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아들이었을까, 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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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아들이었을까, 딸이었을까
2023.01.16.
이모는 나갔고, 엄마는 방에 있었다.
다온이는 잠시 놀이터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뭐, 생각이라기보다는 그저 저도 모르게 자동으로 몸이 움직여졌다는 것이 더 맞지만.
아무튼 현관을 나섰는데, 바로 남자 둘과 마주쳤고 그중 하나가 아주 반가운 얼굴이었다.
“카일 아저씨!”
“어어, 동구리- 어디, 가?”
“짜장면이다!”
“……엄마 집에 있어?”
“네!”
“그런데 너 왜 나왔어?”
목소리를 낮춘 재하가 아이의 정수리를 헝클어뜨렸다.
“놀이터 가려고요.”
“이거…… 같이 먹을래? 먹고 가면 되지.”
응-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은 가구도 없는 썰렁한 아파트 거실에서 짜장면 한 그릇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아침은 먹었지?”
“네.”
“그래도 네가 많이 먹어. 아저씬 별로 생각이 없다.”
재하는 제 몫으로 한 젓가락 정도를 작은 그릇에 덜고 큰 그릇을 다온이 앞으로 밀어주었다.
“이거 싫어하는 아이는 없을걸. 아저씨 빼고 말이야.”
“안 좋아하는데 왜 시켰어요?”
야무진 질문을 하는 아이를 바라보는 재하가 픽 웃어버렸다.
“그러니까.”
밤새도록 빈집에서, 내내 소리를 죽인 TV를 틀어두고 맥주와 위스키를 번갈아 마셨다.
입만 벙긋거리는 인간들을 괜히 쏘아보던 재하는 언제 몸을 움직였고 언제 그것을 시켰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낡은 현관문에 붙은 중국집 스티커.
그것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해바라기 언덕에서 먹었던 짜장면이 생각난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망할, 위스키.
잘 취하지 않는데 무슨 얼빠진 행동인지 스스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도 며칠 굶은 것처럼 맛있게 먹는 아이를 보니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왜 생전 좋아하지도 않는 중국집 음식을 저도 모르게 시켰나 했더니.
“널 만나려고 그랬나 보다. 천천히 먹어.”
재하는 제 몫으로 나누는 시늉만 한 나머지도 다온이의 그릇으로 넘겨주었다.
숙취 때문인지 머리가 띵했다.
“아저씨 그런데 왜 여기 있어요? 할머니 집 세 배로 산 게 아저씨예요?”
“어떻게 알았어? 이야, 동구리. 역시 똑똑해.”
“이모가 그랬어요, 세 배. 근데 아저씨 집이 훨씬 더 좋은데- 피아노도 있고.”
“너, 피아노 배워볼래?”
응- 입으로 검은 소스가 묻은 면발을 집어넣는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짜식, 보면 참 긍정적이고 매사에 거침없단 말이지.”
“……?”
“좋다는 얘기야, 훌륭하다고. 먹어.”
“…….”
“……엄마는 뭐하고 있어?”
“엄마는 손에 요렇게…….”
젓가락을 내려놓은 아이가 귀엽게 양 손바닥을, 손등을 차례로 문지르는 흉내를 냈다.
“화장해? 아아, 핸드크림?”
응- 끄덕인 아이는 다시 젓가락을 집더니 맛있게 음식을 먹었다.
“…….”
태어났으면 딱 너만 했겠다.
아들이었을까, 딸이었을까.
아…….
이제야 제가 며칠 동안 위장을 술로 절이며 끊임없이 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답도 없는, 안타깝고 쓰린 생각.
차라리 정신을 잃으면 좋겠는데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천천히 먹어, 윤다온.”
재하는 단무지 하나를 아이 그릇에 넣어주고 물병의 뚜껑을 땄다.
***
슬리퍼 안쪽, 발바닥에 붙은 흰 밴디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더럽고 지저분한 술꾼…….
