 되었는데.

이제 헤어져야 한다니…… 섭섭하고 쓸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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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은 우리가 해드려야 하는데…….”

은조는 할머니가 만들어서 가져온 밑반찬들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얼마 안 되잖아. 낼모레 이사 가는데 감자니 뭐니 사둔 게 많아서 그냥 만들었어.”

“이 동네 조용하고 혼자 살기에 딱 좋다고 하시더니…….”

“아이고, 혼자 사는 데 딱히 좋을 게 또 뭐 있겠어. 좀 늦은 감이 있지만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아휴- 내가 저 엘리베이터 없는 집으로 갈 생각을 하니 아주 지금부터 마음이 편해. 아직 살아있는 친구들도 꽤 있고. 막상 가겠다고 결심하니까 맘이 좋아.”

“저희는 아쉬워요.”

“아쉽기는! 또 보면 되지. 다온이네도 누가 집 사겠다면 팔아! 집값이 오른 것은 알고 있었는데 나는 너무 운이 좋았어! 참, 우리 다온이 용돈 좀 줘야겠다.”

“아녜요! 그러지 마세요!”

굳이 아이에게 큰 지폐를 쥐여 주신 할머니는 또 눈가를 문지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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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섭섭해할 일만도 아냐. 얘기 들어 보니까 이유가 딱히 없었을 뿐이지 친구분들 계시는 고향이 좋지. 좋은 단독주택 한 채 사고, 앞으로 펑펑 쓰고 살겠다고 그러시더라.”

“……그래.”

“우리 집도 누가 후하게 쳐주면 더 큰 데로 이사 가자.”

“나는 여기가 좋은데.”

“할머니처럼 누가 시세에 세 배 준대도 거절할 거야?”

“세 배? 누가? 이런 집을 왜?”

“여태 뭐 들었어? 할머니 되게 부자 돼서 내려가시는 거야! 좋은 일에 그만 얼굴 좀 펴!”

“…….”

 

***

일주일 후, 토요일 오전.

아침을 먹은 이후 집 안이 유달리 조용하다고 생각한 은조가 거실로 나왔다.

민아는 볼 일이 있다고 집을 비운 상태였는데 다온이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TV는 켜져 있고, 그 앞에 먹다 만 과자 봉지가 열려 있었다.


“다온아! 아가, 어디 있어?”

제방에도, 욕실에도 없다!

불안해진 은조는 재빨리 베란다 창문을 열고 아파트 놀이터를 내려다보았지만 아이의 모습은 없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큰 숨을 내쉰 은조는 침착하게 다시 한번 놀이터를 끝에서 끝까지 찬찬히 훑었다.

없다!

파자마 차림의 은조는 소파 위에 있던 카디건을 낚아채 팔을 꿰어 넣으면서 현관문을 열었다.

심호흡을 하며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것을 기다리던 그녀의 눈에 ‘또’ 그것이 들어왔다.

앞집 현관 앞에 놓여 있는 투명하고 큰 비닐봉지.

사흘 전 처음 본 날 이후 매일 채워지더니 결국 그득하게 술병이 들어차 있었다.

맥주에 위스키, 소주까지.

누가 이사 왔는지 모르겠지만 술꾼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놀이터에 있을 거야.”

왠지 더욱 불안해진 은조는 카디건의 앞섶을 꽉 움켜잡았다.

순간, 휴대폰 말고 지갑도 챙겨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리기 시작한 손으로 다시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띠링-

앞집 현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입가에 검은 무엇인가를 묻힌-


“윤다온!!”

“엄마?”

“너, 너, 왜 거기서 나와? 어?”

은조는 거친 손길로 아이의 옷부터 몸, 팔다리 여기저기 살폈다.


“왜에? 아저씨- 힝…….”

“아저씨? 어떤 아저씨? 아저씨가, 너를, 만졌어??”

공포와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지는 찰나,

슬리퍼를 끌고 나온 맨발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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