이를 악문 은조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당장 경찰부터 불러야 하나 생각하며 눈을 최대한 매섭게 치켜뜨는데-.
“……?”
“……안녕.”
은조는 커진 눈을 껌벅거리며 아이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털고 나서야 다시 남자에게로 시선을 올렸는데.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정말 권재하였다.
“……!”
부스스한 머리에 흰색 반팔 티셔츠, 회색 트레이닝 바지.
8년 전 예쁜 권재하에게 조금 지저분한 형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딱 이 모습이리라.
“……지금 여기서, 뭐해?”
은조의 목소리가 여리게 떨렸다.
“엄마, 아저씨가 할머니 집 세 배로 샀대! 아저씨 이제 우리랑 같이…….”
“이 씨- 이 나쁜 새끼!! 도른X! 미친X!”
눈이 뒤집힌 은조는 재하를 향해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다.
피하지도 않는 그를 상대로 얼굴이건 가슴이건 닥치는 대로 때리고 할퀴었다.
“미쳤어!! 미쳤냐고! 나한테 왜 이래! 대체 무슨 짓까지 해야 만족할 건데! 넌 미쳤어!!”
“……미안, 잘못했어.”
“잘못? 뭘 잘못했는데, 어? 뭘 잘못했냐고!! 왜 자꾸 내게서 뭘 뺏어가!! 왜 할머니를 떠나게 했냐고!”
“미안해…… 은조야.”
“으아앙…… 엄마아, 흐앙…… 내가 아저씨…… 으아앙…….”
아이가 울면서 은조에게 매달렸다.
“다온 엄마, 괜찮아요?”
“……!”
걱정스러운 목소리는 위층에 사는 아주머니였고 그녀의 남편과 아들딸들이 전부 계단 위에 서 있었다.
그중 작은딸이 제 언니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네, 네! 괜찮아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방금 전까지 미친 여자처럼 굴더니, 아무 일도 아니라니.
게다가 저와 남자가 나눈 대화를 들었다면 저들 입장에서는 대단히 흥미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미혼모에게, 그것도 앞집에 나타난 남자라니.
“아무 일도 아니에요. 시끄럽게 해서 죄송한데, 자리를 좀 피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우는 아이를 감싸 안은 은조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매우 야무지고 당당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하지만 수군거리는 구경꾼들이 사라지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민아가 나왔다.
“다온아! 언니! ……권재하 씨?”
은조는 얼른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권재하’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아니겠지.
괜히 조마조마해진 심정의 그녀는 이내 날카로운 시선을 원인 제공자에게 돌렸다.
“언니…… 아, 그런데 저기, 그…… 뺨이요. 안 아프세요?”
“……?”
재하의 뺨에 길고 붉은 줄이 생겨 있었다!
피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창백한 얼굴 위에서 생긴 상처는 꽤 선명했다.
멋쩍은 미소를 짓는 그가 커다란 손으로 제 뺨을 감쌌다.
“아, 괜찮아요. 있는 줄도 모르겠는데요.”
“일단 들어오세요. 저희 집에 구급상자 꽤 빵빵해요. 아시죠, 제 직업.”
말릴 틈도 없이 민아가 재하를 집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언제 울음을 그쳤는지 다온이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고 어느새 복도에는 은조 혼자였다.
지금…….
권재하가. 그러니까…… 내 집에, 들어간 거야?
기가 막히고 아직도 손이 떨렸지만 복도에 계속 서 있을 수도 없었다.
.
.
“어휴, 큰일 났네…… 잘생긴 얼굴에 흉 지면 어떡해요.”
눈을 홉뜨고 지켜보는 은조를 무시한 민아가 진심으로 잘난 상판대기를 걱정하는 듯한 발언을 일삼았다.
“이거 되게 좋은 연고예요. 드릴 테니까 내일 아침에도 바르세요. 요거는 드레싱 밴드. 어! 발바닥에도 있네요. 거긴 또 어쩌다가 다치셨어요?”
“아, 구겨진 맥주 캔을 밟아서. 괜찮아요.”
“꿰맸어요? 병원은 가보셨어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소독도 했고 별로 아프지 않아요.”
이제 민아는 재하의 발바닥까지 살피려는 듯 허리를 낮게 숙였다.
“그만해!”
더는 못 들어주겠다고 생각한 은조가 끼어들었다.
“언니, 쉿!”
민아의 동그란 눈이 거실을 서성이던 은조에게 왔다가 이내 다른 쪽으로 옮겨졌다.
“……!”
다온이가 잠들어 있었다. 그것도 재하의 무릎 위에서!
쓴웃음을 흘리는 권재하가 아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미안.”
젠장!
입을 앙다문 은조와 다르게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난 민아는 주방으로 향했다.
“제가 시간이 많지는 않은데요. 오늘 처음 뵈었으니 차는 한잔 드려야겠어요.”
전기 주전자의 버튼을 누르고 제가 좋아는 펄 재스민 차까지 꺼낸 동생을 은조가 쏘아본다.
느릿하게 찻잔까지 준비한 민아가 다가온 은조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언니…… 선주네 엄마가 돌아가셨어.”
“……뭐?”
선주는 민아의 가장 친한 친구고 그녀의 엄마라면 아직 젊으시다.
“걔가 말을 안 하고 있었어. 아프신 지 1년도 넘었다는데.”
“…….”
“나, 옷 갈아입고 다시 나가 봐야 해. 오늘 못 들어올 가능성이 높고…… 나가기 전에 같이 차 한 잔 조용히 마시고 싶은데. 응?”
“……그래. 근데 어쩌다가.”
“나중에. 다녀와서 얘기해. 앉아 있어, 내가 준비할게.”
.
.
“시중이요?”
“네, 심부름요. 근데 처음부터 신세를 진 꼴이 되었네요.”
흥, 시중 좋아하네. 누구 마음대로- 은조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재하와 민아가 앉아 있는 소파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런데 저 녀석은 언제부터 권재하를 좋아했다고-
아이는 그의 너른 품 안에서 쌔근쌔근 잘도 자고 있다.
“아무튼, 제가 지난번 뵈었을 때도 그렇고 감사 인사를 제대로 못 드렸어요. 진심으로…….”
“그럴 필요 없어. 감사 인사 내가 충분히 했어. 안 그래?”
민아의 말을 자른 은조는 쥐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유야 잘 모르겠지만- 이웃이 되었으니 앞으로…….”
“이웃, 아냐.”
“언니, 그냥 편하게 하면 안 될까. 물론 내가 사정을 전부 아는 건 아니지만…… 음, 그게…….”
갑자기 감정이 솟구치는지 잠시 숨을 고른 민아가 재하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 아무튼 저는 이만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혹시, 제가 뭐 도울 건 없을까요.”
여전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재하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끼어들었지만.
“아니, 절대 없어.”
은조가 차갑게 거절했다.
난감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던 민아는 금세 검은 옷을 입고 다시 나타났다.
“두 분한테 우리 다온이 맡기고 가도 되죠? 언니……?”
은조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아이에게 베개를 받쳐주는 은조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없어. 미안해.”
“없는데 이래? 여기서 뭘 어쩌게?”
“……사실 나도 몰라. 그냥 네가 원하는 거 해줄게, 뭐든지.”
“뭐든지? 그럼 죽어주든가.”
망설임 없이 차가운 소리를 내뱉은 은조는 현관문을 열었다.
“그거라면, 조금만 기다려. 죽어가고 있는 것 같거든.”
“그래서 보라고 술병들을 내놨어? 술 마시고 죽을 수 있으면 쉽게?”
은조는 세게 문을 닫았다.
이직은 물론 이사까지 생각해 봐야겠다. 달갑지 않은 상황으로 자신을 모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
.
하지만 캄캄한 새벽.
은조는 새 이웃의 현관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